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
암룡출동의 파괴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블러드 슬라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열기에 응고된 부위가 내력의 폭풍을 얻어맞아 모래성처럼 파스스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점액질 육체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내부에서 새빨간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빠지직!
블러디 슬라임의 잔해에서 피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는 보석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창날을 휘둘러 그것, 블러디 슬라임의 핵을 단박에 박살냈다.
「위업 [게이트 – 살육의 평원] 달성!」
「칭호 [살욕의 종결자]가 수여됩니다.」
「칭호 보상 – 보너스 특성 포인트 [+10]」
「최초 위업 달성 보상!」
「최초로 위업 [게이트 – 살육의 평원]을 획득하여, 특성 트리에 전설 특성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이 추가됩니다.」
블라드 슬라임의 핵이 바스러지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었다.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이라니. 여기서도 이게 나오네.”
위험도 2등급을 자랑하는 우두머리답게, 보상으로 제공된 특성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초대박 특성을 손에 넣은 덕분에 입꼬리가 저절로 스르륵 말려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특성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 !
회귀 전에도 게이트를 공략하는 헌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꾼다는 대박 특성이었다.
그것의 효과는 바로, 행운 능력치에 비례하여 일정 확률로 전리품이 강화된다는 것!
일정 확률이긴 하나, 희귀 등급의 아이템을 영웅 등급으로 영웅 등급의 아이템은 전설 등급으로 강화시켜주는 대단히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는 특성이었다.
‘행운’ 능력치를 올릴 방법이 지극히 한정적인 다른 헌터들조차도, 이 특성을 얻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판국인데.
『깔맞춤』 특성의 효과로 인해, 언제든지 행운 스탯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나는….
“으흐흐흐.”
『깔맞춤』 특성과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 특성의 사기적인 시너지를 생각하자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왔다.
그래! 이 두 특성들만 있다면 언제든 보상을….
-띠릭!
그렇게 달콤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으려니.
특유의 알림음과 함께, 갑자기 시스템 창에 메시지가 하나 더 출력되었다.
「놀랍습니다! 홀몸으로 2등급 게이트 우두머리를 퇴치하셨기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홀로 2등급 게이트를 클리어해서일까?
오래전에 피켈퀸을 특성트리 없이 쓰러뜨렸을 때처럼, 이번에도 추가보상이 지급된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추가 보상에, 나는 잔뜩 긴장된 눈빛으로 시스템 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만있자…. 지난번엔 분명히 보상으로 얻었던 『일당백』 스킬이 『일기당천』으로 진화했었지?
그렇다면, 서, 설마?!
「전설 특성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이 『야바위꾼의 악운』으로 진화합니다.」
“세상에! 맙소사. 지, 진짜로 그게 진화한다고? 대, 대박이잖아?”
설마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대박 특성이 한 단계 위로 진화한다는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부릅뜬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머릿속이 허옇게 백열되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풍이라도 걸린 듯 덜덜 떨렸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특성 트리 오픈!”
환호성을 지른 나는 곧장 특성트리를 열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뒤도 보지 않고 특성 포인트를 새롭게 진화했다는 특성에 투자했다.
“역시 대박! …잠깐만. 뭐야 이게!”
상태창을 열어 새로 습득한 『야바위꾼의 악운』 특성을 확인한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에 내 머릿속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던 환호성이 그 자리에서 뚝 멎었다.
『야바위꾼의 악운』
등급 : 고유
효과 : 이제부터 게이트 클리어 보상 상자에 더해, 새로운 상자 두 개가 추가로 출현합니다.
해당 특성의 소유자께선 그 중 하나만을 골라. 선택하셔야 합니다.
(추가로 제공되는 상자의 내용물은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흐흐흐. 이번엔 어느 쪽에 걸어보시겠소?”
야바위꾼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골목 귀퉁이에서 주사위가 담긴 컵을 흔들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실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그의 살림살이는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요.」
『게이트 탐구자의 행운』에서 진화했음에도 불구, 『야바위꾼의 악운』 특성은 진화하기 전과는 너무도 다른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앞으로 모든 전리품 보상이 무작위로 제공된다고?
