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헤러틱 리치의 뼈는 단단하기가 다이아몬드에 버금갈 정도다.
그렇지 않아도 강인한 내구도를 지닌 외골격을 헌터들의 영혼으로 벼려냈기에, 놈의 뼈를 박살내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웅! 후우웅!
하지만 나는 지금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수월히 해내고 있었다.
『육체와 영혼』 특성과 어둠달에 박혀있는 검은 심장의 효과는 헤러틱 리치에겐 상극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흐으어어!》
시커먼 기운이 일렁거리는 어둠달이 허공을 누빌 때마다.
둔중하게 맥동하는 검은 심장이 나태상의 육신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흡수했다.
『육체와 영혼』 특성의 효과에 따라, 외골격에 붙들린 영혼들이 귀곡성과 함께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끄오오오오! 설용호오오오!》
-파지지직!
최후의 발악일까?
정강이뼈가 우지끈 부러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태상이 발악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시퍼런 전하가 응집된 거대한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파팟!
하지만 최후의 발악조차 내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로 나태상이 휘두른 주먹의 경로가 훤히 보였다.
가볍게 놈의 공격을 피해낸 나는, 오히려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카가가각!
내력이 주입된 어둠달이 시커멓게 변색 된 나태상의 갈비뼈를 주르륵 훑었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갈비뼈의 요철부를 따라 시뻘건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어둠달의 창날이 춤을 출 때마다, 놈의 단단한 갈비뼈에 쩌저적 잔금이 아로새겨졌다.
《꾸오오오오!》
갈비뼈에 흡수된 영혼들과 나태상이 동시에 구슬픈 귀곡성을 토해냈다.
영혼들이 내지른 최후의 단말마와 함께, 놈의 뼈를 둘러싼 번개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퍼런 전하가 져버린 꽃잎처럼 처연하게 흩날렸다.
《흐어억. 흐어억.》
헤러틱 리치의 뼈가 특유의 단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뼈 형태로 변이된 외골격에 흡수된 영혼들 덕분이었다.
외골격에 흡수된 영혼들이 모조리 흩어져버린 지금, 나태상의 뼈는 평범한 하급 언데드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바닥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놈의 입에선 허무한 신음이 바람 빠지듯 흘러나왔다.
-쩌저저적!
나태상에게 다가가, 최후의 일격을 날린 순간.
단단한 무언가가 반으로 뚝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두개골에 굵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놈의 눈이 차츰차츰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편히 쉬라구. 선배.”
-쿠우웅.
시퍼렇게 타오르던 두 개의 귀화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나태상의 거대한 신형이 뒤로 기우뚱 넘어졌다.
-파사삭!
시커멓게 변색된 뼈가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까맣게 흩날리는 뼛가루가 요란하게 비산했다.
곧이어 박살 난 콘크리트와 돌조각의 파편들이 뼛가루에 뒤섞여 어지러이 흩날렸다.
복도를 꽉 채우던 나태상의 거대한 몸체는 이제, 빛이 꺼져버린 두개골만 남은 상태였다.
『이, 이건….』
나태상이 남긴 두개골에 다가가, 상태를 확인해보려던 찰나.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려왔다.
“나태상?”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나태상이었다.
어째선지 그는 널브러진 두개골에서 희끄무레한 영혼 상태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헤러틱 리치로 변이한 자의 영혼이 저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다고?
『자, 자네는 누군가?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 윙윙 울리는 목소리로 미뤄보건대. 나태상은 지금의 나만큼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반응조차 정상적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리던 치가, 지금은 마치 나를 처음 본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그쪽을 어떻게 아느냐니, 죽으면서 치매라도 걸린 거야? 선배?”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던 우리의 관계를 되새겨 주기 위해.
나는 나태상에게 특유의 비웃음을 담아, 이죽거림으로 화답했다.
