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그런데…. 옷은 좀 입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신을 차린 최상호는 김우경을 찾는 여정에 은근슬쩍 합류했다.
연신 호탕한 웃음소리로 너스레를 떨어대는 것까진 좋았지만….
그는 여전히 시원하게 옷을 벗고 있는 상태였다.
“으하하핫.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 아닙니까? 또, 남자들끼린데 뭐 어때요.”
볼 장 다 보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원래부터 사소한 것(?)엔 개의치 않는 것이 최상호의 성격이긴 했다.
그는 복도에 널브러진 이들로부터 무기와 도구만을 주워든 채, 내 옆에서 드문드문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김우경 장인님께서 『원혼 무쇠』를 대량으로 주문하셨다구요?”
“옙. 장인님께서 창안하신 『원념 제련』으로 벼려낸 무기가 길드 내에서 워낙 평이 좋아서 말입죠. 조합원들을 독려해, 길드의 모든 무기를 『원혼 무쇠』 바꾸신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요?”
[흐음. 네놈의 의심도 일리는 있다만, 모든 정황 증거가 김우경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군. 어떠냐? 아직도 더 의심을 해야겠느냐?]
‘그렇지만 말입니다…. 수상한 냄새‘만’ 나는 것이 더욱 수상하게 느껴지거든요.‘
최상호가 말해준 김우경의 행적과 저택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조합해보면.
김우경이야말로 모든 만악의 근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대놓고 모든 단서가 김우경을 노골적으로 가리킨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겐 더 수상하게만 느껴졌다.
“김우경 장인님의 공방은 이쪽입니다. 그곳부터 조사해 보지요.”
태백 길드의 보급을 책임지는 인물답게, 최상호는 이곳의 구조에 익숙한 듯한 눈치였다.
광기에 가득찬 채로 달려드는 온갖 인간군상들을 쓰러뜨리며,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상하군요. 평소라면 망치질 소리가 끊이질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합니다.”
계단을 따라,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실에 도착하자.
굳게 잠긴 지하실 문에 귀를 가져다 댄 최상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러서세요.”
-콰아앙!
최상호를 잠시 옆으로 물러나게 한 뒤.
나는 전신을 외골격으로 감싼 채, 굳게 잠긴 지하실 문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내력이 주입된 다리가 무서운 괴력을 토해내자, 굉음과 함께 지하실 문이 움푹 우그러졌다.
“세상에! 김우경 장인이 그렇게 자랑하는 특제 철문을 한 방에! 역시 대단하십니다 산군님!”
최상호의 너스레를 들으며, 부서진 문 안쪽으로 진입하자 공방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글거리는 열기를 토해내던 집채만 한 가마는 불이 꺼진 채, 침묵 속에 방치되어 있었고.
장인들이 힘껏 망치질해대던 모루는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장막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 공방 한 가운데엔 긴 머리를 풀어헤친 괴인이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 김우경 장인님?”
지하 공방 한 가운데에 주저앉아있는 괴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우경이었다.
그는 멍하니 초점을 잃은 흐릿한 눈으로, 불이 꺼진 가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김우경의 모습에 최상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김우경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이 왔어. 그들이 와버렸어. 우린 이제 끝났어.”
《아니야! 형제! 우리는 끝나지 않았어! 주인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셨지! 모든 것은 주인님을 위해!》
…뭐야?
분명 김우경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었지만.
괴이하게도 그의 입에선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가자. 형제여.”
《피! 광기! 살육! 우리는 이때를 위해 만들어졌다!》
-끼기긱!
가만히 주저앉아있던 김우경이 몸을 일으킨 순간.
갑자기 금속이 비틀리는 소리가 침묵이 내려앉은 공방 속에 울려 퍼졌다.
근처에 버려져 있던 망치를 주워든 김우경은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흐, 흐헉! 저, 저게 뭐야! 치, 침식체?!”
김우경의 기괴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김우경을 바라보던 최상호가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넉넉하니 넉살 좋은 너스레로 가득 찼던 최상호의 얼굴이 삽시간에 혐오와 공포에 물들었다.
