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미궁.
게이트의 힘으로 왜곡된 현실은 마치 복잡한 미궁을 연상시켰다.
각종 왜곡된 환상으로 인해, 길은 복잡하게 꼬여져 있었고….
《키르르륵!》
신화 속의 미궁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요소인 몬스터들도 눈에 띄었다.
곤충의 가장 강력한 부위만을 기워 붙인 듯한 몬스터들은 왜곡된 미궁 속을 정처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콰득!
“…역시나 이번에도 기록에 없는 타입의 몬스터로군요. 보아하니, 다행히 놈에게 당한 희생자는 없는 듯합니다.”
시커먼 어둠이 일렁거리는 어둠달이 곤충형 몬스터의 머리를 박살 내자.
놈의 시신을 꼼꼼히 조사해본 오닉스 길드의 공격대원, 김정현의 얼굴에 안심한 표정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미궁이 되어버린 거리를 꽤 오랫동안 거닐며, 수많은 몬스터들을 해치웠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 인간을 포식한 개체는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의 왜곡된 환각은 인간뿐만 아니라, 내부의 몬스터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법이니라. 게이트에서 떠밀려 나온 몬스터 놈들 역시, 어지간히 강한 개체가 아니고서야. 왜곡된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겠지.]
‘하긴, 어쩐지 유난히 무력하게 당해준다 싶긴 했어요.’
지형지물에 몸을 은밀하게 숨긴 채, 빈틈을 노려 벼락같이 급소를 꿰뚫어 버리긴 했지만.
그동안 이곳에서 상대해왔던 곤충형 몬스터들은 괴이쩍게 느껴질 만큼 무력하기만 했다.
어쩐지 심심하다. 싶었더니. 그런 놈들 역시 조금 전의 김정현과 똑같은 상태였던 건가?
“악취가 옅어졌군요. 이쪽입니다. 이쪽에서 저희 공격대원들의 냄새가 느껴집니다. 제법…. 가깝군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냄새를 맡던 김정현은 코를 킁킁거리며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헌터 세계에서도 제법 희귀한 축에 드는 ‘길잡이’ 계열의 특성을 선택한 헌터답게, 그는 냄새를 이용해 미궁의 형태로 왜곡되어 버린 거리에서 동료들에게 향하는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듯 했다.
“이번엔 확실한 겁니까?”
유난히 확신에 찬 김정현에게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까지 그가 ‘동료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라고 나를 안내할 때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찢어진 옷조각이나,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배설물의 흔적들 뿐이었으니까….
“…확실합니다. 이번엔 단순히 체취의 흔적이 아니라. 몸에서 풍기는 냄새입니다.”
내 표정이 불신에 찬 것을 본 김정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마치 한 마리 사냥개처럼 네 발로 엎드리더니, 계속해서 냄새를 맡으며, 빠르게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개도 아니고. 거 참. 신기한 재주로고]
위철용은 김정현이 지닌 재주가 퍽 흥미로운지.
느긋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내 어깨 위에서 김정현의 행동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째선지 그의 태도는 지금까지의 일어났던 각종 돌발 상황을 접했을 때완 다르게, 묘하게 여유로운 감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묘하게 느긋하신 것 같은데요. 지금이 여유부릴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곳은 철저히 필멸자들이 정신을 뒤틀어 왜곡시키는 것에 특화된 곳이니라. 시간 또한 현실과는 달리 느리게 흐르는 만큼. 이곳처럼 느긋이 정신이 왜곡된 이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도 드물거든.]
심술궂은 표정을 지은 위철용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기대되지 않느냐? 그 고고한 강태백이 어떤 몰골로 변해 있을지….]
순간적으로 망가진 강태백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엄을 지키던 이가 망가진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럽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동맹을 맺으러 온 상대 앞에서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 것은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쳇. 재미없기는. 이눔아 그렇게 급하면, 조금 더 노오력해서, 조금 더 서둘러서 그 잘난 강태백을 찾아가보든지!]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고, 현재 상황을 진지하게 지적하자.
살짝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위철용은 조금 토라진 모습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알잖습니까. 저 역시 서두르고 싶지만. 문제가….’
“이런. 또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군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더 속도를 올리고 싶었지만, 문제는 이곳을 배회하고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특성트리로 강화된 김정현의 후각은 일반적인 사냥개보다 수배는 뛰어나긴 했으나.
그만큼 몬스터들이 풍기는 역한 냄새엔 일반인보다 더 큰 방해를 받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물러난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후우. 이런 상황에선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해야죠. 금방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나는 어둠달을 꽈악 움켜쥐곤 김정현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떡하니 버티고서 시야를 가린 큼지막한 바위를 지나치자, 어째선지 조금 전까지 내가 죽치고 앉아있던 카페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흐음. 흐으음.》
…확실히 놈들도 정신이 좀 헤까닥하긴 했나보네.
곤충형 몬스터는 굉장히 우아해 보이는 포즈로 카페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텅 비어버린 커피잔을 섬세하게 기울이는 놈의 모습에서 어째선지 중세 귀족 특유의 고풍스럽게 절도있는 테이블 매너가 느껴졌다.
[푸흡!]
눈앞에 펼쳐진 초현실적인 모습에 빵 터져버린 위철용은 바닥, 아니 내 어깨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끅끅거리며 요란스레 웃어대는 그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시끄럽게 간질였다.
“정말 빌어먹을 곳이라니까.”
-콰드득!
《흐오옷!》
쓴웃음을 지은 나는 어둠달을 휘둘러, 곤충형 몬스터의 머리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어둠이 일렁거리는 창날에 머리가 잘려나간 놈은 최후의 순간까지 우아한 포즈를 유지했다.
“…해결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빨리 해결하시다니! 역시 태백의 산군님은 강하시군요. 저희 대원들도 그렇게 애를 먹었던 놈들이라던데.”
곤충형 몬스터를 처리하고 돌아오자.
새삼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김정현이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유난히 호들갑을 떨며, 눈망울을 빛내는 그의 모습에서 어쩐지 최상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벌거벗은 몸으로 호탕하게 웃던 망측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어쩐지 더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냄새는 어떻습니까?”
“깔끔하게 불태워주신 덕분인지, 금방 다시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킁! 킁! 이쪽이군요!”
김정현은 활기찬 표정으로 다시 바닥에 바짝 몸을 붙였다.
신이 난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뛰어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째. 이번 생엔 이상한 괴인들만 꼬이는 느낌인데.
******
“피 냄새…?”
발걸음을 뚝 멈춘 김정현이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황급히 고개를 든 그는 정신없이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변의 냄새를 맡아대기 시작했다.
“화, 확실합니다! 피 냄새! 그것도 사람의 피 냄새에요!”
…아니. 별 문제는 없을거라며?
김정현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미간이 절로 확 찡그려졌다.
나 역시 다급한 감정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딥니까!”
“…저, 저쪽입니다! 저기 저 벽 뒤에서!”
김정현의 손끝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제법 두꺼워 보이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까드득!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주먹을 까드득 말아 쥔 나는 지체할 사이 없이, 벽을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벽이 박살났다. 폭죽터지듯 터져버린 벽의 잔해를 뛰어 넘자.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벽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야?”
넓은 동공엔 축 늘어진 사람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에 잠겨 있었다.
몸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으로 봐선, 다들 목숨은 붙어있는 것 같았지만….
“알?”
사람들 옆엔 어린아이 상반신만 한 새하얀 알이 불규칙적으로 널브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