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쿠웅
김혜옥이 퀸 바분이 거대한 몸뚱이에서 내려왔다.
그때까지 부질없이 버둥거리던 놈의 육중한 손이 힘없이 떨궈지고, 빛을 잃어버린 커다란 눈이 허옇게 까뒤집어졌다.
-띠릭
퀸 바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자.
귀에 익은 소리와 함께 시스템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정신없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위업 [어떻게 잡았니?] 달성!」
「칭호 [여왕의 통치를 끝낸 자]가 수여됩니다.」
「특성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5]」
「숨겨진 조건을 충족하여 가산점을 지급합니다. [+100]」
“역시 위업을 숨겨 놨었군.”
예상대로였다.
퀸 바분을 직접 쓰러뜨린 것은 김혜옥이었지만,
지난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위업은 동시에 달성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최초 위업 달성 보상!」
「최초로 위업을 획득하여,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적의 파편』」
시스템 메시지는 계속해서 흐뭇한 소식을 알렸다.
튜토리얼에서 퀸 바분쯤 되는 괴물을 쓰러뜨렸기 때문인지,
업적 또한 단순히 그냥 달성된 것이 아닌 ‘최초’라는 타이틀이 부차적으로 붙어있었다.
-철그렁!
최초 위업을 달성했으니, 달콤한 추가보상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
영롱한 빛무리와 함께, 나와 김혜옥의 눈 앞에 화려하게 장식된 보상 상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잠깐만. 보상이 뭐라고? 기적의 파편?
“적이냣!”
-빠각!
갑자기 나타난 상자의 모습에 놀라서일까? 김혜옥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단단한 보상 상자가 과자처럼 오도독 까부숴지며 주먹만 한 크기의 선홍빛 보석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시스템 메시지에 나왔잖니. 그게 추가 보상이라는 거야. 아이템형 보상은 이런식으로 상자형태로 튀어나오곤 해.”
“…그래요?”
김혜옥은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허리를 굽혀 굴러나온 보석을 집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잠시 쓰게 웃은 뒤. 나는 보상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기적의 파편』
등급 : 전설
효과 : 사용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입니다.
“와아! 싸부님! 이게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이라는데요? 이것만 있으면….”
“뭔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만, 애석하게도 이건 그렇게 거창한 소원까진 못 들어줘.”
보상으로 제공된 『기적의 파편』은 내가 익히 알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시스템창의 설명에 의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창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에는 명확한 한도가 있었다.
“네에?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도 안되는 거에요?”
“…그래. 이거 은근히 제약이 까다롭거든.”
“아니, 소원을 들어주는데 제약까지 있어요?”
“응. 이것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이란 ‘남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의 소원 뿐이야.”
그랬다.
기적의 파편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은 ‘사용자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소원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이런저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회귀 전에도 이 기적의 파편으로 재미를 봤다는 사례는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재밌는 것들을 준비해 뒀다더니, 하필 이렇게 변태 같은 물건을 보상이랍시고 주다니.
성좌라는 족속들의 악취미는 아무튼 알아줘야한다니까.
「축하합니다. 2단계 시험 합격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성좌들이 안배해둔 머리 아픈 보상의 활용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으려니.
시스템 창의 메시지와 함께 눈부신 빛무리가 내 몸 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3층으로 이동합니다.」
*****
눈앞을 가렸던 빛무리가 사라지자. 3층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폐허가 눈에 들어왔다.
2단계 시험에서 살아남은 수험생들은 폐허의 넓은 광장에 제멋대로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싸부님 어째서 여긴 무섭게 음침….”
“형니임! 혜옥아!”
음침한 폐허의 정경에 김혜옥이 불만을 표하려던 찰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수험생 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역시 형님이세요! 두 번째 시험도 가볍게 통과하실 줄 믿고 있었어요!”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달려든 수험생의 정체는 양소룡이었다.
차려입은 검은무복 이곳저곳이 찢어진 추레한 몰골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특유의 해맑은 쾌활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용아아앗! 너도 거뜬히 통과했구낫!”
“그래! 그깟 원숭이쯤은 가볍게…. 갸아아악!”
-우두두둑!
김혜옥 역시 양소룡과의 재회가 기꺼운 듯 양팔을 활짝 벌린 채. 그와의 재회를 만끽했다.
그녀의 우람한 팔이 양소룡의 호리호리한 몸을 꼬옥 껴안자, 뼈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다시 못 만날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데에!”
“흐어어억! 이, 이렇게 거칠게 껴안으면 진짜로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
…저게 걱정한 사람의 태도야?
양소룡의 허리를 꽈드득 껴안은 김혜옥의 양팔에 나무뿌리처럼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어찌나 무식하게 끌어안았는지, 그녀의 품에 안긴 양소룡의 낯빛이 점점 파리해졌다.
“…용호도 무사했네. 다행이다.”
두 명의 감동적인(?) 재회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양소혜가 말을 걸어왔다.
내게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녀는 평평한 자리를 찾아 철푸덕 드러누웠다.
“뭐. 나야 편했지. 혜옥이가 워낙 잘 성장해줬으니까.”
“…용이 저 자식을 더 화끈하게 수련시켜 놓을 걸 그랬어.”
양소룡이 김혜옥에게 자신 있게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양소혜는 그녀답지 않게. 화난 듯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양소룡을 찌릿 노려보았다.
“흐어어어어.”