“너희는…? 주인님께서 말한 ’그들‘이 아니로군. 그들은 어디로 갔지?”
《뭐? 안돼! 놈들의 피는 우리의 것이야! 어서! 어서! 놈들을 찢어발기고 그들을 찾아내!》
김우경의 모습은 침식체의 그것처럼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헐벗은 상반신은 절반이 제멋대로 자라난 금속 촉수로 뒤덮여 있었고
가슴 한복판엔 김우경과 쏙 빼닮은 얼굴이 떡하니 자리 잡고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끝없이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래, 네놈들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피, 피를 내-놔-라!”
《크아아아앙!》
혼란에 빠진 채로 중얼거리던 김우경은 가슴에 돋아난 머리의 말에 적의를 드러내며, 우렁찬 포효를 터뜨렸다.
“흐, 흐으으억! 사, 산군님! 김우경 장인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담소는 나중에 나누기로 하고! 팀장님은 우선 몸을 피하세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최상호를 대피시킨 뒤.
나는 이를 까드득 갈며, 노획한 무기 중 그나마 창에 가까운 철봉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커허어어엉!》
-우두둑!
기괴한 생김새만큼이나 김우경의 공격은 기묘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망치를 쥔 그의 팔이 마치 고무로 이뤄진 것처럼 주욱 늘어났다.
-촤아아악! 촤아악!
그렇게 길게 늘어난 팔은 마치 채찍처럼 공방의 절반을 거세게 연속으로 휩쓸었다.
묘사는 길었지만,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길게 늘어난 김우경의 팔이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따다당! 따다다당!
통짜 철로 제작된 철봉에 내력을 주입해, 휘둘러진 팔을 힘껏 쳐내자.
철봉을 쥔 손이 주르륵 밀려 나가며, 얼얼한 격통이 찌릿하게 느껴졌다.
김우경의 팔은 인간의 신체 부위가 변이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네놈의 피로 목을 축이리라!”
《갈증! 목말라! 어서, 어서 놈의 피를 쥐어짜!》
처음의 공격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탓일까?
짜증과 분노가 가득 차 있는 함성과 함께, 길게 늘어났던 김우경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신 그의 상반신을 뒤덮은 금속 촉수가 길게 자라나, 그의 몸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그렇게 뭔가 변이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그 틈을 타, 김우경에게 가까이 파고 들어간 나는 독룡아를 시전했다.
철봉 끝에서 불꽃으로 이뤄진 용 한 마리가 솟아올라, 김우경의 숨통을 노렸다.
-까가가강!
철봉을 쥔 손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정통으로 무언가를 맞춘 느낌은 들었지만.
가격한 부위에서 들려온 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피륙으로 이뤄진 생명체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듯한 소리였다.
《변이가 끝났다! 형제여! 피를 짜낼 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독룡아에 정통으로 적중당했음에도 불구.
김우경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사이, 변이가 완료되었는지 놈의 몸은 이제 검붉은 색으로 꿈틀거리는 금속 촉수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까가가강!
김우경의 전신을 뒤덮은 금속 촉수는 경이로운 내구도를 자랑했다.
염룡등천의 묘리에 따라 불꽃이 이글거리는 철봉을 휘둘러도, 놈의 몸을 뒤덮은 금속 촉수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크워어엉! 피를! 살점을! 내놔!》
-꽈드득!
촉수로 뒤덮인 거인 같은 모습이 된 김우경의 움직임은 굉장히 느릿했으나.
그 움직임에 담긴 괴력만큼은 범상치 않았다.
놈이 휘두른 주먹에 가격당한 모루가 굉음과 함께 우지직 짓이겨졌다.
-콰앙! 콰아앙!
나는 김우경이 모루에 주먹질하는 틈을 타서, 약식 암룡출동을 발동시켰다.
내력이 주입된 양손의 외골격이 폭발하며, 조각난 외골격이 놈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공격을 당했다. 형제여. 상태는 어떤가.”
