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크흐흐흐. 이 깜찍한 것! 드디어 찾았다.”
모습을 드러낸 나태상의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눈은 퀭하니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내가….”
하지만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에선 폭력적인 광기가 잿불처럼 은은하게 비어져 나왔다.
사납게 벌려진 입에선 끈적한 침이 광기를 머금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태상의 몸에선 마치 이 세상이 것이 아닌 듯한 묵직한 존재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 헌터님? 저. 저 다시 들어갈게요.”
나태상의 상태에 겁을 집어먹은 것일까?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신지현은 그토록 질색하던 청소도구함 속에 스스로 기어들어갔다.
단단하게 닫힌 청소도구함의 자그마한 틈새 사이로 겁에 질린 눈동자가 불안하게 떠올랐다.
“마음고생이 심하셨나봐? 아니면 뭘 잘못 쳐 잡수시기라도 했어?”
계속해서 혼잣말을 반복하는 나태상에게 나는 일부러 이죽거리며 시비를 틀었다.
그리고는 대화가 이어지는 틈을 타서 화안금정을 사용해, 나태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스레 살피기 시작했다.
“크으흐흐흐.”
도발적으로 손짓까지 했건만, 나태상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놈은 여전히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기괴한 기운을 음습하게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피슛!
나태상의 몸에서 공격이 감지되지 않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선공을 날렸다.
시커먼 어둠이 일렁이는 어둠달의 창끝에서 피어난 독룡아가 나태상의 목덜미를 노렸다.
-부우욱!
살가죽이 찢어지는 파육음과 함께 그의 목덜미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
독룡아의 날카로운 이빨은 분명히 나태상의 동맥을 끊어놓았다.
하지만 뻐끔히 입을 벌린 상처에선 선홍빛 피분수 대신, 끈적한 타르같은 시커먼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었다.
“으흐하하하하! 찾았다고!”
-파지지직!
쩌렁쩌렁한 광소와 함께 나태상의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동시에 놈의 가슴 어림에서 파직거리는 전하가 광폭하게 응집되었다.
-꽈르르릉!
응집된 전하가 번쩍 빛난다 싶더니, 복도에 천둥이 쳤다. 우레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복도 전체가 새하얗게 백열되었다.
“끄어어어억!”
시야가 백열된 순간, 신지현이 들어있는 청소도구함을 보여잡고 외골격을 일으켰지만.
나태상의 공격은 우리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섬뜩한 비명소리와 함께, 복도 곳곳에 뻗어 있던 괴한들의 몸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후오오옹!
동시에 그렇게 숨을 거둔 괴한들의 시신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들이 뽑혀나와.
나태상의 몸에 하나둘씩 흡수되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사과는 나중에!”
-콰앙!
“꺄으아아아! 설용호 이 개새…!”
나태상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눈치챈 순간, 나는 있는 힘껏 신지현이 들어있는 청소도구함을 힘껏 집어던졌다.
외골격에 휩싸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청소도구함은 그녀의 걸쭉한 욕설과 함께,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차례차례 부수며, 저멀리 날아가버렸다.
《크흐흐흐. 그래! 그래애! 더! 더 많은 힘을!》
괴한들의 영혼을 흡수한 나태상은 흉측한 몰골로 변이되어 있었다.
피부와 살점, 가죽이 모조리 타버린 채. 시커멓게 변색된 뼈만이 번개에 휘감겨 있었다.
…어쩐지 원 역사보다 강해졌다 했더니.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렸군 그래.
“헤러틱 리치라니. 더 좋은 선택지도 있었잖아. 선배.”
헤러틱 리치.
게이트에서 등장하는 고위 언데드 몬스터인 리치와는 달리 원래 헌터였던 존재가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변이체의 일종이었다.
아모스와 나태상이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태상은 원 역사와는 달리,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렸다.
“…이미. 대화가 통하는 상태도 아니겠지만.”
헤러틱 리치는 강력한 헌터의 육신을 매개체로 수많은 헌터의 영혼이 융합되어 만들어지는 존재였다.
헌터의 영혼을 연료로 삼아, 소재가 된 헌터의 특성 트리를 강하게 증폭시키는 대신. 그의 이성은 깔끔하게 날아가 버리지.
어리석은 나태상은 복수에 눈이 멀어 광폭하게 날뛰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태상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가니, 아모스 그 개자식은 그의 복수심을 부채질해 버림패로 사용해버린 것 같군.
《크으흐흐흐! 설용호오오오!》
헤러틱 리치가 되어버린 나태상의 마지막 잔류사념은 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슬슬 언어능력마저 상실해가는 모양인지, 놈은 계속해서 내 이름만을 부르짖으며 사방으로 시퍼런 전하를 흩뿌렸다.
-빠지지직!
이젠 집채만하게 변한 나태상이 휘두른 주먹에 콘크리트 벽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어지러이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시퍼런 전하가 섬뜩한 살기를 뿌리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나는 화안금정 속에 비친 공격 루트를 읽어가며, 아슬아슬하게 놈의 주먹을 피해냈다.
-꽈릉! 꽈르르릉!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태상이 번개에 휘감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시퍼런 전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날름거리며 흩뿌려지는 시퍼런 빛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몸이 저릿하니 마비되었다.
“크읏!”
운룡보의 신묘한 구결대로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며 나태상의 공격을 피하던 그 순간,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놈의 공격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꽈르릉!
