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내게 흡수된 김우경의 기억은 계속해서 울컥울컥 이곳, 저택의 정보를 토해냈다.
최상호처럼 정신이 뒤틀린 채, 체체파리 클랜의 사교도 노릇을 하고 있는 저택 고용인들.
블랙 프로그맨을 포함한 각종 몬스터들과 융합된 김준영 특제 ‘실험체’.
저택 곳곳에 숨겨진 각종 부비트랩이며, 혼란을 유도할 목적으로 배치된 가짜 정보들까지.
김우경의 기억에 의하면, 이곳은 여러 가지 함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김준영의 계략대로라면 아무리 나라고 한들,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할 테지만….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나 파둔다더니! 역시 김우경이야.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 한 개쯤은 있어도 이상하여질게 없지.”
애석하게도 김우경의 기억을 손에 넣은 지금의 내겐, 김준영이 마련해 둔 함정따윈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생전에 교활한 성격을 자랑했던 김우경답게, 이곳 공방엔 오로지 이곳을 설계한 김우경 본인만 알고 있는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릉!
김우경의 기억이 속삭인 대로 모루의 배치를 옮기자, 벽 한쪽 귀퉁이가 빙글 돌아가며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산군님, 말씀하셨던 대로 이곳을 샅샅이 조사해봤습니다만. 이렇다 할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 흐억? 이런 곳에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었다니!”
구석에서 음습하게 모습을 드러낸 통로의 위용에, 벌겋게 달아오른 민머리를 멋쩍게 문지르며 다가오던 최상호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우선은 서둘러 이곳에서 탈출하도록 하죠. 밖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거든요.”
“심상치 않은 기운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선 김우경이 남긴 자료라도 좀 찾는 게….”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깜짝 놀란 최상호는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 들었지만.
-크르르르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산군님 말씀이 백번 지당한 것 같습니다요. 암요. 이 흉흉한 곳에선 한시라도 빠르게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 정답입죠.”
1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노릿한 으르렁 소리가 들려오자, 최상호는 즉시 자신의 태도를 확 바꾸어 버렸다.
넉살 좋게 허허 웃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그를 데리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크, 큰일입니다! 산군님! 보, 본사가! 태백이! 공격받고 있답니다!”
축축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통로를 빠져나와, 듀라한이 주차된 곳에 도착한 순간.
나를 반겨준 것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충격적인 소리를 전해오는 서민혁이었다.
*****
-끼이이익!
도로를 성난 망령처럼 질주한 듀라한이 아스팔트 위에 시커먼 바퀴 자국을 남겼다.
듀라한의 움직임이 멈추기 무섭게, 나는 즉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빌어먹을.”
코를 어찔하게 자극해오는 비릿한 피 냄새,
귓속을 얼얼하게 울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섞인 고함소리.
피부를 따갑게 자극해오는 짜릿한 전장의 광기까지!
듀라한의 뒷좌석에서 느꼈던 참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재건되었던 태백 본사 건물은 다시 한 번 전쟁의 불길에 집어삼켜 져 있었다.
“모두 죽여! 가증스러운 태백 놈들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태백 본사 건물을 습격한 이들은 이번에도 오행 길드원들이었다.
광기에 찬 표정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사내와 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내들의 새하얀 갑옷엔 오행 길드 특유의 붉게 물든 오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채채챙!
살기, 아니 숫제 광기까지 느껴지는 오행 길드원들의 무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귀를 아릿하게 자극해오는 쇳소리가 들렸다. 쇠와 쇠가 맞부딪히자 불똥이 우수수 튀었다.
-후와앙!
“빌어먹을 약쟁이 새끼들 같으니! 지난번처럼 무력하게 당해주진 않겠다!”
먼젓번의 습격과 다른 점은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본사 건물이 텅텅 비어있던 상태가 아니라는 것!
불길 속에서 솟아오른 불사조처럼 온몸에 화염을 두른 강태백의 지휘에 따라.
