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휘청!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 샤네가의 독이 뒤늦게 위력을 발휘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다리가 기묘한 방향으로 휘청 꺾였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검붉게 얼룩진 바닥이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왔다.
-콰앙!
소리로 미뤄보건대 어딘가 뼈가 부러진 게 확실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마비된 육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내 제어에서 벗어나 있었다.
“싸부님? 꺄아아악! 싸부님!”
바로 그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김혜옥이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큼지막한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커다란 눈망울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허, 헌터님은 괜찮으신거야?”
“용호가 우리를….”
헐레벌떡 달려온 김혜옥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쪽에서 양소혜와 양소룡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도 샤네가의 마수로부터 다행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모르겠어! 아으으. 싸부님! 말 좀 해보세요! 싸부님!”
가까이 다가온 김혜옥은 내 몸을 꽈악 붙들곤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그녀의 몸짓은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릴 만큼 강렬했지만.
독에 중독된 나는 어떠한 반응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뜨뜻한 눈물이 내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다.
“포션! 포션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 그렇지! 포인트숍 오픈! 구매! 구매! 구매! 으아아아! 싸부님! 싸부님 죽으면 안돼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뭔가 축축한 것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촤아아악!
곧이어 엄청난 양의 포션이 내 얼굴에 뿌려졌다.
흥분한 김혜옥이 어찌나 많은 양의 포션을 퍼부었는지, 포션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었다.
얼굴에 계속 뿌려지는 포션의 폭포 때문에 숨이 콱 틀어막혔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떡해! 어떡해! 아직도 반응이 없어!”
김혜옥이 그렇게 엄청난 양의 포션을 퍼부어버린 덕에 부상은 깔끔히 완치되었다.
하지만 혈관과 신경을 타고 전신에 퍼진 독은 여전히 내 몸을 나무토막처럼 마비시킨 상태였다.
걱정스레 나를 쥐고 흔드는 김혜옥에게 나는 어떠한 반응도 보여줄 수 없었다.
“CPR! CPR! 응급상황에선 CPR이 먼저라고 배웠어!”
패닉에 빠진 김혜옥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자.
똑같이 혼란에 빠진 양소룡이 다급한 목소리로 CPR (심폐소생술)을 제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을? 나 의식은 완전 멀쩡하거든?
“CPR? 그게 뭔데!”
“무슨 영어의 약자였는데…. 으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 좀 열심히 들어놓을걸!”
괴상한 곳으로 향하는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으슬으슬 돋았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엄습해왔다.
“CPR. 심폐소생술. 심장과 폐의 활동이 멈추었을 때. 가슴을 압박해서 인공적으로 혈액을 순환시키는 응급처치 방법이야. 지금 용호에겐 필요없….”
“가슴을 압박이라…. 과연 소혜 언니! 역시 똑똑하세요!
”그래! 들어본 적이 있어! 치명적이고(Critical) 파워풀하게(Powerful) 흉부를 압박하는 소생술이라더라! 갈비뼈가 부서져야 제대로 된 거래!”
…뭐?! 아냐 그거! 정신 나간 것들아! R은 어디에 팔아먹었는데!
보다 못한 양소혜가 끼어들어 두 햇병아리의 폭주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부님…. 제가 꼭 살려드릴게요! 갈비뼈를…. 부순다!”
눈물을 주르륵 흘러내린 김혜옥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른 뒤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늘 위로 번쩍 들린 김혜옥의 주먹에서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 안 돼. 어떻게든 움직여야….
-꿈틀!
다급한 마음에 내력을 돌려 심장을 자극했다.
시커먼 내력에 쥐어 짜인 심장이 거칠게 피를 새로운 뿜어냈다.
동맥을 타고 신선한 피가 순식간에 좌악 퍼졌다.
덕분에 몸속에 남아있던 독기가 중화되었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거짓말처럼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어아아아 아, 안 돼!”
