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한참 동안이나 무너진 고속도로를 내달린 듀라한은 나를 폐허 한복판에 데려다주었다.
“여기 어디쯤이라 들었는데….”
강다희가 먼젓번에 ‘거래’ 운운하며 알려준 지점에 도착한 것은 좋았지만.
다른 곳보다 유난히 처절하게 박살 난 폐허에선 게이트의 ㄱ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목적지를 착각하신 건 아니겠죠? 서 기사님?”
적절한 곳에 듀라한을 주차한 서민혁은 왜인지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잔뜩 겁에 질려있는 것이 퍽 우습게 느껴졌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장난삼아,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 이 저주받은 장소를 착각할 리가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민혁은 이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을 들어 굉장히 꺼림칙한 표정으로 폐허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아치형 구조물이었다.
「호국 요람」
오랫동안 폐허 속에서 방치되어있었음에도,
아치형 구조물엔 한국 남성의 PTSD를 자극하는 네 글자가 아직 질깃하게 붙어있었다.
“으으으…. 아무리 산군님 지시라지만. 이, 이 저주받은 곳을 다시 오게 될 줄은.”
그랬다.
강다희가 알려준 첫 번째 장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논산 육군 훈련소’였다.
훈련병 시절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서민혁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와들와들 떨리는 몸을 양팔로 부둥켜안은 모습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굉장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거, 호들갑도 심하시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여긴 이제 폐허에 불과하니까.”
서민혁이 보여주는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피식 웃은 나는 실없는 실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와들와들 몸을 떨어대는 서민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그. 그게 아니라. 이, 이곳이 폐허가 되던 그 날. 저, 저도 이곳에 있었단 말입니다.”
“뭐라구요?”
…서민혁이 그때 이곳에 있었다고?
논산 육군 훈련소가 폐허가 된 것은 내 기억 상으로는 분명, 대격변 초기의 일이었다.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한 대한민국 정부는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들을 강제로 징집했지.
징집된 인원 중 대부분을 이곳 논산 훈련소로 보냈지만….
“아, 아직도 그때의 꿈을 꾼단 말입니다. 사방에 가득했던 비명 소리…. 아찔하게 풍겨왔던 피 냄새….”
애석하게도 입소식 날, 훈련소에 열려버린 보랏빛 게이트 때문에 수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다.
위험도 2급인 게이트가 과부하 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은 너무나 난폭했기에….
“…어?”
기억을 더듬어 서민혁이 겪은 비극을 생각해 낸 순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분명 그때 논산 육군 훈련소에 나타난 게이트는 클리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시절이라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회귀 전 이곳에 대한 보고서는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태백에서 읽었던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의 게이트는 수많은 ‘무소속’ 헌터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클리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분명히 클리어 되었다고 그랬는데. 으으….”
당시의 트라우마가 떠오른 모양인지, 서민혁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혼잣말을 쏟아냈다.
그가 중얼거린 혼잣말대로, 위험도 2급인 게이트가 동일한 장소에 다시 한 번 열렸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하기에….
아무래도 정황상 강다희가 내게 알려준 게이트는 그때의 비극을 낳았던 게이트와 동일한 것이 분명했다.
“…설마하니, 이곳에 있었던 비극과 관련된 분이셨을 줄은 몰랐네요. 미안합니다. 서 기사님.”
뒤늦게 서민혁의 과거를 알게 된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다시 연락할 때까지 적절한 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것을 권유했다.
*****
서민혁을 보낸 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고서에 나와 있던 게이트의 발생지점으로 향했다.
얼마쯤 폐허 속을 거닐다 보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무관」
보고서에 나와 있던 게이트 발생지점엔 한때 거대한 강당이었던 건물의 잔해가 쓰러져 있었다.
폐허 속에 을씨년스럽게 무너져 있는 건물의 잔해는 얼핏 봐선 그리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화안금정을 발동시킨 채, 안력을 돋워 잔해를 구석구석 자세히 살피자….
“역시, 그때의 그 게이트가 맞나 본데?”
