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꾸드드득!
시커멓게 물든 오른팔이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지며, 어둠을 머금었다.
새하얀 전하가 휘몰아치는 왼팔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빛을 품었다.
세상을 호령하며 죽음과 파괴를 흩뿌리던 니리르티의 힘과 권능이 내 양손에 깃들었다.
“이토록 강한 권능을 지녔던 그녀마저, 인과율이란 놈에게 패배해 낙오자로 영락해버렸단 말이지…. 댁들은 나보고 그렇게 살벌한 놈을 상대하라는 건가?”
그렇게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가 발동되자.
니리르티의 권능과 함께, 그녀가 내게 남긴 한 맺힌 응어리가 머릿속에 천천히 떠올랐다.
막대한 힘과 권능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저항해봐도 무력하게 패배한 굴욕! 아픔! 억울함!
기억과 권능을 뺏긴 채,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한 설움!
머릿속에 서리 폭풍처럼 차갑게 휘몰아치는 니리르티의 한 맺힌 기억을 살펴본 나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낙오자들이 남긴 무거운 과업과 그들이 내게 건 무거운 기대에 영혼이 짓눌러질 듯이 부담스러웠지만, 내 가슴 속에선 어째선지 용암과도 같은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버, 벌써 그릇이 눈을 떴을 리가 없어! 이, 이 교활한 필멸자 놈! 감히 이 몸을 속이려고 들어!』
-카가가각!
니리르티의 권능을 두른 내 모습에 마슈크라는 현실을 부정하듯 악을 쓰며, 손톱을 휘둘렀다.
마력의 힘으로 꼭두각시 인형처럼 둥둥 떠오른 그녀의 육신이 빠른 속도로 내게 쇄도해왔다.
흉측하게 자라난 마슈크라의 손톱에서 진득한 살기와 검붉은 마력이 흉험하게 꿈틀거렸다.
-꽈르르릉!
하지만 발작하듯 발악적으로 휘두른 마슈크라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했다.
새하얀 빛과 전하에 휘감긴 왼팔을 슬쩍 들어 올린 것만으로 파괴의 권능이 전방을 휩쓸었다.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우는 막강한 힘에 노출된 마슈크라의 육신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기억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이런 장난감 따윌 대역으로 내세울 만큼, 본능적으로 자신의 변해버린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건가? 당신도 참 가엾어.”
낙오자들의 기억을 통해, 마슈크라. 아니 라크슈마의 원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별칭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크슈마의 아름다운 외모는 마슈크라로 영락하는 과정에서 ‘인과율’이라는 존재의 손에 의해 추악하게 뒤틀려 버린 지 오래였다.
‘인과율’이라는 존재의 악취미에 희생된 그녀의 운명을 떠올린 나는, 어째선지 그녀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부끄럽다니! 가엾다니! 그 분신체는 이 몸이 네놈들과 수준을 맞춰주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하찮은 필멸자 놈이 주제를 모르고 까불어 대는구나!』
연민의 감정이 가득한 내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소용돌이 속에서 라크슈마의 격노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왔다.
소용돌이를 구성하는 검붉은 마력이 그녀의 심기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불길하게 요동쳤다.
『오만한 헛소리만 지껄여대는 그 혀를 뽑아주마!』
시커멓게 물든 하늘이 시뻘겋게 번쩍이며, 핏빛 번개가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묵직하게 울리는 천둥이 검붉은 소용돌이에서 터져 나왔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허공에서 라크슈마의 새로운 육신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인형 놀이는 따위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시지. 허심탄회하게 얼굴 보면서 이야기 해보자고!”
꽃이 피어나듯, 아름다운 외형을 자랑하는 라크슈마의 새로운 육신이 하늘에 피어났지만.
나는 마력으로 빚어낸 거짓된 육신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파츠츠츠!
검붉은 소용돌이를 똑바로 노려보며, 양손에 힘을 끌어올리자.
내 의지에 감응한 파괴의 권능과 죽음이 권능이 얼기설기 얽혀 단단한 사슬이 되었다.
그렇게 니리르티가 생전에 즐겨 사용하던 기술을 구현한 나는 사슬을 휘둘러,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검붉은 소용돌이 안에 던져 넣었다.