김혜옥의 거대한 주먹이 내 갈비뼈를 분쇄하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폐를 쥐어짜듯 소리를 내질렀다.
-멈칫!
동시에 엄청난 기운을 품고 날아오던 김혜옥의 주먹이 뚝 멎었다.
“싸부님?”
“그, 그래 혜옥아. 나 아직 안 죽었….”
“으아아앙! 싸부니이이임!”
김혜옥의 거대한 몸이 내게 안겨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내 가슴팍을 후두둑 적셨다.
******
“그래…. 다들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김혜옥을 간신히 떼어내자, 비로소 나는 양소혜와 양소룡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샤네가에게 험한 꼴을 당한 탓인지 둘의 옷은 싯누런 고름과 끈적한 점액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두 명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용호랑 혜옥이 덕분이지…. 고마워. 항상 신세만 지네.”
양소혜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얼굴엔 미안함, 기쁨, 창피함, 굴욕 등등이 뒤얽힌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형님이 그 괴물을 해치우셨군요! 정말.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형님!”
반면, 양소룡은 그저 해맑은 표정이었다.
단순히 자신들을 궁지에 빠뜨린 괴물을 내가 해치웠다는 사실이 그리도 기꺼운 모양인지.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선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괜히 ‘얼굴 천재’가 아니신 분이죠. 정말이지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실력도. 인품도 출중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엥?
양소룡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회피하려던 순간, 짜증나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의 목소리에 황급히 홱 고개를 돌려보니….
“아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저 같은 놈까지 구해주시다니….”
양소룡의 뒤편에 한세훈이 비굴한 표정으로 아부하듯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쪽도 놈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건가?”
“예? 예예! 꼼짝없이 그 못생긴 놈의 장난감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세훈은 계속해서 비굴한 미소를 띤 채 내게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샤네가의 뱃속엔 양소룡과 양소혜 외에도 한세훈이라는 부록(?)까지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혜옥이에게 점액 덩어리들을 ‘모두’ 챙기라고 시켰었지.
“뭐….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고 목숨은 목숨이니까.”
“역시 대범하셔라!”
솔직히 의외였다.
첫 번째 단계에서 한세훈에게 목검을 쥐어줬던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보호자도 잃어버린 마당이었으니, 2단계에서 몬스터들에게 한번 제대로 당해보라는 심산이었는데….
…잠깐만? 보호자도 없이 2단계를 통과했다고? 한세훈 따위가?
“헌데. 제법 감춰둔 실력이 있었나 보지? 보호자도 없이 지난 단계를 통과하다니 말이야.”
“아하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였죠.”
『거짓』
혹시나 해서 화안금정을 발동시켜 보니.
역시나 한세훈의 머리에 떠오른 글자는 거짓이었다.
그럼 그렇지. 뭔가 또 수작을 부렸었나 보군.
“그래? 운이 상당히 좋았나봐? 그 날쌘 바분 놈들에게 살아남다니 말이야.”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대는 한세훈에게 나는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놈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수험생에게 들러붙어 그들을 이용해 먹었겠지.
“운으로 통과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팔짱을 낀 채, 나와 한세훈을 바라보던 양소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한세훈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엔 경멸과 의심의 감정이 가득했다.
그녀 역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쪽이랑 같이 있었던 그 꺽다리 여자는 어디 갔지?”
양소혜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한세훈에게 나무 창을 겨눴다.
뭐라고? 꺽다리 여자?
“아, 아하하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줄곧 혼자서 그 수라장을….”
『거짓』
“거짓말! 입구에서부터 그 여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부하고 있었잖아.”
『진실』
한세훈과 양소혜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는 확연히 대비되고 있었다.
한세훈을 쏘아보는 양소혜의 눈빛은 이제 확연한 적의가 되어있었다.
내가 아는 양소혜는 단순히 ‘남에게 빌붙었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저렇게 적의를 표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숨겨진 사실이 있나 본데?
