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일거리를 그렇게나 많이 던져주셔 놓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요?”
한창 작업에 열중하다 끌려온 것이 심기를 자극한 탓인지.
컴컴한 사무실 속에서 샐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신지현의 표정은 그리 곱지 않았다.
생기를 잃어 푸석해진 피부 위에 거뭇한 다크서클이 길게 늘어진 것으로 봐선, 지난번 만남 이후로 줄곧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별거 아니에요. 아니, 별거라고 해야 하나? 장례식 준비를 좀 부탁드릴까 해서요.”
“으하아암. 별거 아니라니 그거참 다행이…. 커흑! 켁! 켁! 콜록! 콜록!”
별거 아니라는 말에 신지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곤 안도하듯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린 장례식이란 말에 그녀는 사례 걸린 듯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뭐, 뭐라구요? 장례식?! 누,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예, 태백에 아주 큰 별이 졌죠.”
말투는 엄숙했지만, 내 표정은 비릿한 비웃음을 품고 있었다.
표정과 말투가 따로 노는 내 모습에 의구심을 느낀 모양인지, 신지현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잔뜩 찌푸렸다.
“또 무슨 괴상한 음모를….”
-콰앙!
신지현이 막 내게 따지려는 찰나, 헐레벌떡 뛰어온 이세영이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지, 지현 씨, TV. TV 좀 켜보세요! 지금 당장!”
“세영 씨? 갑자기 세영 씨는 또 무슨 일이에요? TV를 켜라니 무슨 소리….”
이세영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신지현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홀린 듯 한쪽 구석에 놓인 리모컨으로 손을 가져갔다.
사무실에 구석에 자리 잡은 대형 TV에 전원이 들어온 순간,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태백 길드의 유영화 헌터가 그만…. 전사했습니다.』
“뭐, 뭐에요?! 유영화가 주, 죽었어?”
신지현과 이세영, 두 사람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 유영화 헌터의 동료 설용호 헌터가 고인의 시신을 수습해 태백 길드 측에 전달했으며, 태백 측에서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길드 절차에 따라 고인의 장례를…』
『…태백의 길드장 강태백은 애도를 표하며…고인의 마지막 가는길을….』
『박양환 헌터는 오행 측에 피의 복수를….』
산군의 홍일점이자, 엄청난 유명세를 누렸던 헌터답게 유영화의 죽음은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신지현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계속 채널을 돌려봐도, TV에선 하나같이 유영화의 죽음에 대한 뉴스만이 방영되고 있었다.
허참. 서민혁을 시켜, 방송국에 제보한 것이 불과 한시간 전이었는데 말이지….
하여튼 기자 양반들 발빠른건 인정해 줘야한다니깐.
“벌써 추모 영상까지 만들었어? 역시 우리나라 기자 양반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하다니깐.”
심지어 일부 채널에선 발빠르게 유영화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편집해, 추모 영상이랍시고 방영해주고 있었다.
내가 던져넣은 장작이 생각이상으로 활활 잘 타오르는 것 같아,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지, 지현 씨 저, 저는 저희 길드 쪽에 연락을 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이세영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이세영을 멍하니 바라보던 신지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헌터님 짓이죠? 도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거예욧!”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온건지, 신지현은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릴만큼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허옇게 질렸던 얼굴이 어느새 시뻘겋게 달궈졌다.
당장이라도 김을 내뿜을 뜻 씩씩거리는 모습이 난로 위의 주전자와 똑 닮아 보였다.
“아니! 앞으로 사고 칠 땐 예고하고 저질러 주겠다면서요!”
“그야 갑자기 습격해온걸 어떡합니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이렇게 왔잖아요?”
신지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지난번의 약속을 어기진 않았다.
유영화의 육신을 차지한 아모스와 충돌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의 영역에 속했고.
내 딴에는 새로운 육신을 차지한 아모스가 유영화의 죽음을 이용하기 전에, 서둘러 신지현에게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이이이익!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영화 쯤되는 존재를 이렇게 박살을 내놓으시면 어떡해요!”
“어차피 아모스는 새로운 육신을 차지했을 겁니다. 그리고 유영화의 죽음을 이용해 우리를 압박해 올 생각이었겠죠. 동영상도 있겠다. 제가 뭐 오행 쪽의 첩자니 뭐니 하는 식으로요.”
“네?”
“말했잖아요. 놈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유영화의 육신 정도는 놈에겐 소모품에 불과하단거에요.”
아모스의 비밀(?)을 들어서일까?
신지현의 영민한 머리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빠르게 포착해 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사색으로 허옇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그럼 큰일난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동영상까지 넘어간 마당인데!”
“하지만 제 쪽에서 이렇게 먼저 선수를 쳐버린다면 어떨까요?”
아모스에겐 애석하게도, 나는 놈이 그렇게 나올 것을 이미 예상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놈이 유영화의 죽음을 이용할 것을 아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선수쳐버리면 그만이지.
“영상 준비 됐죠?”
“네, 네에. 이제 조금만 더 다듬으면….”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신지현에게 준비해온 대본을 던지듯 건네줬다.
“대사 몇 개만 더 붙여봅시다.”