검은 갑옷을 차려입은 태백 길드원들은 오행 길드원들의 습격을 막아내며, 용맹하게 무기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길드장님? 이건 또 무슨 일이랍니까!”
“설용호? 자넨가? 이거 아주 놀랍군 그래!”
득달같이 달려온 내 모습을 발견한 강태백은 불길을 휘둘러 자신에게 달려든 오행 길드원을 태워버리며 사납게 웃었다.
“항상 내 앞에서 젠척하던 산군이란 놈들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더니. 자네만큼은 이렇게 즉각 달려와 주다니! 이거 아-주 반갑군. 그래!”
강태백의 지시에 따라, 본사 앞마당에서 열심히 분투 중인 이들은 친위대가 전부였다.
비꼬듯 말하는 그의 말대로 이곳엔 다른 산군들은 물론, 그들이 이끄는 공격대들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김준영이 말한 대로 태백 길드에 ‘이용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길드장의 지시까지 대놓고 무시할 정도라니.
“오행 놈들이 어디서 이렇게 해괴한 것들을 키워냈는지.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아!”
불길에 화르륵 타올랐던 오행 길드원이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자.
그 모습을 바라본 강태백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일개 길드원 따위가 자신의 공격을 견뎌냈다는 사실 때문인지,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쐐애액!
몸을 일으킨 오행 길드원은 즉각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강태백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어둠달에 내력을 잔뜩 주입해, 독룡아로 놈의 심장을 찔렀다.
-콰드득!
“해괴한 것들이라니…. 확실히 인간은 아닌 것 같군요.”
독룡아는 오행 길드원의 새하얀 갑옷을 찢어발기며, 정확하게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둠달의 창끝에선 마치 생고무를 찌른 것과 같은 묵직한 반탄력 느껴졌다.
살가죽이 찢어진 곳에선 핏방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강태백이 말했던 대로 ‘해괴한 현상’에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어둠달을 까드득 움켜쥐었다.
“크아아악!”
고통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심장을 적중당한 오행 공격대원들은 광폭한 고함소리와 함께 다시 달려들었다.
눌러쓴 투구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엔 굶주린 들개와도 같은 허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르륵!
-콰앙!
득달같이 달려든 오행 길드원의 몸에 나와 강태백의 공격이 동시에 작렬했다.
강태백의 손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다 살라 먹을 듯, 광폭하게 이글거리는 푸른빛 불꽃과
염룡등천의 묘리에 따라 새빨간 화염이 이글거리는 어둠달의 창날이 그의 몸에 적중했다.
“…!”
두 개의 화염에 적중당한 오행 길드원의 갑옷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바사삭 불타버렸다.
하얀색 가죽 갑옷이 불타 사라져버리자, 오행 길드원의 맨몸이 저녁노을 아래에 드러났다.
“크읏! 아무리 내가 현장에서 손을 뗀지 오래라지만, 이렇게 해괴한 것은 처음 보는군!”
오행 길드원의 너무도 끔찍한 모습에 강태백은 신음을 흘렀다.
침식체를 연상케 하듯 엉망으로 뒤틀린 육신은 잔뜩 부패한 채,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강마병의 그것처럼 사악한 마력을 품고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오행 길드원의 육신에선 강마병과 침식체의 특성이 모두 발현되어 있었다.
…강마병과 침식체의 특성이 모두 발현되어 있다고? 어디서 이런 끔찍한 혼종이 나온 거지?
마족들이 영혼을 소멸시킨 육체에 몬스터의 혼을 불어넣은 이형의 존재. 강마병.
사교도들이 인간의 육체를 이계의 존재들에게 침식시킨 괴물. 침식체.
사교도와 마족이 자랑하는 괴물들이 오행 길드원의 몸에 뒤섞여 있었다.
《키에에엑!》
정체를 드러낸 오행 길드원은 귀청이 터질 듯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오행 길드원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들도 똑같은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것들! 왜, 왜 갑자기 기세가 변했어!”
