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굳은 표정으로 돌아간 신지현은 즉시 나태상의 최후를 언론에 퍼뜨려버렸다.
나태상의 전매특허인 전격에 타죽은 시체들과 몬스터로 변이한 그의 두개골은 신지현의 적절한 공작과 특종에 굶주린 언론인들의 힘으로 자극적인 기사가 되어, 매스컴을 강타했다.
덕분에 괴물로 변이된 나태상이 맞이한 최후는 활화산처럼 세상을 뜨겁게 달구지….
-속보! 이변의 시작인가? 튜토리얼 타워. 다시 열리다.
…못했다.
신지현의 활약을 지켜보기 위해, TV에 전원을 넣은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대형 뉴스 하나가 내 시선을 콰악 붙들었다.
[시작의 탑이 다시 열렸다고? 이… 무슨!]
위철용의 반응 또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에 마음껏 쌓였던 회포(?)를 풀어낸 덕분에 개운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 역시, 아연한 표정으로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번째 튜토리얼이라고?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애석하게도 신지현이 터뜨린 폭탄은 전무후무한 이변에 묻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봐도, 뉴스에선 다시 한 번 열린 튜토리얼 탑에 대해서만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하계 시간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시작의 탑을 여는 것이야말로, 태곳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약조이니라. 어떤 무도한 놈들이 그 엄정한 약조를 깨뜨려 버렸는지….]
위철용의 말처럼 튜토리얼 타워는 일 년에 단 한 번만 내부로의 출입을 허용해주는 곳이었다.
태곳적부터의 약속이라는 거창한 소개에 걸맞게, 회귀 전 역사에서도 튜토리얼 타워가 이런 식으로 일 년에 두 번이나 열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도…. 아모스 놈들이 수작질일까요?”
[아니! 그럴 리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들이라고 한들. 시작의 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느니라. 성좌들조차 회의를 통해 그곳의 개방을 결정하는 판에 하찮은 것들이 감히!]
위철용은 당치도 않는다는 듯 씩씩거렸지만, 그 ‘하찮은’ 마족들이 그동안 해온 짓들을 생각해볼 때. 갑작스러운 튜토리얼 타워의 두 번째 개방과 그들이 아예 연관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TV에 비친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나태상의 최후를 덮기 위한 수작질의 하나일까?
“…설마.”
워낙 타이밍이 좋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순간, 아모스 쪽의 공작인가 싶었지만,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스케일이 커도 너무 컸다.
[…네놈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좌 놈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또 우리 고매하신 성좌 님들께서 엉뚱한 짓을 저지르신 모양이로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왜인지 떨떠름한 표정의 위철용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성좌들의 반응이라구요?”
[아무래도 네놈의 걱정과는 달리, 성좌들이 결정한 사항인 것 같구나. 끄흥….]
위철용은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 인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짓눌렀다.
아무래도 잠시 채널 창을 엿봤다가 못 볼 꼴이라도 본 모양이었다.
-띠릭
위철용이 괴이쩍은 반응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채널 창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성좌들의 반응을 지켜보지 않았던 탓에. 채널 창이 반갑게 느껴지….
「축하합니다! 복슬복슬한 양 떼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오늘의 토론 주제! 설용호의 복근은 무슨 맛이 날까!』
…빌어먹을. 이래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채널 창을 열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성좌들의 후원 세례였다.
하필이면 막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왔기 때문인지, 성좌들은 유난히 흥분한 채로 괴상한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대화 내용 덕에, 나는 위철용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소식통에 의하면 시작의 탑이 한 번 더 열린다는데. 소식 들으셨습니까?』
「축하합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모임에서 그 주제로 투표를 진행하긴 했다네. 나는 반대에 투표했네만…. 결국 통과된 모양이로군.』
「축하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우와아. 역시 가시나무를 짋어지신 노인님답습니다. 모임이라니! 그거 고위 성좌들만 갈 수 있는 거잖습니까!』
낯뜨거운 후원 메시지를 한참이나 뒤적인 끝에, 마침내 나는 찾고 있었던 후원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흥! 고위 성좌는 무슨, 다 늙은 늙은이들 모임에 불과하지. 이몸께선 찬성에 한 표를 던지셨다. 새로운 필멸자들 얼굴 보는 것도 재밌잖아?』
「축하합니다! 얼어붙은 시간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하계 시간으로 일 년에 한 번씩만 힘을 허락하는 것이 태곳적부터 내려온 약속이었지 않습니까.』
「축하합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두 번째 단계가 어긋난 이후. 하계의 필멸자들이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했잖는가. 그래서 새로운 게이트를 출몰시키기 전에 조금이나마 형평성을 맞춰주기 위해서라더군.』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하긴, 원래의 역사에 비교하자면 이번 대 침식은 간단하게 끝난 편이긴 했다.
