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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 잘생겼다!-178화 (178/309)

제178화

황태용이 손가락을 깨물어 지장을 찍는 것으로 둘 사이의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고유의 마력이 담긴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하얀 종이를 붉게 물들였다.

허옇게 얼굴을 물들인 채, 입술을 깨문 황태용의 입가에서도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피를 사용해, 계약 내용을 영혼에 각인시키는 타입의 계약서라니.

강태백도 제법 치밀하게 준비해왔군.

“이제 되었군. 두말하기 없기요. 형님도 알다시피 이 계약서는 평범한 놈이 아니거든.”

“그래…. 이번만큼은 네놈이 원하는 대로 따라줄 터이니, 네놈도….”

이를 까득 깨문 황태용은 여전히 불안과 의심을 지우지 못한 눈초리로 바디캠을 노려보았다.

어르신이란 존재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큰 모양인지, 불안하게 떨리는 황태용의 눈빛에선 공포의 감정이 핏물처럼 배어 나오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시정잡배들이나 쓸 법한 저열한 방법을 사용하긴 했으나. 나 역시 마음이 편하기만 한 건 아니라오. 걱정은 마시구려.”

계속해서 황태용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바디캠에 멈춰있자.

쓰게 웃은 강태백은 손에 마력을 집중해, 단숨에 바디캠을 녹여버렸다.

매캐하니 씁쓸한 냄새와 함께, 시커먼 플라스틱이 그의 손에서 눈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

“가지. 목표한 건 이뤘으니. 이제 이곳에서 탈출하는 일만 남았군.”

손을 휘둘러 녹아내린 바디캠의 잔해를 털어버린 강태백은 주저앉은 황태용을 뒤로 한 채. 눈살을 찌푸리며 녹음이 우거진 평원 쪽을 바라보았다.

*****

“고맙네. 그리 달갑지 않은 방법을 써먹긴 했지만. 그래도 자네 덕분에 협력을 얻어내었어.”

지긋지긋하게 우거진 녹음을 헤치고 얼마나 걸었을까.

말없이 걷던 강태백이 갑작스레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감사를 표해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강태백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감정이 묻어 있었다.

“…뭐. 제가 한 건 별거 없긴 하지만요.”

“아닐세. 만약 황태용이 나보다 먼저 제정신을 차렸다면, 입장은 반대가 되어버렸겠지. 오닉스 길드의 지원을 따내긴커녕, 오히려 우리 쪽에서 그에게 무언가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는 말이야.”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강태백의 목소리에선 오싹한 공포의 감정이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몸놀림 또한 어딘지 어색한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강렬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길드장님도 그 ‘어르신’이란 존재가 그리도 두려우신가 보군요.”

내 입에서 ‘어르신’이란 단어가 흘러나오자, 강태백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살짝 멈칫 멈춰선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부정하진 않겠네. …부끄럽게도 가문을 벗어나,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 된 뒤에도 그분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회한 어린 표정이 떠오른 강태백의 얼굴은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으나, 애석하게도 사탕이 다 떨어진 모양인지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강태백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조금 더 넉넉히 챙겨올 것을. 이럴 때일수록 담배가 그리워지는군.”

사탕이 떨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강태백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쩐지 갑자기 찾지도 않던 사탕을 깨물어 먹는 것이 괴이쩍다 싶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금연을 시작한 것이었나.

“자네 입장에선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질 않겠지. 인간을 한참 뛰어넘은 내가, 휘하에 수없이 많은 초인을 거느린 내가 어째서 한낱 늙은이들 따위를 이토록 두려워하는지 말일세.”

“솔직히…. 그렇습니다. 공권력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셨다는 분께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좀 충격적이긴 하군요.”

