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요즘 필멸자들 사이에선 남들 사이에 갑자기 난입해오는 게 유행인가 봐?』
자신의 공격이 계속해서 방해받자, 마슈크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목소리에 서서히 서리가 내려앉는 것이, 아무래도 슬슬 짜증이 치솟는 모양이었다.
검붉은 기운이 흉흉하게 번들거리며, 그녀의 등 뒤에서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렸다.
“나름대로 강자를 예우해주는 방식이라고 할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마슈크라의 짜증을 마주한 나는 능글맞게 히죽 웃으며, 은근슬쩍 황윤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뒤편에서 강태백이 지쳐 나자빠진 황윤형을 수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디 한번 재밌게 놀아 보자며? 그럼 그쪽도 우리 ‘필멸자’들의 방식대로 어울려 주셔야지. 아, 설마하니 쪼잔하게 불공평하니 뭐니 하면서 요상한 소릴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
강태백이 황윤형을 부축해, 포션을 먹이는 사이.
나는 도발적인 시선과 함께, 어둠달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마슈크라의 이목을 끌었다.
살짝 비틀게 올라간 입매와 한쪽 눈썹만 슬쩍 올린 재수 없는 표정이 내 얼굴에 떠오르자, 나와 시선을 마주한 마슈크라의 눈가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흐응. 잘생긴 외모로 재미 좀 보면서 살아와서 그런가. 얼굴 써먹는 솜씨가 제법이야? 그 고리타분한 인과율께서 이번 그릇은 꽤 재미난 놈을 고르셨네.』
한쪽 눈을 찌푸린 마슈크라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음험해지자, 그녀의 등 뒤에 너울거리는 검붉은 기운이 성난 구렁이처럼 더욱 광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재미 좀 자주 보고 살았지. 왜 썰 좀 풀어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최대한 시간을 벌 심산으로, 나는 마슈크라에게 계속 이죽거리며, 다양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면서 검은 심장을 이용하여, 주변을 검붉게 물든 마슈크라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해갔다.
-두근! 두근! 두근!
마슈크라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탐한 검은 심장이 막대한 내력을 내 몸속에 밀어 넣었다.
과연 군주급 마족답게, 그녀의 마력은 그 미미한 편린마저 대단한 수준이었다.
여지껏 검은 심장이 흡수해온 마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시커먼 내력이 흉포하게 요동치며, 전신에 무서운 힘을 불어넣었다.
-꾸드드득!
근육이 터질 듯 단단하게 부풀었다. 비죽 자란 송곳니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나무뿌리보다 억세고 쇠심줄보다 질긴 힘줄이 온몸에 투두둑 돋아났다.
시커먼 내력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내 몸 주변에 시커먼 와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됐고, 흐응. 계속 헛소리하면서 뭐 하나 했더니…. 내 마력을 좀 훔쳐먹고 있었던 모양이야? 깜찍하긴.』
내게 마력을 흡수당했음에도 불구, 마슈크라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연분홍빛 눈을 반짝였다.
언제 재생되었는지, 다시 하늘하늘해진 소매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은 그녀는 장난치듯 반대쪽 손가락을 살짝 까닥였다.
『그렇게 조금씩 흡수해서 되겠어? 내가 도와줄게.』
-쿠콰아앙!
마슈크라의 입에서 고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불길하게 꿈틀거리던 검붉은 마력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다.
강태백과 황윤형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어떠한 변형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마력의 향연이 사방을 검붉게 물들이며 내 숨통을 노리고 마치 성난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크허어엉!”
주변을 검붉게 물들인 마력의 향연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폭주하듯 날뛰어대는 내력으로 인해, 고조될 대로 고조된 육신에서 폭발적인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콰지직!
살짝 대지를 박찼을 뿐인데, 바닥이 움푹 꺼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내 육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
덕분에 주변을 잠식하며 밀려들던 검붉은 마력은 엉뚱한 곳을 휩쓸었다.
『어째서 너희 필멸자들은 하늘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날개도 없는 것들이 하늘로 떠 올라봐야. 무방비하기만 하잖아.』
그렇게 하늘로 도약하여 마슈크라의 공격을 피해낸 순간. 머릿속으로 비웃음 가득한 사념파가 침투해왔다.
곧이어 바닥을 휩쓸었던 검붉은 마력의 파도가 그대로 나를 좇아 하늘을 향해 쭉 솟구쳤다.
-후웅! 후웅! 후웅!
솟구치는 검붉은 파도에 대항하며, 나는 어둠달을 아래쪽으로 재빠르게 휘둘렀다.
파천 복룡창의 첫 번째 초식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인 어둠달이 허공을 찢어발기자.