흉성을 터뜨린 오행 길드원들의 기세가 한순간에 바뀌어버렸다.
그전까진 그래도 인간의 그것과 비슷했던 몸놀림이 마치 피에 굶주린 맹수와도 같이 야성적으로 변했다.
오행 길드원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친위대들의 입에서 당황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를 부탁합니다! 길드장님!”
친위대원 한 명이 수세에 몰리는 장면이 포착되자.
황금빛 외골격을 전개하며 달려간 나는 친위대를 향한 공격을 대신 받아내었다.
-까드드득!
광기가 끈적이는 칼날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번쩍이는 외골격에 가로막혔다.
금속과 금속이 거칠게 맞부딪히는 요란 벅적한 소리와 함께, 외골격에 약간의 흠집이 생겼다.
실로 경악스러울 만큼 무식한 위력이었다.
“서, 설용호 산군?”
순간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친위대원은 경외감이 서려 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떨떨한 질문에 답해줄 사이도 없이, 나는 반격하듯 재빨리 어둠달을 휘둘렀다
-화륵! 화르륵!
화염이 이글거리는 창날이 저녁 놀이 드리워 어둑해지기 시작한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괴이한 존재로 변이한 오행 길드원의 단단한 피부는 나의 공격을 너끈히 받아내었다.
입고 있는 갑옷은 순식간에 걸레 짝이 되어 사라져버렸지만. 내 공격은 놈의 거죽을 완전히 뚫어내지 못했다.
이토록 무식한 방어력이라니, 그렇다면 역시 암룡출동 밖에 답이 없나?
“크아아악!”
암룡출동에 생각이 미친 나는 즉시 오른손 외골격에 내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사방에선 친위대원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산군 급은 아니지만, 제법 강력한 헌터인 친위대원들조차 변이된 오행 길드원들을 당해낼 순 없는 듯했다.
-쿠와아앙!
“이놈들!”
친위대원들이 몸을 눕히자, 우렁우렁한 고함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한때 대한민국 헌터 계의 정점에 오른 강태백의 불같은 성질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르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휘황찬란한 갑옷이 고온을 이기지 못하고 화르륵 불타버렸다. 갑옷에 붙어있는 금속 조각들조차 허무하게 증발해버렸다.
강태백의 특성 트리 『금속과 불꽃의 노래』가 그 흉악한 위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다.
-쿠와아앙!
먹잇감을 발견한 이리떼처럼, 쓰러진 친위대원들에게 몰려들던 오행 길드원들의 몸에 고온의 푸른 불꽃이 화르륵 솟구쳤다.
놈들의 단단한 살거죽이 흐물흐물해지며, 조금씩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타격을 입기 시작하자, 오행 길드원들은 괴성을 질러대며 강태백에게 달려들었다.
-까드득! 깡! 까드득!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공격이라 봐야. 강태백의 외골격 앞에선 단순한 공격 따윈 무용지물!
오행 길드원들의 공격이 강태백의 몸 위로 쏟아질 때마다, 푸른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놈들의 무기는 모조리 불사조의 날개처럼 피어오른 강태백의 외골격에 가로막혀 증발해버렸다.
《쿠웍! 쿠워어어억!》
무기가 순식간에 불타버린 오행 길드원들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들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맨손을 광포하게 휘두르며 강태백에게 달려들었다.
“오냐! 모조리 불태워 주마!”
광포한 목소리와 함께 강태백은 양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의 외골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더욱더 강렬해지더니.
강태백의 가슴께에서 거대한 불꽃이 이글거리며 뭉치기 시작했다.
-쿠르르륵!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강태백의 손에서 화염구가 발사되었다.
소용돌이처럼 타오르는 집채만 한 불덩이가 오행 길드원들을 덮치려는 바로 그 순간!
-쩌저적!
갑자기 후두둑 돋아난 거대한 얼음이 강태백의 공격을 상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