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섬뜩한 미소를 지은 베타라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한번 고위 마족 특유의 질식할 듯한 위압감이 대기를 짓눌러왔다.
“다, 당황하지마! 그래봐야 놈은 혼자다!”
“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다양한 장비를 챙겨왔으니! 걱정마십쇼!”
위압감에 노출된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원들은 이번엔 덜덜 몸을 떨면서도 투지를 불태웠다.
공격대원들을 독려하는 돌격조장의 눈빛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는 이글거리는 시선을 오롯이 베타라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푸흐흐흐. 장난감 따위에 의지하는 꼴이 참으로 볼만 하구나. 그 잘난 장난감이 너희들의 목숨을 어디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
“거 참. 말 진짜 많다니까?”
베타라의 관심이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에게 집중된 사이.
나는 놈의 사각으로 파고 들어가, 어둠달을 벼락처럼 내찔렀다.
-피슛!
베타라는 나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놈이 미처 이해할 틈도 없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또 한 번 날아갔다.
《이런 공격 따윈 이몸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건가?》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하는 베타라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노려보는 놈의 눈빛에 짜증이 깃들었다.
-스슥. 스스슥.
베타라의 시선이 내쪽을 향한 사이. 나는 은밀히 돌격조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헌터들이라면 반드시 숙지하고 있을 수신호를 눈치 챈 돌격조장은 재빨리 내 지시에 따라 다른 공격대원들과 함께 움직였다.
“아니? 그저 멍청한 불멸자 나으리의 주의를 잠깐 돌리기 위한 건데?”
《푸흐흐. 시건방진 필멸자 놈. 그따위 변명 따윌 지껄이다니. 네놈도 어지간히…》
재수없게 히죽히죽 웃으며 베타라의 주의를 끌고 있는 사이.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원들은 내 지시에 따라. 순식간에 ‘그것’의 설치를 끝내 놓았다.
“정말이라니까? …지금입니다!”
돌격조장의 수신호를 감지한 순간.
나는 즉시 그들에게 육성으로 두 번째 지시를 내렸다.
《뭐…?》
베타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내 신호에 따라,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원들이 설치해둔 ‘그것’이 개방되었다.
-콰드드드드득!
베타라의 육신을 휘감은 시커먼 쇠사슬의 향연!
대형 몬스터를 진압하기 위해 고안된 포획용 도구 『구속의 사슬』이 발동되었다.
새하얀 박스에서 뻗어나온 시커먼 쇠사슬들은 삽시간에 베타라의 육신을 꽁꽁 묶어버렸다.
지금 시점에선 흔한 장비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장비가 있다는 말에 혹시나 해서 부탁해 본 건데….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오닉스 길드답게, 다행히 몇 개 쯤은 구비해둔 것 같네.
《시건방진 필멸자 놈들이 감힛! 이따위 장난감으로 이몸을 겁박하려고 들어!》
각종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제작된 『구속의 사슬』은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조차, 장시간 포박할 수 있을만큼 질긴 내구성을 자랑했지만.
고위 마족인 베타라에겐 그저 모기 따이에게 물린 것처럼, 하찮은 미물들의 발악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투두둑!
베타라의 눈이 노릿하게 빛나자.
질기디 질긴 『구속의 사슬』이 썩은 동앗줄처럼 투두둑 끊어졌다.
짜증이 가득 찬 베타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원들에게 향하려던 찰나.
-콰드드드득!
두 번째 『구속의 사슬』이 시간차로 발동되었다.
『구속의 사슬』은 이번엔 두 개의 박스에서 뻗어나와. 벨타라의 육신을 다시 한번 옥죄였다.
《크아아아악! 이 벌레같은 것들이!》
“지, 지시하셨던 대로 여섯 개의 『구속의 사슬』을 배치하긴 했습니다만. 이제 여유분은….”
격노에 찬 고성을 질러대는 벨타라가 두 번째 쇠사슬을 뿌드득 끊어내자.
내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온 돌격조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충분히 시간을 벌었어요. 그보다 또 도와주실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돌격조장을 안심시킨 나는 그의 귓가에 모종의 부탁을 속삭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 귓속말을 듣던 그의 얼굴에 점점 경악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저, 정수를 전부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전부는 아니어도 됩니다. 여유되시는 것만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요구에 곤란한 표정으로 장비가 들어있는 배낭을 응시하던 돌격조장은 눈을 질끈 감더니,
다른 공격대원들을 시켜 내게 몬스터들의 정수를 한아름 들려줬다.
《끄아아아! 이 벌레 같은 놈들! 다 짓이겨 주마!》
딱 그 타이밍에 맞춰, 세 번째 구속을 풀어낸 베타라가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렀다.
동시에 하늘이 어둑어둑한 암녹색으롤 물들더니, 너울거리는 부패의 장막이 하늘에서부터 너풀너풀 내려오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사, 산군님? 그 그걸 도대체 왜….”
