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뭐냐. 이건 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역병처럼 들끓는 거리를 지나, 반쯤 부서져 내린 계단 위로 올라가자.
비릿한 풀냄새와 함께,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내 입에선 얼빠진 신음이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아무리 뒤틀리고 왜곡된 공간이라지만, 도심 한복판에 초원이라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
계단 위로 펼쳐진 풍경은 회색빛 가득한 도심 특유의 음울함이 멀끔히 거세된 풍경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맑은 하늘에 그림같이 떠 있는 찬란한 태양.
그 아래 펼쳐진, 싱그러운 녹음을 자랑하는 너른 초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지배하는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라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광경이 내 시야를 그득히 메우고 있었다.
-음머어어.
헛웃음을 지으며 초원 위를 걸어 나가자. 어디선가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초원의 풍경에 너무도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울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진짜 뭐지?”
너무도 한가롭고 너무도 평온한 표정의 강태백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한 마리 소처럼 바닥에 엎드린 채로 정체 모를 풀을 한가득 베어 문 그의 두 눈이 제멋대로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딱 봐도 완전히 맛이 가 있는 듯했다.
…생각한 것보단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긴 한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독창적으로 맛이 가 있는 모습으로 만날 줄은 몰랐네.
“음머어어어?”
입안 가득 베어 문 풀을 씹어 삼킨 강태백은 고개를 들고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는 순박한 눈망을을 초롱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화르륵
강태백의 얼굴에 떠오른 너무도 낯선 표정에 소름이 돋은 나는 조용히 양 손에 내력을 주입했다.
염룡등천의 묘리에 따라. 내력이 이글거리는 화염이 되어 내 양 손에서 화르륵 솟구쳤다.
“음머어어어어억!”
*****
“…설명해주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역시나 보통 인물은 아닌 모양인지.
관자놀이에 화염을 얻어맞은 강태백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이성을 되찾았다.
자세를 바로하며, 침착하게 흐트러진 정장을 다듬은 그는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오닉스 길드 본사 인근이 통째로 신형 게이트에 집어 삼켜졌습니다.”
강태백의 질문을 받은 나는 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축약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때마다. 강태백의 미간이 조금씩 조금씩 찌푸려졌다.
“주변을 왜곡시키는 신형 게이트라니…. 그렇지 않아도 갑갑하던 차에. 골치아픈 일에 휩쓸렸군.”
강태백은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개운치 못한 신음을 토해냈다.
그의 말투로 미뤄보건대. 아무래도 협상이 강태백의 뜻대로 진행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잠깐. 혹시 이곳에 널브러져 있던건. 나 뿐이었나?”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인지. 멈칫 움직임을 멈춘 강태백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인기척은커녕. 진록빛 녹음만이 대책없이 우거져 있었다.
“예. 이곳에서 추태…. 크흠. 아니. 이곳에서 제가 발견한 건. 길드장님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 그 빌어먹을 자식과….”
-바스락.
순간. 짙게 우거진 풀숲에서 인기척과 함께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난입한 소리에 강태백은 안색을 딱딱히 굳힌 채, 양 손에 마력을 끌어모았다.
나 역시, 어깨에 비끄러 맨 어둠달을 단단히 틀어쥐곤 혹시나 있을 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뀨웃!”
고조되었던 긴장이 막 폭발하려던 찰나.
풀숲 속에서 해괴하게 귀여운 울음소리와 함께, 벌거벗은 중년인이 튀어나왔다.
마치 한 마리 토끼처럼 힘차게 도약해온 그 끔찍한 흉물은 허공에서 뚝 떨어져, 우리 앞에 떨어져 내렸다.
“끼유웃?”
갑자기 나타난 중년인 역시, 곱게 맛이 가 있는건 아닌 모양이었다.
벌거벗은 몸을 토끼처럼 몸을 움츠린 채, 그는 초식동물과도 같은 순진한 눈망울을 똘망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 45도쯤 되는 각도로 고개를 기울인 중년인의 입에선 중년 남성의 그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귀여운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냐. 해괴한 생명체는.
