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니…. 네놈이 제시할 수 있는 패는 이미 다 검토했을 터.”
강태백의 얼굴에 짓궂은 악동같은 미소가 떠오르자.
그의 미소에 살짝 움찔한 황태용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아니지. 제시할 패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군.”
곧이어 뱀의 그것처럼 가느다랗게 변한 황태용의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강태백의 수를 눈치챈 모양인지, 나를 훑어보는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졌다.
가늘게 휘어진 채로 음험한 빛을 흩뿌리는 황태용의 시선은 정확하게 내 갑옷에 달린 바디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디캠이라. 문명의 발달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니까. 별 쓸데없는 시시콜콜한 것들까지도 기록되곤 하거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조리 바디캠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디캠을 응시하는 황태용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한 것이, 그리 동요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뭐지? 황태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태백과 자신 사이의 ‘비밀’이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굉장히 두려워하지 않았었나?
그랬던 그가 바디캠에 모든 것이 찍혔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거지?
“시시콜콜한 일은 아니지. 여기 찍힌 영상이 세간에 알려지면 대단한 가십거리가 될 거요.”
여전히 악동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강태백은 내게 다가와, 내가 착용중인 갑옷의 어깨 부위에 장착되어있는 바디캠을 분리해 냈다.
그리곤 그는 보란 듯이 분리해 낸 바디캠을 황태용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흐응. 그래. 대단한 가십거리가 되겠지. 우민들은 언제나 저보다 잘나가는 인간들의 추악한 일면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네놈과 나 사이의 추악한 비밀이라면, 아주 잘 타는 장작이 될 게야.”
오만하게 팔짱을 낀 황태용은 두 눈을 사이하게 빛내며 비웃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하지만…. 네놈이 그럴 수 있을까? 먼젓번에도 말했듯. 그간 어둠 속에 묻어둔 비밀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가문의 ‘어르신’들이 움직일 것이야.”
황태용의 입에서 ‘어르신’이란 생소한 단어가 나오자 강태백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 굳었다.
한때 초인들의 정점에 올랐던 그조차 두려움을 느낄 만큼. 그들 사이에 있어서 ‘어르신’이란 것은 엄청난 무게감을 지닌 단어인 듯했다.
어르신이라, 회귀 전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강태백이 저 정도 반응을 정도라면, 조사해둘 필요가 있겠어.
“알잖느냐. 네놈과 나 사이에선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나. 그분들은 다르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우선인 분들이다. 가문의 치부가 드러난다면 너나 나나 무사하진 못하겠지.”
어째선지 ‘어르신’들의 개입을 언급한 황태용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무력감에 젖어있었다.
교활한 뱀처럼 음험한 음모의 빛이 번뜩이던 그의 눈빛에서도 순간적이나마 공포에 집어삼켜진 두려움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 어르신들이 직접 움직인다면. 지금의 태백 길드 따윈 순식간에 세상에서 지워질 거요. 형님과 나의 목숨은 덤일 테고 말이지. 나도 그것을 잘 알기에, 형님께 굳이 ‘협상’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 아니겠소.”
…황태용과 강태백의 신변마저 위협할 정도라고?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지?
전 세대의 강자이긴 하나, 강태백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한 헌터였다.
게다가 황태용과 강태백은 인간을 초월한 헌터들을 거느린 ‘길드장’의 신분이었다.
그런 막강한 무력을 지닌 그들이,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이 내겐 너무도 낯설게만 보였다.
신지현에게 돌아가는 대로 오닉스 길드, 아니 그들의 전신인 오닉스 그룹 자체에 숨겨진 힘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해둬야겠군.
“그래. 그분들이 움직이면 너나 나나 끝장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쓰지도 못할 패를 새로운 카드랍시고 의기양양하게 꺼내 들다니. 네놈도 늙긴 늙었나 보군.”
체념한듯한 목소리로 ‘어르신’이란 존재들의 힘을 인정한 강태백의 반응에 황태용의 얼굴에 걸린 비릿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강태백이 바디캠을 이용해, 가문의 치부를 밝히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그의 눈빛에서 추악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헌데…. 내가 언제 가문의 치부를 퍼뜨리겠다고 했소?”
“…뭐?”
하지만 애석하게도 강태백이 꺼내든 ‘협상’ 카드는 자신에게도 리스크가 큰, 바디캠을 통해 가문의 치부를 폭로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입가에 깃든 냉소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강태백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의기양양한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던 황태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협박이랍시고 그렇게 위험성이 큰 카드를 생각 없이 내뱉겠냔 말이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황태용에게 냉소를 지은 강태백은 내게 다시 바디캠을 돌려주며, 슬쩍 눈짓했다.
“그런 ‘위험한’ 영상보다. 재밌는 영상이 하나 있는데. 한번 보시겠소?”