김혜옥에게서 풀려난 양소룡의 처참한 몰골은 마치 명절날 친척 어린애들에게 시달린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비척거리며 다가온 그는 자신의 사촌 누나와 똑같은 포즈로 내 옆에 드러누웠다.
“싸부님? 갑자기 뭐 글자들이 주르륵 뜨는데요? …상태창? 엄머!”
아무래도 상태창이 해금된 모양이었다.
‘상태창’이란 단어를 중얼거린 김혜옥의 눈이 놀라움을 담고 동그래졌다.
“그래, 그게 헌터의 상징 상태창이란다. 그리고 따라 해봐. 포인트 숍 오픈!”
“포인트 숍 오픈…. 우와아앗!”
“거기서 그동안 얻었던 가산점을 써먹을 수 있으니까. 즐거운 쇼핑시간을 갖도록 해.”
난생 처음해보는 경험 탓인지, 김혜옥은 호들갑스러운 탄성을 내질렀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정신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녀가 그렇게 감상에 빠진동안, 나 역시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오픈.”
LV. 30 설용호
근력 565 민첩 565
재주 565 체력 565
행운 25 인지 25
내력 565 매력 565
-외모지상주의
-파천 복룡창
-일기당천
-화안금정
-낙오자들의 진혼곡
-깔맞춤
그동안 게이트에서 사냥다운 사냥을 하지 못했기에, 현재 내 레벨은 여전히 30에 멈춰있었다.
하지만, 튜토리얼 타워에서 위업을 두 개나 달성했기에 특성 포인트는 무려 10개나 쌓여있는 상태였다.
“특성 트리 오픈.”
특성 포인트에 생각이 미친 나는 오랜만에 특성 트리를 열었다.
보랏빛 별무리가 영롱히 반짝이는 특성 트리를 흐뭇하게 바라본 뒤. 나는 그동안 얻었던 특성 포인트를 모조리 털어 넣었다.
물론, 가장 먼저 할당한 특성은 1층에서 위업 보상으로 얻었던 『위치사수』였다.
『위치사수』
등급 : 고유
효과 : 10초 이상 가만히 서 있으면, 자신과 30미터 내의 파티원들의 모든 능력치가 파티에 속한 인원수에 비례하여 증가합니다. (한 명당 5% 최대 25%)
*이 효과는 움직이기 시작한 후 5초 동안 지속됩니다.
『위치사수』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10초 이상,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파티원들의 인원수에 비례하여 능력치를 최대 25%씩이나 증폭시켜주는 효과는 엄청난 장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기당천과 깔맞춤이라는 능력치 증폭 스킬을 보유한 상태에서 위치사수까지 더해진다면….
-꿀꺽.
과연 성좌들의 말대로 튜토리얼 타워에 준비된 보상은 제법 짭짤할 수준이었다.
앞으로 얻어낼 보상에 생각이 미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속에서 탐욕이라는 놈이 꿈틀거리자, 시야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
「지금부터 튜토리얼 3단계 시험을 개시합니다.」
「수험생 여러분들은 미로를 탈출해, 다음 층으로 통하는 통로를 찾으십시오.」
「보호자 여러분들은 위험으로부터 수험생들을 보호하십시오.」
수험생들이 새로 얻은 상태창과 포인트숍을 구경하는 동안.
제법 길게 주어졌던 휴식시간이 끝났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출력되며, 마침내 3단계 시험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들의 수험표를 탈취할 때마다. 가산점이 추가로 적용됩니다.」
-가산점! 걸어 다니는 가산점이다!
포인트 숍의 달달한 맛을 직접 맛봐서 일까?
수험생들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탐욕이 진득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으흐하하하! 가산점! 가산점을 내놔라!
초입부터 가산점에 눈이 먼 수험생들이 마구잡이로 싸워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리고….
“싸부님! 저쪽이에요! 저기서 가산점의 냄새가 나요!”
“혜옥아 잠깐….”
-쿠콰아앙!
포인트 상점의 달달한 맛을 본 김혜옥 역시 가산점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벌건 눈이 귀화로 붉게 달아올랐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미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뻐어억!
“케흑!”
피가 묻어 검붉게 번들거리는 나무 창이 수험생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창에 실린 힘이 어찌나 무식했는지, 불운한 수험생의 허리가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움푹 들어간 명치를 움켜쥔 채, 쓰러진 그의 눈이 허옇게 까뒤집혔다.
“가산점! 달콤한 가산점!”
기절한 수험생의 등을 살포시 밟은 김혜옥은 그의 목덜미에서 우두둑 수험표를 뜯어냈다.
새빨간 혀를 길게 내밀어 수험표를 핥는 그녀의 모습에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박력이 느껴졌다.
[역시 천상 무골이로다. 창을 쥔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렇게 뛰어난 솜씨라니!]
‘저걸 창술이라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가산점을 이용해 능력치를 상승시킨 김혜옥은 실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나무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것에 얻어맞은 수험생들이 픽픽 나가떨어졌다.
…저 정도라면 내구도도 얼마 닳지 않겠네.
-끄아아악!
“가산점?”
갑자기 울려 퍼진 비명에 김혜옥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혀를 길게 빼 문 그녀의 눈에서 새빨간 귀화가 흉흉하게 불타올랐다.
-으아아악! 누니임!
“용이? 싸부님! 용이 비명소리 아니에요?”
…양소룡?
다시 들린 비명은 낯익은 이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붉은 귀화가 사라진 김혜옥의 눈에 경악이 깃들더니,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