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급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갑자기 출력된 뜬금없는 메시지.
시야 오른쪽 아래에서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시스템 메시지 창엔 알 수 없는 글귀가 출력되어 있었다.
조건을 충족했다고? 그게 무슨….
-번쩍!
갑자기 출력된 메시지의 내용에 미처 의문을 느낄 새도 없었다.
머릿속에 시커먼 의심의 먹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기 시작하기 무섭게.
눈이 멀어버릴 듯한 금빛 광채와 함께, 강물처럼 흐르던 시간이 통째로 꽝꽝 얼어붙었다.
-꽈드드득!
불온한 기운을 흩뿌리며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검붉은 소용돌이도
광기와 살의에 찬 표정으로 내게 막 손톱을 휘두르려던 마슈라크의 육신도
그 장면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던 강태백과 황윤형도
모두 금빛 광채 속에 그 모습 그대로 정지되어, 꽁꽁 얼어붙었다.
「고대의 안배에 따라, 특성 『낙오자들의 진혼곡』의 진정한 권능이 개방됩니다.」
또 다시 의문의 메시지가 모든 것이 정지된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조용히 출력되었다.
곧이어 마족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등장했던 수레바퀴가 내 몸 속에서 쑤욱 빠져나와 찬란한 황금빛을 흩뿌리며 하늘 높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낙오자들의 진혼곡의 진정한 권능이라니.
낙오자들의 기억을 흡수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능력이 있었던 건가?
계속된 의문에 속이 버쩍버쩍 말라가는 느낌이었지만. 머릿속에 흐릿하게 낀 의문의 먹구름을 멀끔하게 지워낼 틈도 없었다.
의아함을 미처 풀어낼 새도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 수레바퀴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광채를 흩뿌리며 조금씩 부서져 나갔다.
“크으윽!”
수레바퀴가 조금씩 부서져내리며 강렬한 금빛 광채를 토해낸 순간.
머리를 통째로 압착기에 넣고 으깨는 듯한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동시에 겪어본 적이 없던 낯선 기억의 홍수가 머릿속을 허옇게 물들였다.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 우물에 투신한 황녀, 동백나무에 목을 맨 직공, …빛에 먹혀버린 어둠의 여인.”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기억들의 정체는 수레바퀴에 음각된 ‘낙오자’들의 기억이었다.
지금까진 동기화율이 낮아, 머릿속에 단편적인 기억들만 드문드문 새겨졌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그들이 살아왔던 슬프고 처절한 기억들이 너무도 생생히 통째로 내 기억속에 아로새겨졌다.
“…그랬군. 당신들이 어째서 ‘낙오자’라고 불리는 신세가 되었는지 알겠어.”
낙오자….
찬탈과 투쟁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하지 못해 낙오자로 추락한 가엾은 이들, 승천을 위해 노력했으나 필멸의 굴레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해 낙오자로 남아버린 불쌍한 이들, 권좌를 찬탈당한 가엾은 이들….
수레바퀴에 아로새겨진 이들이 살아왔던 처절한 삶의 역사가 내 기억 속에 온전히 흡수되자.
나는 지난번에 나슈리크가 말했던 ‘낙오자들을 인도하는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에게 안식을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인과율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그런 것이었다니.”
인도석에 응어리진 한과 미련의 힘으로 인해, 나는 ‘인과율’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난 상태였다.
마치 하늘을 가리는 먹구름처럼, 인도석에 남은 그들의 흔적은 세상을 굽어 살피는 ‘인과율’의 시선을 흐릿하게 가리는 권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었나? 이 불합리한 투쟁의 역사를 끝내달라고?”
머릿속에 밀려든 이들의 한과 미련은 저마다 각기 달랐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과율’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장난질로부터 세상을 자유로이 해방하는 것….
불가능에 가까울만큼 터무니 없이 힘든 일이었지만.
그렇게 힘든만큼 스러저간 이들이 처절히 갈망해온 일이었다.
“일단 해보지. 나도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은 딱 질색이거든.”
머릿속에 파고든 새로운 기억들 때문인지,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의 한맺힌 넋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마치 그들의 넋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나는 스러져가는 수레바퀴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특성 『낙오자들의 진혼곡』이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로 진화합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됨과 함께,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한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주변의 풍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를 잠깐 열어보는 것까진 괜찮지 않을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마슈크라의 손톱이 내 머리통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모든 것을 자르고 토막낼 듯 잔인하고 패도적인 마력이 내 숨통을 노렸다.
-카가가각!
하지만 그렇게 파괴적인 마력을 뿜어내며 날아든 손톱은 내가 가볍게 휘두른 어둠달에 너무도 간단히 막혀버렸다.
“안타깝군. 한때 미의 화신이라 불렸던 당신이 이런 식으로 영락해버릴 줄이야.”
머릿속에 흡수된 낙오자들의 기억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내게 알려줬다.
덕분에 나는 마슈크라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가 생전에 어떤 비극을 겪은 존재였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영락하다니. 무슨 시건방진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구나.』
자신의 공격을 너무도 간단히 막아낸 내 손길과,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의외의 말에 마슈크라는 새삼스럽게 이채를 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가라앉은 시선과 그녀의 시커멓게 죽은 시선이 교차한 순간, 마슈크라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네, 네놈. 그, 그 흉흉한 기운은 도대체….』
“흉흉하다니, 조금 전까지 그릇이니 뭐니 떠든 것은 그쪽이 아니었나?”
『마, 말도 안돼. 버, 벌써 그릇이 눈을 뜰 리가 없어!』
“그러게 말이야. 원래 조금 더 자려고 했었는데, 그쪽이 힘을 써 준 덕분에 눈을 뜨고 말았지 뭐야.”
마슈크라의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반응에 입꼬리를 사납게 뒤튼 나는 『낙오자들의 진혼곡』, 아니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새로운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파츠츠츠츠!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습득하듯,
날짐승이 날갯짓하는 방법을 어미로부터 습득하듯.
나는 머릿속에 각인된 티르리니의 기억으로부터 그녀가 생전에 휘둘렀던 힘과 권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에 따라, 영웅시 『니리르티』가 잊혀진 영웅의 힘과 권능을 노래합니다.」
「사용자님이 보유한 마력에 따라, 영웅시 『니리르티』의 효과는 『30분간』 지속됩니다.」
-파지지직!
“티르리니, 아니 니리르티. 그녀 역시 불운한 삶을 살았지….”
특성 『잊혀진 자들의 영웅시』의 효과로 『니리르티』의 영웅시가 발동되자.
‘인과율’이라는 존재의 힘에 의해, 낙오자로 영락했던 죽음과 파괴의 신. 니리르티의 힘과 권능이 내 양손에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