강태백의 신호를 받은 나는 바디캠을 조작해, 영상을 하나 재생시켰다.
최신 기종의 바디캠 답게 마력 프로젝터 기능이 탑재된 바디캠은 허공에 선명한 화질의 영상을 띄워내기 시작했다.
-뀨잉?
재생된 영상은 조금 전,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황태용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영상에 비친 자신의 추악하게(?) 귀여운 모습에 황태용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뀨우웅! 뀨이잉!
조금 전 나와 강태백의 어처구니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듯.
한 마리 토끼와도 같이 행동하는 영상 속 자신의 모습에 황태용은 커다란 충격을 받아버린 모양이었다.
못 박힌 듯 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벌거벗은 몸 또한 오한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어떻소. 정말이지 흥미롭기 그지없는 영상이 아니오?”
“너, 너어. 어, 어떻게…. 아, 아니 나는 도대체….”
패닉에 빠진 황태용을 바라보는 강태백의 얼굴엔 심술궂은 악동과도 같은 미소가 가득했다.
내게 살짝 손짓해, 영상을 정지시킨 강태백은 황태용에게 굳이 조롱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을 받은 황태용은 얼굴을 완전히 허옇게 물들인 채,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뭐…. 본인이 보기에 그리 유쾌한 모습이 담긴 영상은 아니다만.적절치 못한 불륜관계 같은 게 담겨 있는 영상도 아니고 왜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거지?
“아…. 아으으. 네놈. 네놈이 어찌….”
황태용의 반응은 내가 짐작했던 것 이상이었다.
자시들과 부인 앞에서 갑자기 불륜 영상이 공개된 것과 동급, 아니 그 이상의 경악과 당황이 황태용의 창백한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다리에 힘마저 완전히 풀려버린 모양인지, 그는 곧 무너지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마음에 드시나 보오.”
주저앉아버린 황태용에게 가까이 다가간 강태백은 몸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강태백의 눈은 히죽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서늘한 위압감이 어려있었다.
“가문의 ‘어르신’들이 이러한 추태가 담긴 영상을 보면 어떻게 나오실까…. 내가 알기로 그 사건 이후 형님의 ‘이미지’를 만드느라. 그분들께서 제법 애를 많이 쓴 것으로 알고 있소만.”
“아, 안돼!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아무래도 강태백과 황태용 사이에선 ‘어르신’이란 단어가 어린이들 사이의 부기맨이나 망태 할아범 급의 공포를 유발하는 금구인 듯했다.
서늘하게 웃은 강태백이 ‘어르신’들의 반응을 언급하자, 발작하듯 정신을 차린 황태용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린 표정으로 강태백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강태백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문은 떠났지만. 귀는 아직 열려있지. 듣자니 후계자 문제로 ‘어르신’들의 심기를 단단히 거스른 적이 있었나 본데…. 어떻소? 이정도 가십거리가 퍼진다면, 그분들이 형님을 충분히 형님을 축출할 구실이 되지 않을까 싶소만.”
냉소를 흩뿌리는 강태백의 입에서 뭔지 모를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마다.
황태용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린 수준을 뛰어넘어, 아예 시꺼멓게 죽어갔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던 황태용은 이내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고, 고작 그 정도 영상으로 가, 가십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그렇지! 정신계! 정신계 능력에 피폭당한 영향이라 주장하면 그만이다!”
황태용의 발악은 얼핏 듣기엔 합당해 보였으나.
강태백은 여전히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즉시 반박해버렸다.
“언제나 절대적인 위엄을 유지해야 할 오닉스 길드의 길드장이 고작 정신계 능력에 당했다고…? 형님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분들에겐 형님의 사정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요한 건 형님의 추태가 담긴 영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지.”
정곡을 찔러낸 모양인지, 강태백의 바지춤을 붙잡고 발악하던 황태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지춤을 단단히 붙잡은 황태용의 손아귀에 힘이 빠져나가자, 퍼렇게 풀물이 든 정장 바지를 따라 늙고 주름진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어떠시오? 이제 좀 대화라는 것을 해볼 생각이 들으셨소?”
황태용을 내려보는 강태백의 눈엔 얼어붙을 듯 서늘한 냉기가 서리처럼 어룽거리고 있었다.
입꼬리를 한쪽만 비죽 뒤틀어 올린 그의 입가에선 협상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한겨울의 북풍처럼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그래. 해주마. 그 빌어먹을 협상이라는 것.”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간 목소리가 이럴까, 아니면 혼이 빠져나간 목소리가 이럴까.
몸을 웅크린 황태용의 목소리에선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한 탈력감이 느껴졌다.
그는 분한 듯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턱은 황태용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진작 그리하실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