“아, 아니 물론 그녀랑 이야기는 나눴습니다만. 저흰 아무런 사이도….”
한세훈의 태도 또한 심상치 않았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내뱉으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척 보기에도 수상쩍어 보였다.
“용호. 이 자식 믿지 마. 아까 그 괴물에게도 존댓말 하고 있었어.”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상황은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한세훈이 마족이랑 내통했다니…. 최고잖아?
“서, 설용호 헌터님? 아닙니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다 설명할 수 있다구요!”
한세훈에게 정신 나간 사람 마냥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가자,
위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놈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물론. 나도 그쪽을 믿고는 싶어.”
-콰아아악!
한세훈에게 다가간 나는 놈의 손을 꽈악 붙잡았다.
그리곤 바닥에 굴러다니던 포션 병을 한세훈의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줬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무조건 믿기만 할 수는 없잖아? 안전장치는 있어야지.”
“아, 안전장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신지….”
얼떨결에 포션병을 손에 쥐게 된 한세훈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동그랗게 뜬 눈이 불안하게 바르르 떨렸다. 호흡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아, 걱정하지 마.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자, 첫 번째 질문. 그 여자는 누구일까요?”
“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저는 정말 아무것도….”
『거짓』
-빠가가각!
어마어마한 악력이 발휘되자 한세훈의 손에서 포션병이 쨍그랑 깨졌다.
깨진 포션병이 놈의 손바닥을 갈가리 찢었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잘려나간 손가락이 후두둑 땅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이런. 내 말이 우스웠나봐?”
“흐어어억. 허억! 헉!”
한세훈의 역동적인 반응을 잠시 즐긴 뒤.
나는 포인트 숍에서 포션을 하나 구입하여 놈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주면, 이 포션으로 치료해줄 수도 있어. 어때?”
“끄흐흐흐. 마, 말하겠습니다.”
지금의 한세훈에겐 예전 같은 독기도 드높은 자존심도 없었다.
손가락 몇 개가 잘려나가는 정도의 고문만으로도 놈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놈의 입에서 그 ‘꺽다리’ 여자에 대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그렇게 된 겁니다. 저는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다구요. 으흐흑”
공포에 잠식된 한세훈은 시키지도 않은 것들까지 모조리 털어 놓았다
‘꺽다리’ 여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토해낸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포션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한세훈을 바라본 양소혜의 표정은 이제 적의가 아니라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경멸의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인 것 같네.”
한세훈과 동행한 꺽다리 여자의 정체는 바로, 샤네가가 빙의된 수험생이었다.
2단계에서 샤네가의 실력을 눈여겨본 그는 평소처럼 잘생긴 얼굴을 앞세워 놈에게 들러붙었고 샤네가의 도움으로 위업까지 달성해가며 2단계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럼 가산점도 모조리 털렸단 소린가?”
“흐흑. 예…. 그분. 아니 그놈이 그렇게 시켜서….”
그리고 문제의 3단계에서 한세훈은 샤네가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가산점을 모조리 털어 모종의 아이템을 구입했다. 그것을 구입한 순간 샤네가는 본체를 드러내 강림할 수 있었다.
“포인트 숍에서 무엇을 구입했는 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모, 모르겠습니다. 놈이 시키는 대로 마지막 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물건을 구입했는데…. 이름을 확인할 새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지 뭡니까요.”
고문을 겪은 뒤. 한세훈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는 계속해서 진실이었다.
포인트 숍에 샤네가의 본체를 강림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 올라와 있었다니….
포인트 숍에 아이템을 올릴 수 있는 이들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성좌들 밖에 없었다.
“…설마. 그놈들이 이번엔 마족들 쪽에 붙은 건가?”
성좌들이라고 모두 인간의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불길하게 타오르는 다섯 성좌들은 대놓고 인간들과 적대하며, 사교도들을 이끌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쩐지 놈들 치곤 조용하다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