돌격조장이 건네준 정수들을 으득 깨물자.
비릿한 향과 역겨운 맛이 느껴지며, 정수 내부의 마력이 내 몸 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몸이 폭발할 것 같은 느낌에, 비릿하게 웃은 나는 서서히 깔맞춤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래. 2회전을 시작해 보자고!”
*****
-부와아아악!
내 몸에서 뻗어나간 난폭한 내력이 부패의 장막을 찢어발겼다.
정제하지 않은 몬스터의 정수에서 뿜어진 마력이 폭풍처럼 내 몸 속에서 날뛰었다.
검은 심장이 쉴새 없이 거세게 펄떡이며 폭풍치는 마력을 내력으로 바꿔 사방으로 흩뿌렸다.
《크으윽! 이 열등한 필멸자 놈이!》
내 주변을 폭풍처럼 휘감은 마력에 침음성을 삼킨 베타라는 크게 발을 들어 바닥을 쿵 내려찍었다.
-꾸과과광!
어마어마한 거력에 대지 전체가 뒤흔들렸다.
숫제 이 세상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대지 처절하게 유린했다.
-푸슈슈슛!
쩌저적 갈라진 대지에서 암녹색 기운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지독한 독기와 사악한 마력이 주변을 뒤덮으며 죽음을 흩뿌렸다.
그 멸망적인 광경을 등에업은 베타라는 두 눈에서 녹색 빛을 이글거리며 포효를 내질렀다.
《썩어들어 죽어라! 이 벌레 같은 필멸자 놈들!》
고위 마족의 마력이 담긴 포효였다.
압도적인 위엄이 담긴 포효와 말세적인 풍경에 팬텀 사파이어 공격대원들의 안색이 대번에 새하얗게 변했다.
“도, 독기 정화키트! 산군님 말씀대로 『독기 정화키트』를 설치해!”
돌격조장은 내가 지시했던 대로, 배낭에서 허둥지둥 『독기 정화키트』를 주변에 설치했다.
새하얀 필터가 천둥같은 소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이를 으드득 깨물곤 외골격을 끌어올렸다.
-파치지지직!
《푸흐흐흐! 그 따위 장난감으로 이 몸의 권능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야. 잠깐이면 그만이거든.”
《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베타라가 오만하게 웃는 사이.
나는 몸속에 들끓는 어마어마한 내력의 폭풍을 그대로 외골격에 거침없이 집어넣었다.
-쩌적! 쩌저저적!
시커멓게 물든 외골격이 과부하를 이기지 못해 쩍쩍 갈라졌다.
외골격의 갈라진 틈을 타고 하얗게 백열된 화염이 계속해서 솟구쳤다.
“…빵!”
-꽈르르릉!
과부화된 외골격이 산산 조각나며 내력과 화염의 폭풍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집어삼킨 십여개의 정수에서 비롯된 마력이 베타라의 육신으로 파고들자.
단단한 갑각이 순식간에 설탕으로 만들어진 양, 사르륵 녹아 들어갔다.
《이 정도는 금방 재생…. 건방 떨…》
고위 마족 특유의 재생력을 맹신한 베타라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려는 순간!
이번엔 창날의 폭풍이 그의 몸을 갈갈이 찢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잘 알지. 너희들 재생력이 뛰어나다는거.”
-콰직! 콰지직! 콰직!
필멸의 인지력을 초월한 세상에서 나는 미친 듯이 어둠달을 휘둘렀다.
일 초를 수억번으로 쪼갠 듯한 찰나의 찰나 속에서 나는 베타라의 육신을 수억번 꿰뚫고 조각냈다.
“찾았다….”
베타라의 육신이 흐물흐물해지며 다시 재생을 반복하기 수 백회.
나는 마침내 놈의 육신에서 목표로 했던 ‘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암녹색 구슬처럼 반짝이는 그것은 놈의 갑각 깊숙한 곳에서 암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 무슨! 필멸자 놈이 어떻게!》
-빠지지직!
정확하게 내찌른 창날이 베타라의 ‘핵’에 틀어박혔다.
창날이 암녹색 구슬을 찌른 그 순간, 주입된 내력이 타오르며 베타라의 핵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그거 알아? 꼭 ‘필멸자’ 운운하면서 젠척하는 놈들이 가장 먼저 뒈진다는 거.”
핵을 잃어버린 베타라의 입에서 암녹색 액체가 왈칵 뿜어졌다.
불신과 두려움에 찬 놈의 시선을 즐기듯 바라보며. 나는 서민혁을 닮은 놈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콰직!
베타라의 얼굴에 내력이 깃든 단단한 주먹이 아낌없이 파고들었다.
짓이겨진 입에서 싯누런 이빨이 팝콘처럼 후두둑 튀어나갔다.
“핵이 깨져도 당분간은 살아있지 아마?”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들거리는 베타라를 느긋이 바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놈을 바라보는 내 몸 위로, 시커먼 내력이 아지랑이처럼 불길하게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