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콰콰쾅!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별안간 사방에서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삽시간에 고요에 잠겼던 공장 건물 전체가 시뻘건 화마에 휘감겼다.
살갗을 얼얼하게 달구는 열기가 서늘한 건물 내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쥐새끼 같은 마족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라!”
곧이어 요란한 함성 소리와 함께, 외부에서 수많은 이들의 버글버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이쪽입니다! 이쪽에서 전투의 흔적이…!”
곧이어 로비의 벽 한쪽이 무너지며, 검정 갑옷을 차려입은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무래도 본사 쪽을 정리한 강태백이 지원부대를 이끌고 뒤늦게나마 들이닥친 모양이었는지.
나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 헌터의 갑옷엔 강태백의 친위대원 고유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서, 설용호 산군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솔직히 지금의 난, 나를 바라보는 친위대원의 표정만큼이나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김준영과의 기 싸움에서 승리해, 박정욱의 영혼석을 얻어내는 것까진 좋았지만.
설마하니 이들이 이런 타이밍에 난입해올 줄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긴. 자네를 도와 그 김준영인가 뭔가 하는 쥐새끼를 잡으러 온 게 아니겠나.”
“…길드장님?”
내게서 질문을 받은 친위대원이 막 내 답변을 하려던 찰나.
검은 갑옷의 무리를 뚫고 강태백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예 작정하고 온 모양인지, 그는 현역 시절에 입었던 장비들을 착실히 차려입은 상태였다.
-철그럭.
강태백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보석들이 불빛을 반사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흩뿌렸다.
살기를 가득 담아, 사납게 이를 드러낸 그의 표정엔 이중환의 목숨값을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헌데…. 보아하니. 이미 한바탕 한 것 같군. 늦어서 미안하네. 자네 혼자 고생이 많았어.”
주변을 훑어보던 강태백의 눈길이 내게 닿은 순간.
살기를 가득 담아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내 처참한 행색이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그는 내게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를 표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길드장님께선 다른 산군들과 담판부터 짓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태백 본사 건물이 또다시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다른 산군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격노한 강태백은 이곳 오행 길드의 포션 제조 공장을 공격하기에 앞서, 잠적한 산군들과 담판을 짓고 오겠노라 으르렁거렸지만….
“….”
내 질문에 대답 대신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답변하는 강태백의 모습으로 보아하니, 다른 산군들은 이번에도 그의 연락에 침묵을 지킨 모양이었다.
뭐지? 태백의 산군이라는 것들이 이제 대놓고 길드와 척을 지겠다는 건가?
“길드를 운영하느라, 잠시 현장에서 멀어진 사이. 내 권위도 땅에 추락해버린 모양일세.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그들에게 이 강태백이 어떤 놈인지 다시금 각인시켜줄 생각이야.”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강태백은 살기를 듬뿍 베어문 표정으로 으스스하게 이를 드러냈다.
사납고 광포한 웃음을 지은 그의 전신에선 압도적인 강자의 위압감이 너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잡설은 이쯤 하도록 하고,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게. 자네 정도 되는 강자가 이렇게 처절한 행색을 하고 있다는 건. 이곳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증거이지 않겠나.”
정점에 이른 헌터답게, 강태백은 순식간에 자신의 들끓는 마음을 다스렸다.
분노와 울분이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북극의 빙하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중한 눈빛으로 주변 전투의 흔적을 훑어본 그는 내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다시금 물어왔다.
“그게 말입니다….”
나는 강태백에게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정지된 시간 속에서 김준영과 나눴던 대화는 쏙 빼놓은 채로, 그전까지의 전투와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가 맞이한 운명에 대해 최대한 간략히 털어놓았다.
“빌어먹을! 그 쥐새끼 같은 산군 놈들에게 시간만 허비하지 않았어도!”
-치지직!
김준영을 간발의 차로 놓쳤다는 말에 격분해서일까?
차갑게 가라앉았던 강태백의 눈빛에서 분노가 다시 격렬하게 들끓어 올랐다.
그가 홧김에 후려친 콘크리트제 벽이 그의 주먹 모양으로 타들어 가며, 구멍이 뻥 뚫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침착했다면….”
“아닐세.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물론, 다소 급하게 서두르긴 한 것도 사실이네만. 그래도 이들의 영혼을 구하지 않았는가.”
강태백은 내게서 박정욱과 설악공격대원들의 영혼이 보관된 영혼석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잠시 음산한 보랏빛을 발하는 영혼석을 가만히 내려다본 그는 아랫입술을 우득 깨물었다.
“그래서. 이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있는 건가?”
사교도들의 의식에 따라, 설악 공격대원들의 영혼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준영에게 『사상개조』와 『영혼 비틀기』를 당했던 박정욱은 스스로를 김준영이라 생각할 정도로 영혼이 심각하게 뒤틀려버린 상황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그들 영혼이 심상치 않은 상태라는 것을 직감한 강태백의 눈빛엔 걱정스러운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다행히 이쪽엔 ‘전문가’가 한 명 있어서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김준영의 말과 강태백의 걱정대로 설악 공격대원들의 오염된 영혼을 되돌리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사교도 의식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능숙한 인물을 한 명 알고 있었다.
“허어…. 박정욱 그 친구를 제외한 다른 산군 놈들은 자신의 이득을 탐하는데 바빴는데. 자네는 산군으로 등극한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세우고 있었군.”
내 입에서 흘러나온 ‘전문가’라는 말에 강태백 또한 내 생각과 같은 인물을 떠올린 모양인지.
그는 진심 어린 경의와 기특하다는 마음이 깃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순순히 요구에 응해줄지는 난 잘 모르겠네만. 골방에서 썩어가던 이 늙은이보다야. 자네가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부탁하네.”
고개를 주억거린 강태백은 손에 쥔 영혼석을 조심스레 내게 다시 건네주었다.
[…이게 다 무어냐. 이 훈훈한 분위기는?]
강태백과 내가 훈훈한 미소를 교환하고 있으려는 사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뒤늦게 풀려난 위철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신 차리셨습니까. 어르신? 김준영 그놈이 마족들처럼 시간을 정지하는 능력을 지녔더라구요.’
[뭐?! 네놈이 말했던 낙오자들의 권능을 그 가증스러운 사교도 놈이 이용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지금은 잠시 실례 좀 할게요.’
보는 눈이 많기에, 지금으로선 위철용과 한가하게 만담을 나눌만 한 상황이 아니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며, 설명을 요구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태백에게 그가 바라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녀 또한 놈의 파멸을 바라는 만큼, 이쪽의 요구는 어지간해선 다 들어줄 겁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내가 언급한 ‘전문가’는 당연히, 체체파리 클랜의 전 교주 ‘강다희’를 뜻하는 것이었다.
지녔던 힘과 권능을 모조리 상실해버린 상태이긴 하나, 그녀의 머릿속엔 사교도 교주로 군림하며 쌓아온 수많은 지식들이 온전히 쌓여있었기에. 강다희는 굉장히 쓸모가 많았다.
게다가 김준영과 마족이라는 공공의 적을 지녀서 그런지. 그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협조적이었다.
-까드득.
순간, 김준영의 뺀질뺀질한 얼굴을 떠올린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뭐? 이들이 쓰다 버린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딱 기다려라. 그 ‘장난감’ 들에게 네놈의 최후를 맡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