나는 흙먼지가 가득한 건물 잔해 속에서 반쯤 파묻혀 있는 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폐허 속에 오랫동안 방치된 것치곤 유별나게 반들거리는 철문의 손잡이에, 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뒤틀었다.
-끼이이익!
철문의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은 나는 손에 내력을 주입해, 파묻힌 철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고요가 내려앉은 폐허 속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LED 조명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악!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를 지나,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의 중심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며, 건물 잔해 속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파츠츠츠츠.
널찍한 공간의 풍경은 역시나, 게이트 관리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무스름한 사슬로 봉인되어있는 거대한 보랏빛 게이트.
탐욕스럽게 입을 쩌억 벌린 게이트 주변에 놓여있는 복잡한 기계장치.
한때,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던 논산 육군 훈련소 게이트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멀쩡하게 그 흉흉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진짜로 아무도 없네?”
강다희가 미리 일러준 대로, 이곳을 관리하는 체체파리 클랜원들은 모조리 철수한 상태였다.
게이트 특유의 보랏빛이 연식 번쩍거리는 게이트 룸에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류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철수했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유용하게 써주겠어.”
넓은 게이트룸 구석에 세워져 있는 서류철엔 엄청난 숫자의 서류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많은 서류 중 아무거나 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적혀있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파급력을 지닌 내용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부와 체체파리 클랜 사이의 게이트 매각 명세서라니.
언론사에 가볍게 터뜨려주면, 목이 날아갈 사람 여럿 되겠는데?
예상치 못했던 히죽 웃은 나는 중앙의 게이트 잠금장치 쪽으로 향했다.
-철컹!
게이트 잠금장치의 홈에 강다희에게서 건네받은 목걸이를 가져다 댄 뒤 함께 전해들은 암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톱니바퀴가 육중하게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게이트를 봉인하고 있는 사슬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파지지직
눈앞을 가렸던 보랏빛 섬광이 잦아든다. 싶더니, 음산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 떠 있는 을씨년스러운 보름달, 멀리서 들려오는 맹수의 포효 소리.
곳곳에 이름 모를 동물들의 거대한 해골들과 부패한 살 조각들이 흩뿌려진 너른 벌판.
높은 지능을 지닌 수인형 몬스터인 ‘크림슨 웨어베어’가 서식하는 ‘살육의 평원’이었다.
-우두두둑
“2급 게이트는 상당히 오랜만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정도 위험도의 게이트는 회귀한 뒤로 처음이었다.
멀리서부터 전해져오는 짐승들의 저릿한 살기에, 온몸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목을 가볍게 우두둑 꺾는 것을 시작으로 간단히 몸을 푼 나는 등에 비끄러매고 있었던 어둠달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빠아아악!
그리곤 주입된 내력이 시커멓게 피어오르는 창대를 힘껏 휘둘러, 내 뒤에서 몰래 접근하던 크림슨 웨어베어의 머리통에 강렬한 첫인사를 선사해주었다.
《쿠워어어억!》
창대에 가격당한 두개골에서 제법 그럴듯한 타격음이 시원스레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크림슨 웨어베어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갑작스레 머리를 얻어맞은 놈은 성난 포효를 내지르며 곧바로 내게 반격을 날렸다.
-투콰가가각!
성인 남성의 머리통만 한 주먹이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나는 창대를 가볍게 회전하며 크림슨 웨어베어의 공격을 흘려냈다.
내력이 주입된 창대가 빙글 회전하며, 충격량을 대부분 흘려보냈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창대를 단단하게 붙잡았던 손바닥이 주르륵 흘러내릴 만큼의 충격이 느껴졌다.
《쿠와오오오!》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크림슨 웨어베어는 살짝 몸을 날려 거리를 확보한 뒤, 몸을 벌떡 일으켜 노릿한 살기가 일렁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적절한 거리가 벌려진 탓에, 나는 놈의 흉폭한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크림슨 웨어베어는 이름처럼 곰과 사람을 적절히 섞은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마치 스모 선수처럼 살과 근육이 적절히 뒤섞인 둥그스름한 몸매.
