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해요?”
강다희에게서 쪽지를 건네받은 신지현의 낯빛이 대번에 새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뭘 어느 정도 적어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악 공격대원들을 되돌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투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신지현에게도 제법 부담이 가는 금액이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아뇨? 영혼석 한 개당 재료가 이 정도씩 들어갈 예정이니. 10배는 더 준비하셔야죠. 아! 청금석 비룡의 송곳니는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예요. 걔들 머리 두 개씩인 거 깜빡했네.”
하지만 정작 그 쪽지를 건넨 주인공, 강다희는 신지현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든 말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손에 쥔 분필로 한차례 벅벅 푸석한 곱슬머리를 긁은 그녀는 경악한 표정의 신지현에게 추가적으로 재료를 주문했다.
“세, 세상에…. 기, 길드장님께 우선 발출 허가를 받아야겠네요.”
추가적인 요구에 얼굴이 허연색을 넘어 시퍼렇게 변해버린 신지현은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든 채, 비틀거리며 자신의 개인실로 들어갔다.
쾅 닫힌 개인실 문 내부에서 신지현의 히스테릭한 고함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팀장님! 술은 금지라고 했죠!”
-꾸과과광!
곧이어 개인실 내부에서 술병이 열릴 때 특유의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자.
용케 그 소리를 포착한 김혜옥이 눈에서 붉은 안광을 흘리며, 굳게 닫힌 개인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놔요! X발! 안 마시게 생겼어?! 횡령할 거면 좀 그럴듯한 이유를 대라면서 비웃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술은 안 마시기로 약속했죠! 노 모어 드링크 플리즈 킥!
개인실 문 안쪽에서 계속해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투닥거리는 소리에 한숨을 내쉰 나는 신지현이 흘리고 간 쪽지를 집어 들었다.
귀퉁이가 꾸깃 구겨진 쪽지 속엔 희귀하기 짝이 없는 고급 재료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거 열 배라면, 어지간한 메이저 공격대 일 년 운영비와 맞먹겠는데?
“흐응…. 헌터 업계의 정점에 선 길드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 이 정도 재료를 한 번에 공수할 순 없나 봐요?”
값비싼 재료들이 주르륵 적혀 있는 쪽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사무실 바닥에 분필로 괴이한 마법진을 그리던 강다희가 신지현의 개인실 쪽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팀장님? 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웨이크업 플리즈 펀치!
-…끄르륵.
개인실 내부에선 계속해서 심상치 않은 다툼 소리와 함께, 에메랄드빛이 번쩍였다.
그 모습이 퍽 우습게 느껴지는 모양인지, 분필로 관자놀이 인근을 벅벅 긁은 강다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한번 시도할 분량만 말해드릴 걸 그랬나.”
“…무슨 뜻이지?
“먼젓번에 말해드렸듯, 놈들이 워낙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했기에, 저로서도 한 번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순간적으로 히죽 웃던 강다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바닥에 안치된 영혼석을 바라본 그녀는 이를 으득 깨물었다.
영혼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뼈에 사무친 듯, 지독한 원한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재료만 도착한다면야. 의식 준비는 이제 끝났지만…. 정말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냐니. 뭘 말하는 거지?”
“신지현 팀장에게 하셨던 말 있잖아요. 이분들을 이용해. 그 배교자 놈들에게 지옥을 열어줄 거라고.”
아무래도 강다희는 의식을 준비하며, 내가 신지현과 나눴던 대화를 용케 엿들은 모양이었다.
분필을 툭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는 모종의 기대를 담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강다희의 눈빛에선 지독한 원한과 묘한 열망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연하지. 그들 역시 그것을 바랄 테니까.”
위철용이 늘상 입에 달고 사는 그 ‘인과율’이라는 존재의 농간인지. 아니면 그들의 운명이 원래 그렇게 기구한 탓인지.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은 회귀 전 세상에서도, 회귀 후의 세상에서도 지독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동안 그들이 겪은 수난을 머릿속에 떠올린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강다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다면. 의식에 사용할 재료가 도착하는 대로. 바로 정화의식을 시작할게요.”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꽈악 깨문 강다희는 무릎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내를 풍기는 운동 기구들이 가득했던 사무실 바닥엔 강다희의 손에 의해, 어느새 복잡한 마법진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콰앙!
타이밍 한번.
그렇게 강다희의 손에 마법진이 완성된 순간.
개인실에서 실랑이를 펼치던 김혜옥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싸부님!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길드 본사에서 지금 즉시 보내주겠대요!”
어째선지 축 늘어진 신지현을 어깨에 들쳐멘 김혜옥은 문을 박차고 나와, 그녀 특유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의식에 필요한 재료들이 준비됐음을 알려왔다.
*****
-음다사다하디. 그눗슈. 베르알르.
후끈한 열기와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던 사무실은 이제 완전히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사무실 바닥 전체를 뒤덮은 마법진엔 몬스터들의 뼈와 살점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규칙적으로 풍겨대고 있었고.
마법진 정 중앙에 앉아, 눈을 까뒤집은 채로 기묘한 주문을 끊임없이 읊어대는 강다희의 모습은 그리 보기 유쾌한 장면이 아니었다.
[…정말 이 방법밖엔 없었던 게냐?]
“그치만. 강다희만큼 사교도 술법에 해박한 이가 없지 않습니까.”
사무실 중앙에 펼쳐진 사교도 의식에 한숨을 내쉰 위철용은 불만과 생리적인 불쾌함이 그득히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역겨운 파리 자식이 본존과 친하게 지내겠답시고 그…. 망측한 것들을 보내왔을 때와 맞먹을 만큼 구역질 나는 모습이로구나]
아무리 설악 공격대원들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위철용 입장에선 그토록 혐오하는 사교도들의 의식을 라이브로 직관한다는 것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어째 어르신이 유독 사교도 성좌들 중에서도 쇠락한 고성의 파리군주를 싫어한다. 싶었더니. 뭔가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셨나 보네.
그나저나, 도대체 그 타락한 성좌양반이 뭘 보내왔길래. 저렇게까지 싫어하시는 거야?
[알 것 없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만큼 불쾌한 경험이었으니라.]
“예? 저는 아직 아무것도….”
[네놈의 표정에 다 써있지 않으냐! 아서라! 본존이 그 빌어먹을 파리놈에게 선물이랍시고 짐승의 배설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나 떠벌릴 것 같더냐!]
…방금 본인 입으로 떠벌리신 것 같은데.
쇠락한 고성의 파리 군주에게 ‘선물’을 받았던 과거가 위철용에겐 그리도 수치스럽게 느껴지는지.
위철용은 머릿속에 떠오른 불쾌한 기억을 잊기 위해,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번-쩍!
위철용과 만담을 나누고 있던 그 순간!
사무실 전체를 가득 채운 마법진이 눈이 멀어버릴 듯한 광채와 함께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