“…황태용?”
중년인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던 강태백의 입에선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 양반이 오닉스 길드의 길드장 황태용이라고?
강태백이 중얼거린 말에 따라, 중년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니.
추잡한 몰골이긴 하지만 과연, 내가 기억하던 황태용의 모습과 어느정도 비슷하긴 했다.
깐깐하게 빗어넘긴 특유의 올백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엉망으로 흩날리고 있었고.
트레이드 마크처럼 한 가지 색상만을 고집하던 청회색 정장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벌거벗고 있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 뭐야.
“뀨웃 뀨우우우.”
순진한 표정으로 나타난 황태용은 코를 킁킁거리며 강태백의 냄새를 맡더니.
해괴하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강태백이 차려입은 암회색 정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게 자네가 말했던. 게이트의 마력에 노출된 이들의 ‘이상반응’인가보군. 허참. 나도 저런 모습으로 발견되었단 말이지….”
강태백은 그런 황태용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고 있던 정장 상의를 순순히 벗어줬다.
그리 유쾌한 사이가 아닐텐데도, 어째선지 황태용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내가 저 치를 위해 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날이 평생 올까 싶었긴 하네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부탁함세.”
강태백이 못마땅한 듯 떨떠름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을 해오자.
나는 대답 대신 양 손에 다시 한번 내력을 주입했다.
-화르르륵
“뀨웃? …끄아아악!”
염룡등천의 내력이 황태용의 머리를 활활 불태우자.
토끼와 기니피그의 울음소리를 억울하게 뒤섞은 듯한 목소리가 인간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곧이어 초식동물처럼 순진하게 똘망거리던 눈망울이 조금씩 총기를 되찾아갔다.
“흐억! 흐어억! 이, 이건 도대체.”
“정말이지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오. 형님.”
의식을 되찾은 황태용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비명이 튀어나오자.
강태백은 비꼬듯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입꼬리를 고약하게 비틀었다.
강태백의 얼굴에 비웃음이 깃들자, 그것을 바라본 황태용의 얼굴이 단숨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강태백? 그렇군. 역시 네놈이 꾸민 더러운 술책….”
“일전에 말했듯. 제발 먼저 생각이란 걸 하고 주둥이를 놀리시지 그러오. 형님.”
황태용의 입에서 강태백을 향한 욕설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욕설에 피폭당한 강태백은 한심하다는 듯, 황태용의 말을 중간에 툭 끊어버렸다.
황태용의 의심을 일축해버린 강태백의 입가에 깃든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뭐?”
“숙부가 그러지 않았소. 형님은 주변을 둘러보는 안목이 영 꽝이라고. 지금 내 몰골이 어떤지 보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뱉은 거요?”
황태용은 강태백의 가시돋힌 일침에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태백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몰골이라. 글쎄다. 비굴함을 풀풀 풍기는 비루한 행색이 네놈의 평소 모습과 그리 다르지도 않는데 말이다.”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제이긴 하나, 아버지의 피는 이어진 사이일터.
하지만 막말을 주고받는 강태백과 황태용 사이엔 서늘한 냉기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라? 잠깐만. 강태백 쪽이 형 아니었어?
기이한 일이었다.
신지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분명 강태백 쪽이 황태용의 이복 ‘형’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강태백 쪽이 황태용을 꼬박꼬박 형님이라 지칭하고 있었다.
정보가 잘못된건가?
아니야. 신지현이 잘못된 정보를 내게 알려줄 없을텐데….
“비굴하고 비루한건 형님 쪽 아니오? 본인의 추문을 감추기 위해. 천하다고 멸시하던 동생의 이름과 자리를 빼앗은 인간이 누구에게 비굴하다고 입을 놀리는 건지 모르겠소만.”
황태용에게 욕설을 들은 강태백은 피식 웃으며. 냉소를 이어갔다.