동글동글한 근육질 몸 곳곳에 숭숭 돋아난, 빨갛고 억센 겹갈기털.
위험도 2급에 해당하는 게이트에 서식하는 몬스터답게 크림슨 웨어베어는 척 봐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 오랜만에 사냥할 맛이 나겠….
《쿠오?》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황금빛 외골격을 일으킨 순간.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크림슨 웨어베어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곧이어, 질식할 듯 나를 옥죄어오던 야생의 살기가 조금씩 흩어져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겪어본 장면 같은데.
《쿠오호호! 쿠홋호!》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크림슨 웨어베어의 눈가가 헤벌쭉하니 풀렸다.
살기 어린 숨결을 노릿하게 토해내던 놈의 코가 연신 벌름거리며, 묘한 콧소리를 뿜어냈다.
《쿠오헤헤헤….》
흉포한 몬스터이긴 하나, 크림슨 웨어베어 또한 인간형 몬스터인 만큼.
『외모지상주의』 특성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그래도 먼젓번의 다른 몬스터들보단, 나름 눈이 높은(?) 모양인지 외골격을 두르지 않았을 땐 『외모지상주의』 특성의 효과에 저항한 모양이지만.
외골격 『미의 화신』의 효과로 2배로 증폭된 『외모지상주의』 특성에는 이기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너도냐.”
기묘한 울음을 흘려낸 크림슨 웨어베어는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웃음을 띤 채, 헤벌쭉 올라간 입매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버린 눈매에선 나에 대한 호감이 듬뿍 묻어나왔다.
《끄으응. 끙! 끙!》
그렇게 내 주위를 돌던 크림슨 웨어베어는 마치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낸 뒤.
내게 가까이 다가와, 둥글게 몸을 웅크려 앉았다.
그리곤 마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 까끌까끌한 겹갈기털로 뒤덮인 머리를 내게 들이밀기 시작했다.
-빠가아아악!
당연한 말이겠지만.
크림슨 웨어베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정이 듬뿍 담긴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었다.
어둠달의 검은 심장에서 비롯된 시커먼 내력이 꿈틀거리던 창날이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쿠워어엉?》
어찌나 무식한 맷집인지,
크림슨 웨어베어는 내력이 주입된 창날에 머리가 꿰뚫리고도 숨을 거두지 않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주르륵 흘러내린 피를 바라보던 놈의 눈이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실연의 상처일까? 아니면 단순한 분노일까!
강렬한 포효를 내지른 크림슨 웨어베어의 몸에선 다시 한 번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피가 조금씩 스며들어 가 붉게 물든 눈을 번뜩이며, 놈은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썩어도 준치라고.
얻어맞으니까, 정신을 차렸다 이거지?
그렇게 크림슨 웨어베어의 기세가 변하자,
나는 어둠달을 다시 꽈드득 틀어쥐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검은 심장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내력을 어둠달에 주입해.
놈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려던 그 순간!
《쿠오오오옷!》
쩌렁쩌렁한 포효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크림슨 베어가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근육질 다리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놈의 몸에선 살갗이 찢어질 듯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파아아앗!
크림슨 웨어베어의 광폭한 돌진에 대비하려 했지만.
놈의 움직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날랬다. 순식간에 크림슨 웨어베어의 육중한 몸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런 젠장! 설마, 가속도를 살려 뒤쪽에서 덮치려는 건가?
크림슨 웨어베어의 변칙적인 움직임에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돌린 그 순간!
-쿠와아아아앙!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내 곁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크림슨 웨어베어가 바위에 힘껏 머리를 들이받는 모습이었다.
《쿠이이잉….》
어마어마한 폭음이 들리나 싶더니, 이내 슬픔 울음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정통으로 머리를 들이받은 크림슨 웨어베어의 강인한 근육질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여전히 슬픈 표정이 남아있는 눈이 나를 더듬더니, 곧이어 눈물이 한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특성 포인트가 제공됩니다.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세요.」
「능력치 상한이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능력치에…」
“뭐여?”
…설마 쟤, 실연의 충격으로 자살한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