덕분에 그때보다 많은 이들이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위기를 통해 헌터들이 강해질 기회 또한 날아가 버렸다는 것
아무래도 성좌들은 튜토리얼 타워를 다시 여는 것으로 우리에게 모종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 같았다.
“어쩐지…. 대 침식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야 했을 신형 게이트들이, 아무런 소식이 없다 싶더니. 이런 뒷사정이 있었나 보네요.”
[그렇지. 다 네놈 탓인 게야. 대 침식을 네놈 혼자 홀라당 막아버린 탓에, 놈들이 판단하기엔 하계의 필멸자들이 새로운 게이트를 감당하기엔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게다.]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나를 쿡쿡 찔러댄 위철용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끄응….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튜토리얼 타워를 다시 열어준다고 해봤자. 햇병아리 헌터들 양산하는 게 전부일 텐데….”
기본적으로 튜토리얼 타워는 초보 헌터들을 길러내는 요람에 불과했다.
앞으로 열릴 ‘새로운 게이트’의 위험도를 생각해보자면, 풋내기들의 머릿수가 아무리 많이 늘어나 봤자 별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성좌들의 의견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번엔 성좌 놈들이 시작의 탑에 장난질을 쳐놨을 게다.]
“장난질이라뇨?”
[뻔하지 않으냐. 형평성을 맞춘답시고 말도 안 되는 효과의 특전들을 시작의 탑 곳곳에 숨겨뒀겠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성좌들인데 그렇게 안일하게 대비할 리가….”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흐흐. 기대하라고. 이번엔 규칙이 여러모로 바뀐 데다. 이몸께서도 시작의 탑 속에 꽤 재밌는 것들을 숨겨뒀으니 말이지. 듣자 하니. 다른 영감들도 재밌는 것들을 숨겨놨다는데. 기대할 만할 거야.』
“…그것이 사실로 일어났네요.”
애석하게도 위철용의 추측대로였다.
그의 추측을 증명해주는 후원 메시지에 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들은 튜토리얼 타워에 입장한 이들에게 엄청난 특전들을 퍼주는 것으로 형평성을 맞출 생각이었다.
아니, 명색이 성좌라는 양반들이 저딴 식으로 형평성을 맞춘다고? 이게 인생이야?
[…표정을 보아하니, 심통이 난 게로군?]
“아, 아녜요. 시, 심통은 무슨!”
[얻지 못할 것에 집착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이 또 있을까. 아서라, 네놈은 이미 튜토리얼에 통과한 몸! 네놈과는 인연이 없는 것들이니라.]
그랬다….
아무리 성좌들이 튜토리얼 타워 안에 대단한 것들을 숨겨놓았다고 한들.
이미 튜토리얼을 통과하여 튜토리얼 타워에 다시 입장할 수 없는 내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신포도에 불과했다.
그래….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는 특전들일 거야. 그럴 거야….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흐흐. 우리 귀여운 용호도 그곳에서 재밌는 것을 얻어갔으면 좋겠군. 실은 이몸께서 그곳에 숨겨놓은 특전들은 모두 우리 귀염둥이를 위해서 제작한 것들이거든.』
여우와 신포도 고사를 떠올리며, 튜토리얼 타워의 특전에 대해 미련을 접으려던 찰나.
후원 메시지 하나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어엉? 나를 위해 준비해뒀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축하합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허허…. 만약 그가 도전을 바란다면 말일세. 그는 어디까지나 ‘보호자’로서 출입하는 게 아니던가? 그보다는 그와 함께 입장하는 인물이 잘 해내길 바라야지』
보호자? 함께 입장해? 그건 또 무슨….