『선배라니…. 그런가. 그런 것이었나….』
하지만 그런 내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나태상은 어쩐지 감격한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이 최후의 순간, 득도라도 했나. 갑자기 뭔 소리래니.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난 그 저주받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태상은 내게 감사를 표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엔 나태상답지 않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지금 그는 어쩐지 자신을 얽매던 족쇄에서 풀려난 듯, 후련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새삼스레 왜 이래? 우리 이렇게 살가운 사이가 절대 아니잖아.”
나태상의 미소는 평화롭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동안 나태상이 보여줬던, 지랄 맞은 성격과는 거리가 수십 광년쯤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놈이 어찌나 개판을 쳐 놨는지 자네의 표정에 그동안의 행적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군. 그래…. 하지만 말일세,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네.』
내가 보인 적대적인 태도에 쓰게 웃은 나태상은 멋쩍은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아는 ‘나태상’은 맹세코 내가 아닌 다른 이일세. 그동안 나는….』
나태상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족들에 대한 정보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 양반 처음부터…!
“혹시 마족 놈에게 속아 넘어가 육체를 빼앗겼었나?”
『마족이라…. 그래, 그 사악한 놈이 한 짓을 보면 마족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겠군. 그래, 난 힘을 주겠다는 놈의 달콤한 말에 속아 몸을 빼앗겨 버렸었지.』
…역시나. 짐작대로군.
힘을 원하는 이를 달콤한 감언이설로 속여, 신체를 강탈하는 수법은 마족 놈들의 전매특허 중 하나였다.
그렇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나태상의 인격은 본인의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쩐지 재수 없다 했더니, 이 양반도 마족 놈들의 수작질에 당한 것뿐인 피해자라는 건가….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뒤로, 나는 지독히도 음울한 회색 공간에 갇힌 채로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지.』
“…뭐?”
씁쓸하게 자조하던 나태상의 푸념을 듣던 중.
어쩐지 묘하게 낯익은 장소를 설명하는 듯한 그의 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자, 잠깐만. 회색 공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독히도 허무하고 공허한 공간이었지 그곳에 갇힌 나는….』
불안한 마음에 다급히 나태상에게 문제의 회색 공간에 대해 캐물으려 했지만,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막 ‘음울한 회색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순간, 빛무리와 함께 그의 영혼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잠깐!”
나태상의 영혼을 붙잡으려 했으나, 내 손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의 영혼은 순식간에 황금빛 빛무리에 휘감긴 상태로 흩어져버렸다.
-화아아악!
지독하게 허무하고 음울한 회색빛 공간이라….
나태상이 묘사한 공간은 위철용이 만들어낸 심상 세계와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얼핏 듣기엔 어디에서나 존재할 법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왜인지 나는 그의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소름이 돋아난 양팔을 슥슥 문질렀다.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한 의심의 불길이 겉잡을 수 없게 커져 나갔다.
“설마. 위철용도 마족과 모종의 연관이….”
최근 들어 위철용이 명상이니 뭐니 괴이쩍은 핑계를 대며, 심상 세계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사실이 피어오른 의심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생각해보니, 요샌 잠들거나 기절해도 심상 세계 속으로 끌려간 적이 없었지. 아마?
[으하하하하! 들어보라 애송아! 이뤄냈도다! 본존이 드디어 그것을…!]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위철용의 행적에 대해 생각해보려니, 요란한 광소와 함께 낯익게 못생긴 얼굴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네놈 표정은 또 왜 그리 죽상인 게냐?]
잔뜩 찌푸린 내 표정과 마주한 위철용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특유의 걱정과 비웃음이 뒤섞인 애매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태상을 처치하긴 했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어서요.”
위철용에게 대놓고 ‘댁이 수상합니다. 정체를 드러내시죠! 핫-하!’라며 마음속의 의심을 드러낼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위철용의 눈치를 슬쩍 살핀 나는, 화두를 나태상의 죽음으로 옮겼다.
