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파츠츠츠츠
익숙한 소리와 함께, 시야를 가득 메웠던 빛무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사라진 시야 속으로 드넓은 초원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앗 신기해요! 여기 진짜 대박이야!”
눈앞에 탁 트인 초원이 보이자, 김혜옥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2층의 풍경이 신기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어린애다운 순수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에 피떡이 된 사람이 들려 있지만 않았다면 더 순수하게 보였겠지만 말이지.
“튜토리얼 타워가 신비한 장소로 가득 찬 곳이긴 한데…. 혜옥아? 그 사람은 누구니?”
“아. 얘요? 다짜고짜 ‘몬스터닷!’ 하고 달려들길래, ‘조금’ 만져줬어요.”
김혜옥은 멋쩍게 머리를 긁곤 혀를 내밀었다.
어디 만화에서나 볼법한 귀여운 감정표현을 나타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외모와 날름거리는 혀는 무서운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그녀의 행동은 마오리족의 노련한 전사가 적을 위협하는 듯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게 ‘조금’이라고?”
‘조금’이라고 보기엔 구강구조와 골격구조가 이미 인간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에헤헤. 너무 무서워서 쪼오끔 과하게 만져준 것 같긴 해요. 그래두 정당방위였다구요.”
“크흠. 정당방위 운운하기엔 조금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다만….”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멋쩍게 웃은 김혜옥은 얼굴을 벅벅 긁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손에 묻어있던 시뻘건 피가 그녀의 얼굴 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혜옥은 점점 얼굴에 문양을 그려 넣은 고대 야만용사 같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것보다…. 이 양반 보호자는 누구길래. 자기 담당 수험생이 이 지경이 되도록 나오질 않았는지 모르겠네.”
“나야.”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희생자의 얼굴을 살펴보며,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낯익은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야, 양소혜?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어머? 그때 우리 공방 찾아왔었던 언니네요?”
놀랍게도 김혜옥의 손에 피떡이 되어버린 희생자의 보호자는 바로, 양소혜였다.
여전히 검은 무복에 긴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으음…. 우리 용이 악쓰는 소리가 들려서 와봤더니….”
양소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김혜옥을 바라보았다.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그녀답게 화를 내야 할지, 반가워해야 할지 헷갈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요, 용이라고?”
“으응. 지금 저기 들려 있는 애가. 내 사촌 동생 소룡이야.”
“네? 흐엑? 죄, 죄송해요. 도, 동생분인 줄 몰랐어요.”
김혜옥은 대단히 당황한 듯 허둥거리더니, 다급히 축 늘어진 양소룡의 몸을 바닥에 뉘었다.
“어떡해. 어떡해!”
-쿠웅! 쿵! 쿵!
김혜옥이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쿵쿵 울렸다.
덕분에 곱게 눕혀진 양소룡의 몸이 요란스레 들썩거렸다.
“그, 그만. 괘, 괜찮아. 후우. 어쩔 수 없지. 가산점을 여기서 좀 써야겠네.”
나직하게 한숨을 쉰 양소혜는 김혜옥을 진정시킨 뒤. 허공에 손짓하기 시작했다.
“됐다. 이거라면 충분할 것 같네.”
허공을 손짓하던 양소혜의 손엔 어느새 붉은빛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뭐야. 가산점을 ‘사용’한다고?
“가산점을 사용한다고?”
“응. 시스템 메시지로 설명해주던데? 포인트샵이랑 사용법이 비슷하대.”
시스템 메시지로 그런 걸 알려줬다고?
양소혜가 일러준 대로 시스템 메시창을 위쪽으로 올려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산점 상점에 관한 설명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내가 허공에 손짓하는 모습을 본 양소혜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붉은빛 액체를 기절한 양소룡의 몸에 꼴꼴 부어대기 시작했다.
“흐허허헉!”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양소룡의 몸이 마치 갓 잡은 잉어처럼 펄떡거렸다.
시원하게 비명을 내지른 그는 그 반동을 이용해 벌떡 일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처가 말끔히 가신 그의 앳된 얼굴은 확실히 양소혜와 많이 닮아 있었다.
“죄, 죄송해요. 제, 제가 너무 성급하게 그만….”
그렇게 양소룡이 정신을 차리자, 김혜옥은 허리를 숙여가며 그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이, 이 사악한 몬스터놈 이건 또 무슨 꿍꿍이냣!”
하지만 당연히 김혜옥의 사과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난데없이 거구의 여인이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본 양소룡은 겁에질린 햄스터처럼 짜랑짜랑한 고함을 내질렀다.
“그만해. 용아. 누나가 뭐라 했었지? 여기선 아무한테나 무례하게 덤벼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누, 누님. 하,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쪽은 모….”
“어허! 씁!”
눈을 희번뜩 치켜뜬 양소혜가 주먹을 치켜들자, 양소룡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리곤 어딘지 못 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나, 나도 미안….”
“씁!”
“저,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양소혜가 ‘예절’을 가르치고 있어?
세상에. ‘그’ 양소혜가 예절을 깨닫다니. 가슴이 다 웅장해질 지경이네.
*****
「앞으로 1시간 뒤, 2단계 시험이 시작됩니다.」
이번에도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용이를 데리고 튜토리얼 타워를 조사하러 온 거야. 용호도 그때 그 아이를 데리고 왔나보네?”
양소혜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단순했다.
남부연합의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기에, 조사차 수험생인 자신의 사촌 동생과 함께 들른 것이었다.
“자, 잠깐만요. 용호라구요? 맙소사! 그, 그럼 이, 이분이 설마. 설용호 헌터님?!”
양소혜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오자, 양소룡은 뒤늦게 나를 알아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대단히 감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습기가 가물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감격의 눈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온 양소룡은 곧이어….