강태백의 일침이 황태용의 약점을 제대로 찔러 넣었는지, 황태용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르신들의 결정이었다. 나라고 네놈의 추잡한 신분을 뒤집어 쓰고 싶었는 줄 아느냐!”
…세상에. 강태백은 저런 짓을 당하고도 황태용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건가?
아무래도 강태백과 황태용 사이엔 거의 막장 드라마급의 기막힌 서사가 숨겨져 있는 듯 했다.
그런 기막힌 일을 당하고도 길드의 안위를 위해, 황태용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찾아간 강태백이 새삼 대단해 보일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건은 네놈이 새로운 신분을 얻을 때. 본가에서 이미 충분히 보상을 해주지 않았더냐!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제대로 약점을 찔린 황태용이 잔뜩 흥분한 채로, 계속해서 뭐라 비난을 이어가려니.
서늘하게 피식 웃은 강태백은 슬쩍 손을 들어, 황태용의 말을 중간에 저지했다.
강태백의 손에 시퍼런 마력이 불꽃이 되어 살벌하게 이글거리자, 움찔한 황태용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뭐, 추잡한 과거사는 이만해둡시다. 형님. 남에게 들려주기엔 피차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과거 아니오.”
“남이라고…. 으응?”
강태백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황태용은 그제서야 뒤늦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태용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시퍼렇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너, 너어어…. 서, 설마. 모든 대화를 다 들었.”
“그러게 주변을 둘러보는 안목이 엉망이라니까.”
대단히 당황한 황태용의 입에선 제대된 문장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입을 뻐끔거리는 그의 모습을 흘끗 바라본 강태백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늘 꺼내 와작 씹어 먹었다.
“가, 강태백. 아니 태용아. 이, 이놈이 우리 오닉스 그룹의 비밀을 죄다 들어버렸지 않느냐. 어, 어서 증거를 인멸해 비밀을 감춰야.”
사색이 된 황태용의 눈빛에 조금씩 조금씩 살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몸에서 흉측한 의도를 품은 마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벌거벗은 황태용의 몸 위에 시퍼런 귀기를 내뿜는 갑옷형태의 외골격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허허. 증거를 인멸하겠다고? 확실히. 남의 귀에 들어가봐야. 좋은 일은 아니지. 한번 해보시오.”
사탕을 까득 깨문 강태백은 황태용의 말에 피식 웃으며, 슬쩍 등을 돌려 자리를 비켜줬다.
강태백이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황태용의 일격이 내게 날아들었다.
-끄오오오오!
고막을 찢어발길 듯 섬뜩하게 울려퍼지는 귀곡성!
공기를 가르며 단숨에 내게 날아드는 시퍼런 칼날!
오닉스 길드의 길드장답게 황태용의 일격은 매섭기 짝이없었다.
시퍼런 외골격에서 돋아날 칼날은 슥 훑어보기에도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고.
칼날이 휘둘러 질 때마다. 원혼이 울부짖는 섬뜩한 귀곡성이 저릿하게 내 손발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황태용의 공격은 단지 그뿐이었다. 적당히 매섭고, 적당히 빠른 그런 공격.
-까드드드득!
황태용의 공격이 내 몸을 둘로 찢어 발기려는 그 순간!
어느새 돋아난 황금빛 외골격이 그의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었다.
금속과 금속이 갈리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튄 시뻘건 불똥이 사방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뭐, 뭐엇?!”
회심의 일격이 외골격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자.
황태용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형님 수준으로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여전히 이쪽에서 등을 돌린 채인 강태백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사탕을 하나 더 꺼내들었다.
황태용의 낯빛 만큼이나 새하얀 박하사탕이 그의 주머니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까드득 소리와 함께 강태백의 입안에서 단숨에 산산히 부서졌다.
“갑작스럽게 기습이라…. 마침 잘됐네요. 오닉스 길드를 이끄는 수장은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던 차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