-꽈드드득!
사슬을 쥔 양손에 내력과 니리르티의 권능을 주입하자, 무서운 괴력이 발휘되었다.
곧이어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뿌리가 통째로 뽑혀 나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소용돌이에서 라크슈마의 비대한 본체가 끌려 나왔다.
-꾸꽈아앙!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네. 어때? 그쪽도 ‘진짜’ 육신으로 간만에 바깥공기 쐬니 기분이 상쾌하지 않아?”
거대한 육신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자, 바닥이 푹 꺼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솟구친 먼지가 건조한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맹렬히 휘몰아쳤다.
화안금정의 힘으로 자욱한 먼지 속을 꿰뚫어 본 나는 히죽 웃으며,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라크슈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어떻게…. 크으윽! 보, 보지마! 나를! 이 추악한 몸을! 보지 말란 말이다!』
라크슈마는 대단히 당황한 목소리로 꿈틀거리는 촉수와 비대하게 살찐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가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시커먼 하늘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추악했다.
검붉은 진물이 번들거리며,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비대하게 살찐 육신.
주름지고 살찐 몸뚱어리 위에 빈틈없이 돋아난 검붉은 촉수.
솜씨 나쁜 화가가 돼지와 원숭이의 외형을 적절히 차용해 그려 넣은 듯한 못생긴 얼굴.
지금 라크슈마의 외형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과도, 그녀의 권능을 이용해 만들어 낸 분신과도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 감히! 피, 필멸자 주제에. 필멸자 주제에!』
-꾸와아아앙!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라크슈마는 흐느끼듯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발작하듯 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군주급 마족의 본체답게 그녀의 공격엔 지금까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한 마력과 괴력이 실려 있었다.
“그래. 괴로웠겠지…. 과거의 기억은 사라졌겠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외모를 자랑스러워했던 당신이 그런 모습이 되었으니 말이야.”
라크슈마의 성질을 돋우기 위해, 도발적인 표정과 발언을 꺼냈지만.
정작 그녀가 울부짖으며 발악하는 모습을 보자, 어째선지 다시 한번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연민의 감정이 솟구쳤다.
약간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아, 쓸쓸하게 읊조린 나는 이를 까득 깨물곤 라크슈마와 연결된 사슬을 꽉 잡아당겼다.
“내가 그 괴로운 삶을 끝내주겠어!”
사슬을 움켜쥔 나는 거센 포효를 터뜨리며, 양손에 깃든 니리르티의 권능을 폭발시켰다.
몸속에 흉포하게 꿈틀거리는 내력을 모조리 양손으로 밀어 넣었다.
「경고! 사용자님이 제어할 수 있는 마력 수치를 넘어섰습니다.」
「경고! 영웅시의 힘을 지나치게 끌어 쓸 경우, 영웅시의 효과가 강제로 종료될 수 있습니다.」
라크슈마를 한 번에 편하게 보내줄 각오로, 내게 깃든 니리르티의 마력까지 모조리 끌어다 한 번에 터뜨리자.
고통과 함께 머릿속이 허옇게 물들며, 경고를 뜻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양손에 마력을 주입했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을 타고 시커먼 죽음의 기운이 음울하게 솟구쳤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손을 타고 새하얀 파괴의 기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니리르티가 관장하는 두 가지 기운이 내 몸을 빌려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발현되었다.
양손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죽음과 파괴의 기운이 사슬을 타고 순식간에 라크슈마의 거대한 육신에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사슬을 타고 들어간 두 가지 기운은 라크슈마의 거대한 육신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토해낸 라크슈마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왈칵 쏟아지자.
나를 향해 휘둘러졌던 거대한 손이 힘을 잃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사슬에 꽁꽁 묶인 채, 용을 쓰며 버둥거리던 그녀의 몸뚱어리가 움직임을 뚝 멎었다.
「경고. 영웅시 『니리르티』의 효과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라크슈마의 육신이 움직임을 멈춤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며, 내 몸에 깃들었던 니리르티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공허한 기분과 함께, 끔찍한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어라?』
온몸에 찾아든 무력한 기분에, 바닥에 던지듯 몸을 누이려던 찰나.
무언가 의문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시간이 얼어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