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그러니까. 박정욱 산군의 몸에 이중환의 넋이 섞여 들어갔다. 이 말인 건가?”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이 정신을 차렸다는 보고를 들은 강태백은 홀몸으로 신지현의 사무실까지 한달음에 찾아왔다.
내게서 박정욱의 기이한 상태에 대해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안색을 찌푸렸다.
“태백이 자네 왔는가! 크윽! 아, 아니지. 오셨습니까. 길드장님.”
“…한쪽 눈썹을 절묘한 각도로 찌푸린 특유의 표정에 묘하게 방정맞은 목소리…. 확실히 이중환의 그것과 닮아있긴 하군.”
박정욱의 입에서 튀어나온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눈살을 찌푸린 강태백은 허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긴 하나. 지금으로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강태백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진중해졌다.
깍지를 낀 손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격렬한 증오와 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읽어보게. 길드 최고 위원회에서 내게 보내온 서류일세.”
『길드장 자격심사 재심의』
이를 부드득 간 강태백이 건네준 서류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태백 길드를 운영하는 ‘높으신 분’들이 작성한 서류의 내용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어려운 법률용어로 가득 찬 내용을 대강 축약해보자면, ‘길드 관리를 소홀히 하여, 막대한 희생을 불러온 길드장 강태백의 자격을 재심의할 것을 촉구한다.’ 였다.
말이 좋아서 길드장의 자격을 다시 심사한다고 표현했을 뿐.
사실상 강태백을 길드장이 자리에서 내쫓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째 조용하다 싶더니. 이렇게나 대담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거기에 차기 길드장으로 박양환을 지목했다는군.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지 뭔가.”
대놓고 강태백을 축출하겠다는 내용에 내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강태백은 살기를 듬뿍 담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엔 강력한 굴욕감과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태백 길드의 절대적인 권한은 우선 길드장님께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이따위 종이뭉치를 내밀어 봐야. 길드장님께 유의미하게 대항하진 못할 텐데요?”
지금은 많이 변해버렸다곤 하나, 태생적으로 태백 길드는 강태백 개인의 강력한 무력으로 조직된 길드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다른 고위 간부들에게 이런저런 권한이 있다곤 하나. 근본적으로 태백 길드에서 권력의 핵심은 오롯이 강태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최고 위원회니 뭐니 하는 이들이 아무리 이런 식의 서류를 보내봐야. 강태백의 권위를 침범할 순 없는 노릇일 텐데….
“아닐세. 어떻게 된 일인지. 다른 산군이란 놈들까지 전부 그쪽에 붙어버렸어.”
“…정말입니까?”
강태백의 입에선 계속해서 충격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산하 조직까지 전부 들고 일어나버린 상황일세.”
상황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길드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오던 최고 위원회와 다른 산군들뿐만 아니라.
공방조합, 제약회사, 금융회사, 유통업체 등등 태백과 제휴한 다른 산하의 조직들까지 전부 다 강태백에게 반기를 들어버린 상황이었다.
“산군들이야 그렇다 쳐도. 산하 조직들까지 전부 들고 일어났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렇답니까?”
“신 팀장이 지금 그들의 행적을 분석하여 그들이 이렇게 갑작스레, 들고 일어난 원인을 찾고 있네만…. 아직 이렇다 할 것을 알아내진 못했다네.”
빌어먹을. 생각한 것 이상으로 깊숙하게 침투해있었나 본데….
산하 조직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조차 금시초문이었다.
마족 놈들이 자취를 감춘 이래, 이세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태백 길드의 동향을 염탐해왔지만. 그동안 딱히 특이한 움직임을 보였던 세력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끄응…. 길드장님 말씀대로라면,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겠는데요.”
“그래. 아무래도 그 간악한 마족 놈들이 본격적으로 일에 나설 모양이야.”
으르렁거리던 강태백은 품속에서 막대 사탕을 하나 꺼내, 신경질적으로 와작 깨물었다.
그동안 그가 애용하던 시가 특유의 알싸한 마력향 대신, 달달한 합성감미료의 향취가 코를 간질였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당장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을 찾아가. 결딴을 내줬겠지만…. 지금은 감정 따위에 휘둘려 어리석은 선택을 내릴 때가 아니겠지.”
한숨을 내쉰 강태백은 마치 담뱃재를 털 듯, 반쯤 부서진 사탕을 툭툭 책상에 털었다.
그의 심란한 속내를 대변하듯, 병실의 새하얀 바닥 위로, 오랜지 빛 사탕 조각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내 자리를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네. 어떻게 이룩한 자리인데 그 간악한 마족놈들에게 얌전히 내주겠나.”
“하지만….”
“알고 있네. 그렇잖아도 이 빌어먹은 길드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긴 했지. 우리 태백 산하의 공방 길드, 대주주 영감들이 심심하면 나를 압박해왔으니 말일세.”
…그랬지.
회귀 전, 대 침식 이후 혼란기에야 강태백이 온전히 자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강태백 역시, 일개 회사의 대주주에 불과한 몸이었다.
물론, 일개 대주주치곤 상당히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과 권력을 나누고 있으니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오닉스 길드장에게 협력을 요청할 생각일세.”
어색한 침묵 뒤.
사탕 조각을 신경질적으로 흩뿌린 강태백이 자신의 계획을 내게 털어놓았다.
“오, 오닉스 길드에게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