성좌들의 아리송한 선문답에 의문을 품으려는 순간.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은 엉뚱하게도 켜진 TV 속에서 들려왔다.
-이번엔 ‘특별’ 규칙이 적용되었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협회장님이 받은 신탁에 따르면, 수험생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자 격인 헌터 한 명과 함께 2인 1조로 페어를 이뤄 입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하니, 앞으로 그럼 인맥 없는 지원자들은 다 나가 죽으라는 걸까요?
[미친….]
괴이쩍게 변해버린 튜토리얼 타워의 규칙에 위철용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만큼 새롭게 도입된 규칙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괴한 것이었다.
…마치. 나를 유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
“…가만?”
유혹을 떨쳐내려던 순간, 머릿속에 나슈리크의 모습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혹시나 이것도 그가 나를 위해 짜놓은 ‘안배’의 하나가 아닐까?
「축하합니다! 얼어붙은 시간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설용호 본인이 그곳에 뛰어들지 않으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니겠….』
「관리자.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얼어붙은 시간의 수호자의 의사소통을 제한시킵니다.」
「축하합니다!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00 후원하셨습니다.」
『어머…. 지금 우리 용호님을 감히 무시하시는 건가요? 왜요? 우리 용호님께서 겁쟁이처럼 뒤로 빠질까 봐요?』
…저 성좌 나으리께선 여전히 살벌하군. 그래.
상황이 누가 봐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신중을 기하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성장이 정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차려진 밥상이 너무도 달콤해 보였다.
“…생각해보니까. 마침. 우리 혜옥이가 헌터가 되고 싶다고 했죠?”
햇병아리 헌터 수험생의 보호자 자격으로 튜토리얼 타워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내겐 헌터를 꿈꾸는 귀여운 제자 한 명이 있지 뭐야.
*****
“끄르아아아아! 강인한! 육체에! 강인한! 정신이! 깃든다앗!”
…뭐야 저거. 무서워.
언제봐도 김혜옥의 수련 장면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소형차를 한 대 짊어진 그녀는 우렁찬 기합을 연신 내지르며 열심히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김혜옥이 아직 특성 트리를 개화하지 않은 일반인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역시, 우리 혜옥이는 오늘도 수련에 매진하고 있군, 참으로 기특한 아이로고.]
어…. 수련이라기보단, 이젠 생명체의 한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 같은뎁쇼.
위철용이 나를 통해 김혜옥에게 알려준 수련법은 이제 왜곡될 대로 왜곡된 상태였다.
무거운 쇳덩이는 초대형 화로에서 이젠 아예 소형차로 진화(?)되어 있었으니 말이지….
하지만 위철용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냥 좋은지, 흐뭇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어머. 오셨어요. 헌터님? 그렇지 않아도 그때 의뢰하셨던 것 때문에 연락 드리려 했는데.”
김혜옥의 박력 넘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김혜연이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 역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박력 넘치는 근육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혜연 씨. 그것도 있는데. 오늘은 혜옥이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혜옥이에게 볼 일이요? 어머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튜토리얼 타워가 갑자기 열렸다고 했죠? 이번엔 2인 1조로 입장한다던데. 제가 혜옥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김혜연 역시 튜토리얼 타워를 통과한 헌터였다.
그녀는 전례가 없었던 사태에 걱정을 표하는 한편, 그녀 자신이 보호자로서 김혜옥과 동반해 입장할 계획을 세워둔 것 같았다.
참으로 눈물겨운 자매애가 아닐 수 없군. 그래….
내겐 별로 달갑지 않지만 말이지.
“혜연 씨가 혜옥이랑 같이 입장하시게요?”
김혜연의 성격을 잘 알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알고 있는 헌터라곤 헌터님 밖에 없는 데다…. 혜옥이에겐 저밖에 없으니까요.”
왜인지 김혜연은 멋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김혜연을 바라보았다.
“전투에 특화된 특성 트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 한스럽네요…. 제가 과연 보호자 노릇을 해줄 수 있을지….”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는 김혜연에게
나는 조심스레,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혜연 씨 대신, 제가 혜옥이 튜토리얼에 같이 입장하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