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가, 가산점이라고? 튜토리얼에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수험생이 도대체 어떻게 보호자를 쓰러뜨리라는 소리야!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막 진열대로 향하려던 수험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산점’이란 너무나 낯선 단어와 그것을 획득하는 조건에 다들 혼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쯔걱!
그렇게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는 우왕좌왕하는 사이….
무언가를 둔중하게 가격한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사냥의 시간이다!”
피거품을 뿜은 채, 날아오른 불운한 헌터의 육신과 누군가의 사나운 외침을 신호로 삼아.
사방에서 무차별적인 난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싸, 싸부님….”
주먹을 꽈드득 말아쥐고 한세훈의 행방을 추적하려던 찰나.
어쩐지 떨리는 목소리의 김혜옥이 나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덜덜
“…혜옥아?”
내 팔을 붙잡은 김혜옥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녀의 거대한 몸 전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지, 진짜로 사, 사람이랑 싸운다고 생각하니. 너, 너무 무서워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혜옥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끄응 역시 덩치는 이렇게 큼지막해도 아직 어린애는 어린애라는 건가….
“처음엔 다 그런 법이야. 그래도 그 나약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헌터가 되지 못해.”
“그, 그래도. 너무 무서워요. 이 주먹으로 사람을 패면 어떻게 되, 될지. 주, 죽으면 어떡해요!”
단순히 싸우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쪽이 무서운 거였냐?
…뭐, 생각해보면 김혜옥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했다.
각성조차 하지 않은 몸으로도 콘크리트를 과자처럼 부수는 김혜옥인데.
그 엄청난 괴력을 사람에게 휘두른다는 게 무서울 수도 있지….
“사람의 몸이라는 게 네 생각보다 더 튼튼하거든? 힘껏 후려쳐봤자. 어디 좀 부러지고 파열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김혜옥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고 있으려니.
갑자기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혜옥의 시선이 옆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찾았다.”
고개를 숙인 김혜옥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드리워진 음영 속에서 새하얀 이가 초승달 모양으로 섬뜩하게 떠올랐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미소에서 비롯된 섬뜩한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차, 찾아?”
김혜옥의 기백에 압도당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하하하. 형님! 뒤통수만 후리면 가산점이 그냥 들어오겠는데요?
-크흐흐흐. 우리 고객님께서 편히 점수 습득하시게 이쁘게 요리해놓자고.
쫙 째진 뱁새눈이 인상적인 남자와 온몸에 화려한 잉어 문신을 새긴 빡빡머리 사내.
예전에 김혜연의 공방에 쳐들어 와 그녀들에게 수난을 안겨줬던 장본인들이었다.
노량진에서 쫓아낸 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군.
“찾았다! 언니의 원수우!”
바로 그 순간, 김혜옥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포효가 터졌다.
넓은 공간 전체를 우렁우렁 울리는 엄청난 고함에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곤 볼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백이었다.
“크르르르르.”
뱁새눈과 대머리를 바라보는 김혜옥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범상치 않은 살기가 그녀의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번들거렸다.
혀를 길게 빼물어 날름거리는 김혜옥의 얼굴은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아니. 얘, 얘가 갑자기 왜 저래요? 혹시 무슨 마공이라도 가르치신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게다가 혜옥이에게 수련법을 알려준 것은 다름 아닌 네놈이지 않더냐.]
혹시나 위철용이 김혜옥에게 마공을 가르쳐준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그의 말대로 그녀에게 수련법들을 직접 가르쳐준 것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우리가 알려준 것은 그저, 몸을 건강하게 단련하는 단련법이 전부였다.
그렇다는 건…. 맙소사! 단순한 살기가 저 정도라고?
“…언니의 원수…. 찢고 부순다아아앗!”
-푸콰아앙!
광포한 괴성을 내지른 김혜옥은 뱁새눈과 빡빡머리를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뭐, 뭐야? 모, 몬스터?!”
엉겁결에 김혜옥과 정면으로 마주한 뱁새눈의 얼굴에 멍한 의문이 어린 순간!
“찢고! 부순다!”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린 김혜옥의 근육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손을 요렇게 쫙 편 채로 힘껏 뱁새눈의 따귀를 힘껏 후려갈겼다.
-꾸과아아앙!
분명히 따귀를 때렸는데. 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터졌다.
김혜옥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뱁새눈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각도로 돌아갔다.
