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흐어어어….》
움직임을 멈춘 김준영의 육신은 점점 회백색으로 물들어 갔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조각상과 비슷한 꼴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창백한 대리석처럼 변해버린 김준영의 입에선 허망한 귀곡성이 공허하게 흘러나왔다.
-푸스스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김준영의 육신을 스치고 지나가자.
금이 간 몸뚱이가 마치 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바람에 서서히 흩어져갔다.
여덟 개의 팔을 벼락처럼 휘두르던 강인한 몸뚱어리가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경악한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으하하핫! 보았느냐!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기억을 잃어버린 시련 속에서도! 본존의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느니라!]
김준영을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활약을 했던 위철용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모처럼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손맛(?)을 제대로 맛본 탓인지.
나를 바라보는 위철용의 비췻빛 얼굴은 잘 달궈진 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
하지만 위철용과는 달리, 김준영의 시신을 내려보는 내 심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의심과 의혹이 뒤얽힌 상념의 덩굴이 머릿속을 스멀스멀 장악해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놈이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할 리가 없는데.
분명, 김준영이 보여준 권능은 회귀 전의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강력했다.
위철용을 외골격에 빙의시킨다는 기지를 짜내, 놈을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김준영은 그간 보여줬던 권능이 너무도 허무하게 보일 정도로 허무한 최후를 맞이해버렸다.
[애송이? 본존의 실력이 네놈 생각보다 별로였느냐? 왜 그리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야!]
자신의 활약에 맞장구쳐주지 않는 것에 섭섭한 감정을 느낀 것일까?
김준영의 시신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으려니.
잔뜩 흥분한 위철용의 달아오른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마디를 우둑 꺾으며, 거친 콧바람을 내뿜는 모습이 어째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 아뇨. 어르신. 제가 어르신의 실력을 의심할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그렇게 내가 막 위철용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그 순간!
갑자기 성을 내던 위철용의 몸이 그 표정 그대로 뚝 멈춰 버렸다.
바람에 흔들거리며 껌뻑껌뻑 빛을 토해내던 조명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쁘게 흘러가던 세계의 시간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강제로 정지되었다.
이 현상은 분명히….
《이런, 이런 모처럼 공들여 만든 ‘작품’이었는데…. 아깝게 되어버렸군요.》
정지된 세상 속에서, 느물느물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오래되어 풍화된 조각상처럼 무너져 내린 김준영의 육신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꾸르륵!
거품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무너진 김준영의 육신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괴물로 변이했던 그의 얼굴이 뺀질뺀질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여덟 개의 팔을 휘두르던 근육질 몸이 멀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인간의 형태로 쪼그라들었다.
《호오?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신데요? 설마. 이 육신이 제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까? 재미없게시리.》
“연기가 어설펐어. 필멸의 굴레를 벗어났다고 자만하던 놈이 고작 그 정도 일격에 맥없이 쓰러질 리가 없었을 텐데 말이지.”
김준영은 먼젓번에 상대한 마족들처럼 시간을 멈추는 권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 내가 동요하지 않는 것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살짝 허세를 담아, 그리고 비웃음을 담아 입꼬리를 고약하게 비틀었다.
…젠장. 다른 마족 놈들처럼 시간까지 멈추는 짓을 할 수 있다니.
말은 강하게 나왔지만, 김준영을 바라보는 내 등 뒤엔 축축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검은 심장의 권능으로 그동안 마력을 충분히 흡수한 덕에 체력은 여유가 있었지만.
내가 놈과의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패는 전부 소모해버린 상태였다.
『깔맞춤』 스킬은 아직 재사용 대기시간이 걸려 있었고.
놈의 의지에 따라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위철용의 『빙의』는 사용할 수 없는데….
《뭐, 좋습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시간까지 정지한 건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니까요.》
김준영을 상대할 방법을 머릿속으로 강구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의자를 두 개 가져온 김준영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오만하게 꼬고 깍지를 낀 그의 모습에선 오만한 여유가 묻어나왔다.
“대화? 우리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만큼 각별한 사이였던가? 설마…. 이제와서 살려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저 개인적인 흥미 때문입니다. 게다가 피차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내 도발에도 불구하고 김준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내 쪽을 바라보았다.
피차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얼핏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몸뚱어리에선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내 생각은 전혀 아닌걸?”
-화르륵!
계속해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김준영에게 나는 내력을 주입한 어둠달을 휘둘렀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포식한 검은 심장이 포악하게 펄떡이며.
내 몸속에 막대한 양의 내력을 불어넣었다.
-퍼석!
벼락같이 쏘아진 어둠달의 창날이 화염과 어둠을 머금고 김준영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냈다.
놈의 머리가 여유 가득한 미소를 품은 모습 그대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채, 허물어졌다.
《흐응…. 평가를 수정하도록 하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등히 강하시군요》
완전히 머리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
김준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멀쩡히 계속 지껄이는 것으로 봐선, 빙의 기반의 분신은 아닌가 본데….
내가 보유한 특성 『육체와 영혼』은 영혼과 육체의 비틀린 연결을 바로 잡는 효력을 지녔다.
따라서 김준영이 누군가의 육신에 빙의한 상태라면 마땅히 내 공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야 했겠지만.
여유로운 표정으로 계속 자기 할 말을 늘어놓는 놈의 목소리에선 여유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워워. 잠깐 어울려주시면. 제 쪽에서도 ‘보답’을 준비하도록 하지요.》
김준영의 기세를 살피며,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려니.
양 손바닥을 보인 그는 의외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더러운 것들과 붙어먹은 사교도의 ‘보답’이라고? 필요 없어!”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그 ‘보답’이 박정욱과 설악 공격대원들의 영혼이라면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