[나태상 그 건방진 놈을 드디어 조져놨어?! 크흐! 조금만 더 빨리 나올 것을! 통쾌한 장면을 아깝게 놓쳤구나.]
위철용은 아쉽다는 듯, 요란하게 입맛을 쩝 다셨다.
[뒈진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헤러틱 리치로 타락했던 모양이로고. 어리석기는!]
전직 성좌답게 위철용은 거대하게 변이된 두개골의 정체를 바로 간파해냈다.
헤러틱 리치로 영락한 이의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그는 나태상의 말로에 안타까움과 조롱이 적절히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요. 헌데…. 우리가 알던 나태상은 본인의 인격이 아니었나 봐요.”
[뭐? 놈은 회귀 전에도 똑같은 성격이 아니었더냐? 딱 놈다운 결말을 맞았는데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꽤 오래전에 마족과 거래해서 신체를 강탈 당했었대요.”
회귀 전 나태상의 인품이 얼마나 악랄한지에 대해 악평을 늘어놓으려던 위철용은 내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크흠! 그렇다면, 그때도 신체를 강탈당했던 모양이지? 칠칠치 못하긴!]
특유의 어색한 헛기침으로 봐선, 적잖이 민망한 모양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잠시 위철용의 눈치를 살핀 나는, 나태상이 언급한 ‘회색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신체를 강탈당한 나태상 본인의 영혼은 그간 지독히도 허무한 회색 공간에 갇혀 있었다더라구요.”
[호오…. 역시 마족 놈들도 심상 세계를 이용할 수 있었나 보군.]
위철용의 눈치를 살피며, 지나가듯 꺼낸 이야기였지만.
정작 그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을 벗어난 성질의 것이었다.
놀랍게도 위철용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나태상이 갇힌 회색 공간이 심상 세계와 동일한 것임을 담백하게 인정해버렸다.
…뭐야. 이 어르신은 왜 이렇게 순순히 인정해.
“아, 아니. 그게 심상 세계랑 똑같은 거예요?”
[아암. 말했지 않았느냐. 심상 세계란 정신 속에 구축된 가상의 세계라고. 무의 길을 걷는 무인들도, 술법 나부랭이를 쪼물락거리는 샌님들도 구축하는 것이 심상 세계라는 놈이니라. 음험한 마족 놈들이라고 못 만들 것이 없지.]
슬쩍 내 얼굴을 바라본 위철용은 사납게 웃었다.
[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네놈이야.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 예를 들어 단순히 나태상 고놈이 갇혀있던 ‘회색 공간’과 본존의 ‘심상 세계’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의심을 한다든지….]
“아닌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그렇게 멍청한 생각을….”
[허이구. 이미 눈빛에서부터 뻔히 드러나 있으시던데. 부정하시게요? 아서라. 본존이 천마 자리를 마작으로 딴 줄 아느냐?]
정곡을 파고든 위철용의 지적에 애써 태연한 척, 부정하려고 했지만.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위철용은 내 말을 딱 잘라 일축해버렸다.
…거, 눈치 한번 귀신 같은 어르신일세. 아니, 귀신(?)은 맞는 건가?
[…그리고. 본존이 요새 심상 세계 속에 콕 틀어박혀 있었으니. 네놈이 그렇게 불측한 생각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제, 제가 언제 그런 불측한 생각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최근 들어 네놈을 좀 풀어주긴 했지. 기대해라. 오늘 밤엔 그동안의 회포를 톡톡히 풀어보자꾸나.]
나를 바라보는 위철용의 고리눈이 음험한 빛을 내뿜었다.
유난히 ‘회포’라는 단어를 강조하듯 말하는 그의 표정엔 약간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본존이 그동안 심상 세계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본존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았지!]
그러고 보니, 위철용이 광소와 함께 나타났을 때. 떠들어댔던 소리가 있긴 했다.
뭔가를 이뤘네, 어쩌네. 떠든 것 같긴 한데….
“결실이라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