기괴한 방향으로 돌아간 입에선 싯누런 이빨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카, 카하학!”
고개가 해괴한 방향으로 돌아간 뱁새눈의 몸이 부웅 떠오르더니, 충격을 못 이긴 몸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찢고! 부순다앗!”
뱁새눈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포효를 내지른 김혜옥은 허공에서 팽그르르 돌고 있는 뱁새눈의 몸에 힘껏 발차기를 날렸다.
어디서 그런 유연성을 발휘한 건지,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튼실한 그녀의 다리가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쭈욱 올라갔다.
-콰앙!
김혜옥의 발등이 뱁새눈의 몸에 닿은 순간, 로켓이 발사되는 듯한 폭음이 요란하게 터졌다.
무식한 충격량이 놈의 몸을 강타하자, 뱁새눈의 신형이 마치 발사된 로켓처럼 그대로 하늘로 쏘아졌다.
“너희들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천천히 다리를 내리는 김혜옥의 눈에선 시뻘건 귀화가 불꽃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지간한 몬스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폭한 살기가 그녀의 몸 전체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언니가 며칠을 울면서 밤을 지새웠는지 알아?!”
그동안 쌓였던 한을 토해내는 김혜옥의 목소리는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
뱁새눈의 몸이 다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자, 김혜옥은 그 찰나의 순간 놈의 다리를 잡아챘다.
-콰앙! 콰앙! 꽈아아앙!
김혜옥에 의해 뱁새눈의 몸이 바닥에 거칠게 부딪힐 때마다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폭음이 쾅쾅 터졌다.
“혀, 형님! 이, 이 괴물이 감힛!”
묘사는 길었지만, 김혜옥이 뱁새눈을 덮친 것은 찰나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빡빡머리는 요란한 고함을 지르며 김혜옥을 향해 덤벼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빡빡머리의 주먹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밥도! 죽도! 아무것도! 못 먹고 울면서 밤을 지새운 게 며칠인지 알아?!”
-부와아앙!
김혜옥의 오른 다리가 또 한 번 부드럽게 머리 위까지 솟구쳤다.
그녀는 그렇게 치켜든 다리를 그대로 체중을 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꾸과아아앙!
무식한 양의 운동 에너지가 바닥을 강타하자, 대리석 바닥이 쩌적 갈라졌다.
김혜옥은 부서진 대리석 파편들을 발끝으로 차올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빡빡머리에게 쏘아냈다.
“크으윽! 이런 잔재주를!”
-빠각! 빠각! 빠가가각!
빡빡머리 쪽이 아무래도 실력이 좀 더 뛰어난 모양이었다.
그는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주먹을 휘둘러 산탄처럼 쏘아진 파편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 언니의 작품들을 비웃고 꿈을 짓밟았지….”
하지만, 대리석 파편들은 그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파편들이 바스라지며 시야를 잠깐 가린 사이, 김혜옥은 빡빡머리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빡빡머리의 등 뒤에서 김혜옥의 새하얀 미소가 섬뜩하게 떠올랐다.
“어, 어느새…! 흐억?”
김혜옥의 아나콘다처럼 두꺼운 팔이 빡빡머리의 몸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빡빡머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리 언니를 괴롭힌 놈들은 용서 못한다아아아!”
-우두두두둑!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김혜옥의 두 팔에 억센 나무뿌리 같은 힘줄이 두두둑 돋아났다.
빡빡머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싶더니,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놈은 그렇게 혀를 길게 빼어 문 채로 기절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수련법을 알려주신 거죠?”
[크흠. 그저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단련법이었거늘.]
“저건 건강해진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인간 형상의 흉기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쟤 아직 각성조차 하지 않았다구요.”
[그, 그것은 혜옥이의 무골이 워낙 출중해서….]
무골이라는 놈이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물학의 새 지평을 열어버린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리 저 양아치 놈들이 레벨업을 게을리 한 헌터라고 해도 그렇지.
각성조차 하지 않은 김혜옥은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다.
“꺼으으으.”
“끄헉. 끄허허허헉.”
질기디 질긴 것이 헌터의 목숨이라 죽지는 않았지만.
뱁새눈과 빡빡머리는 당분간 재기가 불가능할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김혜옥은 신음을 흘리는 놈들에게 다가가 수험표를 후두둑 뜯어버렸다.
“어휴 개운해!”
