제190화
『…어둠이 걷혔어? 더는 아프지 않아…?』
한 폭의 사진처럼 모든 것이 멈춰버린 황금빛 세상 속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절로 닭살이 오소소 돋을 듯, 귀여우면서도 가는 목소리였다.
-푸스스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라크슈마의 육신이 있던 곳을 바라보자.
어둠과 빛에 휘감겨 소멸해가는 몸뚱이에서 연분홍빛 영혼이 스르륵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린 소녀처럼 조그맣고 가녀린 형상의 영혼은 어리둥절하다는 몸짓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아아아. 그랬군요. 그랬군요. 당신이 저를 그 저주받은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셨군요.』
나와 시선을 마주친 라크슈마의 연분홍빛 눈망울에서 둑 터지듯 눈물이 흘러나왔다.
쌓인 한이 오죽 많았는지, 그녀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한참 동안 서럽게 흐느꼈다.
원치 않은 모습으로 더더욱 원치 않았던 삶을 살아왔던 라크슈마의 한과 미련이 눈물이 되어. 자그마한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
라크슈마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계속 내게 고마움을 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 나는 말 없이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파아아앗!
황금빛 광휘에 휘감긴 손이 라크슈마의 머리에 닿자.
그녀의 한을 달래주겠다는 내 의지에 따라 『원혼 제령술』 스킬이 발동되었다.
내 손에서 비롯된 따사로운 황금빛이 라크슈마의 자그마한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 손길을 따라 라크슈마의 영혼에서 희끄무레한 ‘업’이 딸려 나오자.
황금빛 광휘에 휩싸인 라크슈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식이 깃들었다.
그렇게 안식을 되찾은 그녀는 허리를 꾸벅 숙여, 내게 감사를 표하곤 조금씩 조금씩 따사로운 빛 속에서 사라져갔다.
「축하합니다. 낙오자 『라크슈마』의 영혼을 해방하셨습니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에 새로운 영웅시 『라크슈마』가 등록됩니다.」
『원혼 제령술』의 효과로 라크슈마의 영혼에서 딸려 나온 ‘업’이 내 몸으로 흡수된 순간.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에 새로운 영웅시가 추가되었다.
나는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는 라크슈마의 기억을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그나저나. 설마하니 원혼 제령술이 초월적인 존재들에게도 먹힐 줄이야.”
의외의 결과였다.
서글프게 흐느끼는 라크슈마의 모습에 연민을 느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넋을 달래줄 심산으로 『원혼 제령술』을 사용한 것뿐이었는데.
의외로 『원혼 제령술』은 한때 신이라 불렸던 그녀에게도 다른 필멸자의 영혼에게 사용했을 때처럼 유효하게 작용 되었다.
…어차피 육신이 스러진 상태라, 신이든 인간이든 똑같은 ‘망자’로 취급되는 것인가?
“뭐, 지금은 그 사치스러운 의문 따윌 해소할 틈이 없겠지만.”
『원혼 제령술』의 효능에 대해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겐 그것에 대해 깊이 고뇌할 시간이 없었다.
“후우…. 도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 강태백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라크슈마의 영혼이 성불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의 광휘 속에 차갑게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검게 일렁거리는 어둠과 번쩍이는 새하얀 빛에 휘감긴 라크슈마의 시신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푸스스 풍화되듯 조금씩 소멸해갔다.
「위업 [게이트 – 왜곡된 현실] 달성!」
「칭호 [왜곡된 공간을 되돌린 자]가 수여됩니다.」
「칭호 보상 – 능력치 보너스 포인트 [+10]」
「최초 위업 달성 보상!」
「공격대원들과 최초로 위업 [게이트 – 왜곡된 현실]을 획득하여, 추가 보상 상자가 지급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특성 포인트가 제공됩니다.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세요.」
「게이트 우두머리, 마슈크라의 전리품 상자와 추가 보상 상자가 출현합니다.」
「특성 『야바위꾼의 악운』의 효과로 추가 선택지가 출현합니다.」
「여섯 개의 전리품 상자 중 두 개를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쿠웅! 쿠웅! 쿠웅!
라크슈마가 이곳 왜곡형 게이트의 우두머리였던 모양인지.
그녀의 시신이 완전히 소멸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출력되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야바위꾼의 악운』 특성의 효과에 따라, 거대한 상자 여섯 개가 뚝 떨어져 내렸다.
“아, 아무래도 협동해서 토벌한 것으로 취급한 모양이네요.”
나는 강태백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눈앞에 등장한 보상 상자들을 가리켰지만.
강태백과 황윤형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와 강태백, 황윤형 사이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 보상 상자. 그토록 강대한 존재마저 한낱 게이트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모양이로군.”
잠시 냉랭한 침묵을 유지하던 강태백은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힘없이 실소를 흘렸다.
눈앞에 떨어진 보상 상자들을 바라본 그의 눈빛엔 왠지 모를 공허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자네가 갖게. 놈에게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우리가 자네에게 무슨 낯짝으로 보상을 요구하겠나.”
“아, 아니. 모두 힘을 합쳐, 토벌한 것 아니겠습니까. 길드장 님과 황윤형 헌터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진작 숨겨진 힘을 드러내고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마무리 지었겠지.”
힘없는 목소리로 허탈하게 중얼거린 강태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황윤형을 말없이 바라보자.
그와 시선이 마주친 황윤형은 말없이 품속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강태백에게 넘겨주었다.
“후우우.”
강태백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잿빛 연기가 한숨처럼 니힐하게 흘러나왔다.
주인의 복잡한 심리를 대변하듯, 한숨처럼 흘러나온 담배 연기는 허공을 덧없이 유영하다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마력향에 중독되어 기억이 흐릿하긴 하나. 처음 만남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네. 자네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말일세.”
“…길드장님.”
“칼 밥 먹고 살아가는 이 살벌한 바닥에서 실력을 숨기는 것이 죄는 아닐세. 나 역시 소싯적엔 최후의 한 수를 대비해. 솜씨를 숨겼고 말일세.”
계속해서 끊었던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는 강태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살짝 원망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배신감이 느껴지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렇기에 자네가 그동안 실력을 숨긴 것을 이제와서 질투하거나 탓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그것만은 말해주지 않겠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