쉴새 없이 소용돌이치는 시커먼 와류에 휘감긴 창날이 일곱 마리 용의 형상을 빚어냈다.
-꽈직! 꽈지지직!
평소보다 세배는 큼직한 일곱 마리의 시커먼 용이 검붉은 파도를 덥석 베어 물었다.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자, 시퍼런 전하가 번쩍였다. 시뻘건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내 목숨을 노리며 날아든 검붉은 마력이 그렇게 일시적으로나마, 시커먼 용에게 가로막혔다.
-쿠르르르르!
두 개의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동안, 나는 다음 수를 준비했다.
황금빛 외골격에서 풀려나온 시커먼 내력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한 마리 이무기처럼 승천한 내력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주변의 먹구름을 잔뜩 끌어모았다.
『흡수한 마력이 제법 입맛에 잘 맞나보네? 칭찬해줄게. 아까보단 더 잘 버티고 있어. 뭐…. 귀여운 발버둥에 불과하겠지만.』
머릿속에 다시 한번 마슈크라의 목소리가 사념파의 형태로 침투해왔다.
뇌를 통째로 녹여버릴 듯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솟구친 검붉은 마력의 파도가 사방에서 나를 덮쳐 왔다.
-콰르르릉!
검붉은 마력이 내 육신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바로 그 순간!
대기를 찢어내는 천둥소리와 함께, 사방이 번쩍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먹구름에서 새하얀 용 한 마리가 지상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파차차차창!
그렇게 파천복룡창의 다섯 번째 초식. 광룡광림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자.
먹구름 속에서 증폭된 내력이 번개의 형태가 되어 검붉은 마력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삿된 기운을 정화하는 극양의 기운이 마슈크라의 사악한 마력을 불태웠다.
『정정할게. 제법 괜찮은 발버둥…큽!』
검붉은 마력의 파도가 모조리 불타자, 머릿속에 마슈크라의 사념이 또 들려왔다.
하지만 난 그녀의 목소리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 힘을 이용해 어둠달을 힘껏 내리찍었다.
-카가가각!
폭발하듯 요동치는 내력과 위치 에너지의 조화로 인해, 마슈크라는 처음으로 타격을 입었다.
시커먼 와류에 휘감긴 창날이 마슈크라의 어깨에 아주 조금이나마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보랏빛 피가 하늘하늘한 옷을 조금씩 어둡게 물들여갔다.
『아파라. 필멸자 주제에 내게 피를….』
마슈크라는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생긋 웃은 마슈크라의 얼굴에 외골격으로 뒤덮인 황금빛 주먹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투쾅! 투쾅! 투쾅!
황금빛 외골격과 시커먼 내력에 휘감긴 주먹으로 마슈크라의 얼굴을 연속해서 가격하자.
마치 대장간에서 망치로 금속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을 후려친 주먹에서 시큰한 고통이 느껴졌다.
『기껏 말하고 있는데. 얼굴만 집중적으로 후려치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빌어먹을 역시, 정면으론 타격을 입힐 수 없는 건가?
어둠달의 창날이 마슈크라의 어깨를 살짝 관통하긴 했지만.
그건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에 성공한 결과일 뿐이었다.
군주급 마족답게 마슈크라는 공격에 적중당할 때마다. 해당 부위에 마력을 집중해 공격을 완전히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머리통을 터뜨릴 기세로 힘껏 후려갈겼음에도 불구하고, 마슈크라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이지 너희 필멸자들은 기초적인 예의가….』
-화르르륵!
-쿠르르륵!
살짝 열이 받은 모양인지, 이맛살을 찌푸린 마슈크라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지려는 순간.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시퍼런 불덩이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에 정통으로 적중했다.
그와 동시에 구불구불 소용돌이치는 물줄기가 날아와 몸통을 때렸다.
부지불식간에 펼쳐진 기습에 마슈크라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크게 휘청였다.
“흐음. 역시 기습을 노려야만 승산이 있겠군.”
내가 마슈크라를 상대하는 사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기습과 함께 나타나, 내 오른편에 선 강태백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마슈크라를 바라보며.
평소의 그답지 않게, 별로 신사적이지 않은 소리를 내뱉었다.
“…기습이라니. 그다지 내키는 방법은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죠.”
별로 달갑지 않다는 목소리로 피식 웃으며 다가온 황윤형은 내 왼편에 섰다.
포션이 그의 육체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동요까지 치유해준 모양인지.
외골격을 두른 황윤형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실은 우리 선조들도 맹수를 사냥할 땐. 그리 ‘신사적인’ 방법으로 싸우진 않았다네. 그분들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도 어디…. ‘인간’답게 싸워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