《간지럽지도 않다! 잔재주는 그만! 그만! 어서 피를 내게 바쳐!》
하지만 약식 암룡출동의 경이로운 파괴력조차,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김우경의 외피를 뚫어낼 순 없었다.
약식 암룡출동에 제대로 적중당했음에도, 놈의 금속 촉수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렇게 무식한 내구력이라니.
무식한 내구력과 파괴력에 걸맞게, 김우경의 움직임이 느려 터져서 어찌어찌 놈을 상대할 순 있었지만.
어둠달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대충 주운 철봉 따위론 김우경의 방어를 뚫어낼 방법이 없었다.
《죽어! 반으로 짜부라져서 죽어!》
“…가만?”
김우경이 느릿느릿 휘둘러대는 주먹을 피하며, 놈을 쓰러뜨릴 방안을 찾고 있으려니.
공방 중앙에 놓여 있는 거대한 가마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무기 장인들의 가마는 사용자의 마력이 담긴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고 했지?
머릿속을 번뜩 스친 아이디어에 나는 방향을 바꿔, 재빨리 가마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염룡등천의 구결을 외워가며 가마 속에 내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내 몸에서 비롯된 내력이 가마 속으로 쭈욱 빨려 들어가자.
허전한 느낌과 함께, 가마 속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꽃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단숨에 전신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에 기겁한 나는, 내력을 회복한 즉시 외골격을 둘러 몸을 방어했다.
그래! 이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어!
“요 쥐방울만 한 놈이 어디로 도망갔느냐.”
《저기다! 저쪽이다! 저쪽에서 우리를 보고 건방지게 웃고 있어!》
다시 한번 머릿속에 김우경을 쓰러뜨릴 방법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순간 내 행방을 놓쳤던 김우경이 나를 발견했다.
-쿠웅! 쿵! 쿵!
김우경은 특유의 느릿한 움직임과 함께, 거대한 주먹을 붕붕 휘둘러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오옹! 후오오오옹!
김우경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피부를 찢어발길 듯한 풍압이 느껴졌다.
모든 것을 박살 낼 듯한 흉흉한 살기가 얼굴을 찌릿하게 찔러왔다.
하지만 그렇게 흉폭한 살기 속에서도, 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마 앞에서 가만히 버티고 서 있기만 했다.
“놈이 포기했다. 형제여! 만찬의 시간이다!”
《만찬! 만찬! 피와 살점! 축제의 시간!》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본 김우경의 두 얼굴에 희열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살을 찢어발길 듯한 살기가 더욱더 가까워졌다. 큼지막한 손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금!”
김우경의 손이 막 내 몸을 움켜쥐려는 찰나!
나는 재빨리 몸을 숙여 김우경의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면서 그대로 놈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듯 파고 들어가, 단숨에 놈의 뒤편에 도착했다.
-번-쩌억!
내 몸을 뒤덮은 금빛 외골격이 완전히 검게 물든 그 순간!당황한 김우경이 막 몸을 뒤로 돌리려는 그 순간!
준비해뒀던 암룡출동이 김우경의 등판에 작렬했다.
정식 암룡출동마저, 놈의 몸을 뒤덮은 금속 촉수를 완전히 뚫어내진 못했지만.
김우경의 거대한 몸을 일순간 넘어뜨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끄오오아아악! 형제여!”
《뜨거워! 뜨거워! 불! 불! 사방에 뜨거울 불!》
균형을 잃은 김우경은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가마 속으로 기우뚱 넘어졌다.
금속조차 일순간에 녹여버리는 고열이 놈의 금속 촉수를 흐물흐물하게 녹였다.
-치지지직!
김우경은 필사적으로 가마 속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열기 속에 녹아내린 금속 촉수가 놈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김우경의 몸은 녹아내린 금속 촉수에 타들어갔다.
“크아아악!”
《느아아악!》
두 개의 입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이 터졌다.
자비심 없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 속에서 김우경은 그렇게 활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