피에 절은 수험표를 갈무리한 김혜옥은 세상 다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보아하니, 조금 전 잠깐 갈등했던 것은 양아치 놈들을 응징하며 말끔히 털어버린 듯 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팰 수 있니 뭐니 푸념하던 소녀는 어디에 가버린 걸까.
“거, 거봐. 할 수 있잖아? 충분히 익숙해지면….”
“어?! 저기 저놈! 그때 우리 언니한테 돈 떼먹고 달아난 놈이에요!”
-콰콰쾅!
또다른 원수를 발견한 김혜옥은 새로운 희생양을 향해 도약했다.
새하얀 미소가 귀까지 걸린 그녀의 얼굴에선 시뻘건 귀화 두 개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도, 도망쳐! 모, 몬스터다! 히든 몬스터가 나타났다앗!
-카하하학! 사, 살려줘!
어떤 인생을 살아 왔길래, 이 풍진 세상에 원한을 그리도 많이 쌓아온 건지.
김혜옥은 계속해서 과거 노량진 시절의 ‘원수’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허, 헌터님! 어, 어디가!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저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노량진에서 엮일 만한 인물 수준이 다 그렇듯, 그들이 고용한 ‘보호자’들 역시 그리 높은 레벨의 헌터가 아니었다.
덕분에 김혜옥은 누구의 방해조차 받지 않은 채로, 자신의 묵은 원한을 풀어낼 수 있었다.
“후욱, 후욱 박살…. 파괴…. 고통! 어라? 싸부님?”
김혜옥이 열심히 날뛰어준 덕에 주변의 이목이 끌리기 시작하자.
나는 정신없이 날뛰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시뻘건 불 구슬 같은 눈 두 개가 내게 향한 순간, 광폭한 광기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원한은 그만하면 된 것 같으니까. 본격적으로 시험 과제를 해결하러 가보자구. 너 이대로 가면 탈락이다?”
도합 여섯 명의 보호자와 여덟 명의 수험생을 박살내는데 성공했지만, 김혜옥은 여전히 어떠한 무기도 챙기지 않은 상태였다.
김혜옥을 진정시킨 나는 본격적으로 무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워낙 난폭하게 날뛰어준 덕분인지, 다른 수험생들은 김혜옥을 보고 슬금슬금 피해갔다.
덕분에 첫 번째 진열대의 꼭대기층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쾌적한 여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렇게 종료인 건가요? 싸부님?”
진열대의 꼭대기에 꽂혀있는 창을 뽑아 든 김혜옥은 어쩐지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니, 아직이야. 이제 시험이 종료될 때까지 그걸 ‘지켜야지.’”
“네?”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산점이라는 변수가 새로 도입되긴 했다만.
첫 번째 튜토리얼의 본질은 바로, 다른 수험생들을 밟고 올라서는 배틀로얄이다.
다른 수험생들도 무능하진 않을 테니. 아마 지금쯤….
-빠악!
김혜옥의 등 뒤에서 인기척을 감지한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김혜옥의 뒤에서 남성의 한 명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쯧. 금랑 쪽 헌터였네.”
얼굴을 감싸 쥔 채, 쓰러진 남성은 금랑 길드 특유의 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무기를 손에 넣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첫 번째 시험이 종료되기 전까지 무기를 지켜내는 것이 진또배기 시험이지,”
“그렇구나….”
쓰러진 금랑 길드원을 흘긋 바라본 김혜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콰드드득!
김혜옥은 망설임 없이 벼락처럼 몸을 회전시켜 자신의 뒤를 노린 남자를 걷어 차버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굵고 참나무처럼 단단한 다리가 남자의 복부를 걷어차자, 놈은 마치 쏘아진 폭죽처럼 화려하게 날아가 버렸다.
“쳇! 들켰다! 한꺼번에 조져!”
김혜옥에게 걷어차인 남자가 화려하게 허공을 유영하자.
숨어있던 헌터들과 수험생들이 우르를 쏟아져 나왔다.
“숫자가 좀 많네?”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머리수는 어림잡아 스물 이상이었다.
이미 무기를 손에 넣은 모양인지, 뭔가를 힘껏 꼬나쥔 수험생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레이디께서 워낙 화려하게 날뛰셨어야죠.”
우리를 포위한 인물들을 향해 사납게 웃으려는 순간, 느끼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능글맞으면서도 날이 서 있는 재수없는 목소리, 백번 죽고 되살아나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한세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