『야바위꾼의 악운』 특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한 순간.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환하게 펴져있던 내 얼굴은 얼어붙은 겨울 들녘처럼 허옇게 질려버렸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멍한 충격이 머릿속을 계속 쾅쾅 두드렸다.
“이게 말이 돼? 추가 보상으로 진화시켜줬다며! 그런데 더 구리게 변했다고?!”
어차피 게이트의 클리어 보상을 미리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진화’된 특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선 ‘진화’가 아니라 ‘퇴화’로 받아질 수 밖에 없는 특성이 되어버렸다.
“용왕의 무구는! 밤그늘의 장막은! 이 빌어먹을 성좌 놈들아아!”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어지간한 게이트의 보상을 전부 꿰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야바위꾼의 악운』 특성의 효과로 전리품 습득 방식이 변해버렸기에, 내가 세웠던 당초의 계획은 크게 어그러진 상황이었다.
이제, 목표로 점찍은 게이트를 찾아간들 원하는 보상을 얻기 위해선 철저히 확률에 기대어야 할 판국이었다.
「게이트 우두머리, 블러드 슬라임의 전리품 상자가 출현합니다.」
「특성 『야바위꾼의 악운』의 효과로 추가 선택지가 출현합니다.」
「세개의 전리품 상자 중 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쿠웅! 쿠웅! 쿠웅
그렇게 어그러진 계획으로 인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려니.
여느 때보다 훨씬 긴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하늘에서 세 개의 전리품 상자가 떨어져 내렸다.
“허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보상 상자들은 심지어 생긴 것마저 각각 달랐다.
그것들은 색, 크기, 재질 등등 어느 하나 공통적인 것이 없이 다른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흐으음. 이건 ‘양손이 절단된 야바위꾼’의 소행인가? 운에 기대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는 놈답게 별 해괴한 것을 다 만들어 뒀구나.]
세 개의 보상 상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으려니.
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위철용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상 상자의 표면을 어루만졌다.
[그 얼간이 놈이 도박 좋아하는 것은 성좌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지만, 이런 식의 독특한 효과의 특성을 숨겨놨을 줄은 본존도 미처 몰랐지 뭐냐.]
이 뭣 같은 특성을 만든 성좌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모양인지.
상자를 어루만지는 위철용의 얼굴엔 그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런 괴상한 특성을 만들 만한 양반이면 좀 옆에서 말리시지 그랬어요?”
[성좌들 사이에선 각자의 ‘취미’ 활동에 어지간해선 함구하는 것이 불문율이니라. 게다가 그놈 성격으로 짐작해보건대. 이 중 하나는 기존 보상보다 더 좋은 선택지를 숨겨놓았을 게 자명하니. 그리 골머리를 썩힐 필요도 없느니라.]
“예전부터 이런 것엔 정말 재수가 없었거든요. 아으으. 이런 선택지 정말 싫은데….”
나는 애초에 이런 ‘선택지’와는 영 좋지 않은 인연만이 있었기에, 시종일관 얼굴을 찌푸렸지만.
위철용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르르릉
[어차피 시간도 없지 않으니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뭐 씹은 표정으로 상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게이트 전체가 웅웅 진동하며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검은 오동나무 상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
“산군님? 벌써 볼일이 끝나신 겁니까?”
연락을 받고 나타난 서민혁의 모습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은 이번에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벌써라…. 그러고 보니. 생각한 것보단 볼일이 빨리 끝나긴 했네요.”
외모지상주의의 효과로 인해, 크림슨 웨어베어들을 사냥하기란 너무도 손 쉬운 일이었고
크림슨 웨어베어들의 활약(?)으로 블러드 슬라임을 사냥한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만큼.
내가 논산 육군 훈련소의 게이트를 털어먹는데 걸린 시간은 한나절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털어먹어하니 쉴 틈은 없죠.”
생각보다 빠르게 이곳의 게이트를 털어먹긴 했으나,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상태였다.
서민혁에게 다음 목적지로 향할 것을 지시한 나는 듀라한에 몸을 싣곤, 느긋한 표정으로 푹신한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