한숨을 길게 내쉰 강태백은 마치 고해하듯 ‘어르신’이란 세력에 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내게 설명해준다기보단, 자신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을 털어내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인지 영역을 벗어난 자들을, 흔히 괴물이라 부른다지? 그렇다면 그분들만큼 그 ‘괴물’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이들도 없을걸세.”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부하가 오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이어가는 강태백의 몸에서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허옇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원래는 그저 막대한 재물과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권력을 이용해,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막후에서 주무르던 노인들에 불과했으나…. 대격변이 본가를 덮친 이후,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버렸네.”

“전혀 다른 존재요? 혹시 몬스터라던지 마족 같은….”

“아니, 그렇게 사악하기만 한 존재들은 절대 아닐세. 뭐랄까. 마치 성좌님들을 대면하는 듯한 경외심이 우러나온다고나 할까….”

홀린 듯 설명을 늘어놓는 강태백의 입에서 ‘어르신’들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자.

나는 비로소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성좌들의 ‘화신’이 벌써 강림해 있는 상태였나?

…화신.

하계의 삶. 필멸의 세계에 과하게 관심을 보이는 일부 강력한 성좌들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과한 은총을 내려, 자신들의 대리인이나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변형시킨 이들을 뜻하는 용어였다.

어쩐지…. 강태백과 황태용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회귀 전 역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화신들은 하나같이 강력한 힘과 권능을 자랑했었다.

그때 그시절, 그들이 보여줬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나는 강태백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황씨 가문에게 해가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는 것이 바로 그분들의 방식일세. 가문을 나온 나 역시, 여전히 그분들의 시야를 벗어나진 못했지.”

하지만 강태백의 심정이 이해가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회귀 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화신들은 하나같이 사사로운 감정 따위가 아니라. 인류가 위기에 처했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과부하된 게이트에서 튀어나와. 수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몬스터와 공멸한다든지.

헌터들의 힘으로도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맨몸으로 막아내고 사멸한다든지.

게이트 속에서 지쳐버린 헌터들 앞에 나타나 강력한 권능으로 그들을 치유하고 사라진다든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인류가 자력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 도움을 주고 사라진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화신들이 가문의 이득 따위를 위해 움직인다니….

돌아가는 대로 이세영과 신지현에게 일거리를 좀 줘봐야겠군.

“그런 이들이 있었다니…. 무서운 비밀이 숨어있었군요.”

하지만 지금은 속마음과 별개로 일단 강태백의 장단에 맞춰줘야 할 때였다.

강태백의 말이 끝나자,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무섭지. 나 역시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네.”

-까드득!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듯 머리를 휘휘 내저은 강태백이 다시 앞을 돌아본 순간.

갑자기 옆쪽 수풀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적인가? 마침 잘됐군.”

사납게 웃은 강태백은 양손에 마력을 집중하며, 외골격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시퍼런 화염이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며, 그의 몸에 내려앉아 외골격을 구성했다.

동시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화끈거리는 기운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사람이면 즉시 모습을 드러내고. 몬스터라면 계속 그대로 있어라. 즉시 불살라 줄 테니.”

강태백의 몸에서 광포한 살기가 흩뿌려지자.

수풀 너머에서 느껴졌던 기척이 더욱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과 유사한, 아니 사람보다 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파아아앗!

긴장이 극에 달한 그 순간!

호화찬란하기 짝이 없는 무지갯빛이 주변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사방을 밝게 물들인 빛 속에서 거대한 덩치의 거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악당 발견!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심판하겠다!”

정신공격의 일환일까?

빛 속에서 등장한 거구는 등장과 동시에 손발이 오그라질 듯, 낯부끄러운 대사를 내뱉었다.

대사의 내용은 소녀만화에나 나올법한 상큼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내뱉은 거구의 목소리는 걸걸하기 짝이 없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뭐여?”

거기에 옷차림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 특유의 파란색 갑옷은 엉망으로 찢어진채. 마치 고등학교 여학생의 교복과도 같은 해괴한 형상이 되어 거구의 몸에 늘러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시각테러를 형상화한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얼빠진 표정으로 거구의 모습을 들여다 본 강태백의 입에서 맥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정체를 눈치챈 나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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