“흐으읍! 흐읍!”
애견파크에 처음 온 강아지처럼 별안간 요란하게 냄새를 맡아대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유형의 괴인이여?
“역시, 여억시. 설용호 헌터님이 맞네요. 흐헤헤헤.”
열심히 냄새를 맡아대던 양소룡의 표정이 헤벌쭉하니 풀려버렸다.
무슨 정신 계통 마약이라도 들이킨 듯 발그스름해진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용아. 누님이 뭐랬지? 함부로 남의 냄새 맡지 말랬잖아.”
“하, 하지만 누님! 진짜 설용호 헌터님이잖아요! 그동안 희미한 냄새만 맡았는데! 진짜 설용호 헌터님이에요!”
…남부연합이 터를 좀 잘못된 곳에 잡았나? 아니. 걔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잖아?
양소혜에 이어, 양소룡이 보여주는 새로운 유형의 기행에 머리가 딱 아파졌다.
“미안해. 용호. 보다시피 얘가 좀…. 후각이 예민해서.”
“예! 예! 남부연합에서 냄새 제일 잘 맡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저거든요! 그 유명한 남부연합의 ‘똥강아지’ 양소룡이 바로 저에요!”
“…별명이 똥강아지라구요?”
“말씀 편히 하세요! 전 누구와는 다르게 아직 젊…! 아흑!”
양소룡은 정말이지 ‘똥강아지’라는 별명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냄새를 잘 맡는 것은 물론이요. 시골에서 기르는 어린 강아지마냥 낯선 사람에게 붙임성 좋게 들러붙는 것이 딱 똥강아지다웠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남발하며 까불어대는 모습도 딱 강아지 같고 말이야.
“아으으. 아!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형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세….”
“형님! 저 아직 어리다니까요? 말씀 편히 하세요!”
“그래 마음대로 해라.”
김혜옥의 손에 죽은 듯 들려있을 때가 차라리 더 나을 지경이었다.
본격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한 양소룡은 계속해서 들러붙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 제가요. 원래는 정보 쪽에서 일하려고 했는데, 형님의 무용담을 들은 뒤로는….”
양소룡은 정신없이 내게 들러 붙어대며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아댔다.
강아지처럼 소란스러운 그의 모습에 어쩐지 내 에너지가 강제로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혜옥아? 아까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얘좀 상대해 줄래?”
“…상대요? 싸부님 그건 무슨….”
“혜옥? 너 이름이 혜옥이였어? 아까는 내가 미안해. 아참! 말 놔도 괜찮을까? 내 나이는….”
양소룡의 친화력은 보기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김혜옥과 마주한 그는 조금 전의 일 따윈 그새 잊어버렸는지, 새로운 친구와 마주한 강아지처럼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튜토리얼 타워를 조사하러 왔다고?”
“으응. 우리 남부연합에도 ‘신탁’이 내려왔거든.”
신탁을 언급한 양소혜는 그 뒤로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안해. 신탁 내용은 아무리 용호라고 해도 알려줄 수 없어….”
성좌들이 남부연합에도 신탁을 내렸단 말이지….
단순히 새로운 게이트에 대비하는 거라고 보기엔 너무 판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닐까?
남부연합 쪽에도 신탁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어째선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
「앞으로 5분 뒤, 2단계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얼마간 양소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어느새 시험이 5분 남았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혜옥아. 슬슬 준비를….”
-꽈드드득!
뭔가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양소룡과 김혜옥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는 당연히, 양소룡의 척추 쪽에서 들려왔다.
“용아!”
“혜옥아!”
대충 나이가 비슷한 모양인지, 둘은 어느새 말을 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왜인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용이 너도 꼭 헌터가 되길 바라! 힘내!”
-파앙! 팡! 팡!
“크헉! 혜, 혜옥이 너도 히, 힘내!”
생글생글 웃는 김혜옥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양소룡의 등판을 연거푸 강타할 때마다.
양소룡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붙임성 좋게 생글거리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까득 깨문 것으로 봐선, 김혜옥의 ‘격려’가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언니도 힘내시구요!”
양소룡을 놓아준 김혜옥은 이번엔 양소혜를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해맑게 웃는 김혜옥이 양소혜를 향해 다가갈 때마다.
어째선지 양소혜는 살짝 살짝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으, 으응. 근데 나, 난 괜찮.”
“아이이이! 부끄러워하지 말기이!”
-우두두둑!
“허흑!”
벼락처럼 달려든 김혜옥은 양소혜를 꼬옥 껴안았다.
꼭 껴안은 김혜옥의 팔에 힘줄이 돋은 순간, 양소혜의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김혜옥의 품에 매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양소혜의 순간적으로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지금부터 튜토리얼 2단계 시험을 개시합니다.」
「수험생 여러분들께선 2시간 동안 몬스터들로부터 주어진 정수를 보호하십시오. 5/5」
「보호자 여러분들께선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파트너를 보호하십시오.」
양소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간 그 순간, 시험이 시작되었다.
2단계 시험은 몬스터를 사냥해서 정수를 구하면 그만…. 잠깐?
“정수를 ‘보호’하라고?”
“으응. 나도 그렇게 읽었어. 정수를 보호하라는데?”
2단계 시험은 먼젓번과 얼추 비슷한 내용이었던 1단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수를 ‘보호’하라고? 그게 무슨 헛소리야?
“싸부님…. 여기 이런 게….”
김혜옥과 양소룡의 목에 걸린 수험표엔 어느새 동글동글한 구슬 다섯 개가 달려있었다.
정수를 저런 식으로 미리 제공해준다니? 무엇으로부터 저걸 지키라는 말….
《키키키킥!》
변해버린 시험내용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숲속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