*****
“…원하셨던 대로. 무대는 준비해 드렸긴 한데,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요.”
유영화의 장례식은 시꺼멓게 타버린 태백 길드 본사에서 치러졌다.
본사로 향하는 듀라한의 뒷좌석에서 신지현은 어딘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불편한 시선을 마주하며,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좀….”
-아이고오 유영화 산군니이임!
-어쩌다가 젊은 나이에 그렇게….
신지현의 불만섞인 질문은 창밖에서 들려온 비통한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먼젓번의 습격으로 활활 불타버린 태백 길드 본사 건물 주변엔 사방에서 몰려든 조문객들이 바글바글하게 늘어서 있었다.
“역시 유명인은 죽음도 화려하네요. 지난번 희생자들 장례식엔 조문객도 별로 오질 않더니.”
“…….”
아모스 세력에게 희생되었던 희생자들의 장례식 또한 며칠 전 바로 이곳에서 치러졌었다.
하지만 그땐 희생자들의 유족과 체면치레를 하러온 몇몇 헌터 단체의 조문객들만 왔을 뿐.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 이정도로 큰 화제가 되지 못했었다.
그때와 너무도 대비되는 사람들의 반응에 비릿한 비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기자들 반응도 다르네요. 누가보면 진심으로 유영화의 죽음을 애도하러 온것인 줄 알겠어요.”
장례식장이 입구에는 이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기자가 다 모여들었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유영화라는 존재의 파급력을 그들도 아는 모양인지, 그들은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슬픔을 연기하고 있었다.
“내리죠.”
“아, 아니 여기서 내리면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댈텐데요?”
“관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당황한 신지현을 살짝 밀치듯 차에서 내린 나는 억지로 슬픔을 눌러참는 듯 비통한 표정으로 기자들이 진을 친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 저기 설용호 헌터다!
-설용호 헌터님! 민족일보의 주화영 기자입니다! 잠시 인터뷰를 좀!
-인터뷰 할 시간이 어딨어! 우선 사진부터 찍자고!
아니나 다를까, 슬픔을 연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추악한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며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누가 악당인지 모를 정도라니까.”
“악당은 무슨, 저것들이 악당이겠죠.”
순간적으로 행해진 내 표정연기에 신지현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기자들을 가리켰다.
-크흐흐. 역시 소문대로 설용호 이새낀 얼굴도 반반하군. 메인으로 쓰기 딱이야!
-호호호. 설용호의 잘생긴 얼굴이면 조회수도 따논 당상이죠. 제목을 뭐라해야 자극적이려나.
그렇게 헛소리를 본색을 드러낸 기자들을 지나 본사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엄청나게 많은 꽃으로 둘러싸인 유영화의 영정과 새까만 상복을 차려입은 태백의 직원들, 마지막으로 끝없이 늘어선 여러 단체에서 보내온 화환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오. 영화야아아!”
머리를 길게 기른 호리호리한 중년 남성 한 명이 비통한 표정으로 유영화의 영정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허허헝. 너마저 떠나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냐아!”
악을 쓰듯 비통하게 소리를 질러대는 남자의 모습은 기억에 있던 인물이었다.
유영화의 공식적인 연인이자, 태백 공격대를 이끄는 공격대장. 산군 박양환이 그의 정체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를 슬쩍 지나친 나는 향을 피우며 유영화에게 조의를 표했다.
“크흐흑. 그쪽이…. 영화의 시신을 수습해온 설용호인가?”
가볍게 허리를 숙인 뒤, 돌아서려던 찰나.
유영화의 영정을 부여잡고 짐승처럼 울부짖던 박양환이 나를 붙잡았다.
“말해주게…. 영화를 이꼴로 만든 이가 대체 누군지 말이야.”
박양환은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원수의 이름을 물어보는 그의 눈은 증오의 감정이 거칠게 들끓고 있었다.
…기묘한 일이군. 박양환이라면 아모스쪽 인물일 줄 알았는데 말이지.
혹시…. 내 반응을 떠보는 건가?
-츠츠츠츠
『거짓』
화안금정을 발동시켜 박양환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자.
역시나 그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단어는 ‘거짓’이었다.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행동은 전부 연기에 불과했다.
“크흠. 우선은 이것 좀 놓고 말하시겠습니까?”
“…이거, 결례를 범했네. 그래도 우리 영화의 시신을 수습해준 이인데….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서 말일세.”
힘없이 말끝을 흐린 박양환은 붙잡았던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통함과 원수를 향한 증오로 암울하게 물들어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서 은밀하게 반짝이는 음모의 음험한 기운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박양환의 머리 위에 계속해서 떠오른 단어들은 하나같이 거짓이었다.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으셨으니. 이성을 잃으실 법도 하죠.”
손매를 툭툭 털어낸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도 나를 돕는 모양인지, 딱 적절한 타이밍에 오늘 상영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강태백이 들어오고 있는 장면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그래…. 관객들도 어느정도 모인 상황이니. 슬슬 시작해 볼까?
“그렇지 않아도. 유영화 산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저희 쪽에서 준비한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영상’이란 단어를 들은 박양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의 빛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에게 사람좋은 듯 생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위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