번개가 휘감긴 주먹은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담긴,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에, 단단한 황금빛 외골격이 한 움큼 찢겨나갔다.
곧이어 외골격 아래 노출된 오른팔이 저릿하게 마비되었다.
“흡!”
오른팔 전체에 저릿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내력을 집중시켜 억지로 근육을 뒤틀었다.
머릿속을 허옇게 불태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지금 별 문제가 아니었다.
-부와아악!
잠시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노려 나태상의 주먹이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대기를 가르며 섬뜩한 파공음을 내는 놈의 공격을 허리를 눕혀 간신히 피하면서 나는 어둠달을 휘둘렀다.
가해진 참격이 나태상의 정강이뼈를 부우욱 긁었다.
-카가가각!!
어둠달의 시커먼 창날이 나태상의 변이된 외골격 위를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시퍼렇게 타오르는 전하 사이로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흐오오오오!》
긁힌 외골격 위에 울부짖는 얼굴 하나가 떠올라, 귀곡성을 터뜨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귀곡성과 함께 스르륵 사라지자, 놈의 몸에서 타오르던 시퍼런 전하의 색이 약간 옅어졌다.
“역시, 그렇군….”
다행히 『육체의 영혼』 특성은 헤러틱 리치에게도 유용하게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태상의 외골격이 희생된 헌터들의 영혼을 연료로 삼고 타오르는 만큼, 놈에게 내 공격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의미하게 먹혀들어 갔다.
“쉽지는 않겠지만. 생각한 것보단 쉽게 처리할 수 있겠어.”
승기를 확신한 순간, 나는 자세를 살짝 바꿨다.
나태상의 공격이 제법 매섭긴 하지만, 헤러틱 리치가 되어버린 이상. 놈의 공격은 이지를 잃어버린 몬스터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한 방, 한 방이 위력은 강했지만. 움직임은 단순하기 짝이 없단 소리다.
그러면? 사각에서 놈을 치는 수밖에!
-콰앙!
발에 내력을 집중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나태상과의 거리를 벌렸다.
연거푸 수난을 당한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꺼지며, 부서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피슛! 피슛! 피슛!
시커먼 어둠이 일렁거리는 어둠달의 창날이 허공을 정신없이 수놓았다.
《크우웃! 크웃!》
조금 전의 공격이 무슨 결과를 초래했는지, 나름대로 학습한 탓일까?
자신에게 시커먼 창날이 날아들자, 나태상은 그것들을 막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눈속임용으로 흩뿌린 기운에 놈이 완전히 정신이 팔린 사이.
나태상의 사각을 파고든 나는 잠시 외골격을 해제한 뒤, 예비용 외골격에 기운을 집중시켰다.
-빠아아앙!
또 다시 펼쳐진 암룡출동!
시커먼 기운이 벼락처럼 흩뿌려지며, 나태상의 커다란 척추 뼈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캬아아아아악!》
기운에 노출된 나태상의 외골격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싶더니.
귀곡성과 함께 붙잡힌 헌터들의 희끄무레한 영혼들이 해방되기 시작했다.
-꽈르릉!
하지만, 일시적으로 외골격이 해제된 바로 그 순간.
발악적으로 휘두른 나태상의 주먹이 내게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황급히 어둠달에 내력을 주입해. 놈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크읍!”
머릿속이 불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세상이 하얗게 백열되었다.
턱 벌려진 입에선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빌어먹을!”
하지만, 여유롭게 기절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욕지기와 함께, 강제로 내력을 몸에 돌려 저절로 뒤틀리는 근육을 강제로 고정시켰다.
덕분에 기절하는 것은 면했지만, 화끈하기 짝이 없는 고통이 이성을 허옇게 백열시켰다.
《크워어어어!》
그래도 조금 전의 공격은 값을 충분히 제값을 했다.
대량으로 풀려난 영혼의 영향인지, 나태상의 움직임이 살짝 굼떠졌다.
시퍼렇게 백열되어 파직파직 전하를 튀기던 번개의 기세도 많이 약해졌다.
-촤르르륵!
다시 외골격을 두른 나는 이를 악 다문 채, 어둠달을 휘둘러, 공격을 이어나갔다.
-콰앙! 쾅! 쾅!
《흐오오오오!》
어둠달의 창날이 나태상의 몸에 닿을 때마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갈수록 흐릿해지는 외골격 위로, 계속해서 일그러진 얼굴들이 떠올랐다.
―꽈르릉!
외골격이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나태상의 몸엔 상처가 늘어났지만.
상처입은 야수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나태상의 공격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시퍼런 전하가 계속해서 춤을 추며, 사방을 압박해왔다.
“크으으윽!”
-썩둑!
나태상이 발악적으로 퍼뜨린 전하에 다시 한 번 외골격이 해제되었지만.
그 사이 사각을 파고든 독룡아가 나태상의 허벅지 뼈로 파고들었다.
울컥 치솟은 찝질한 핏물을 억지로 삼킨 채, 어둠달을 휘두르자. 비대해진 허벅지 뼈가 썽둥 잘려나갔다.
《끄호오오옹!》
거대한 거목이 넘어지듯, 나태상의 거대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 전체가 출렁거렸다.
구슬픈 귀곡성과 함께, 남아있던 영혼들 상당수가 하늘로 승천했다.
“이제. 끝을 보자구 선배.”
이제 외골격이 거의 사라진 채, 바닥을 벅벅 긁는 나태상을 바라보며.
나는 어둠달을 까드득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