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신지현에게 청소 좀 하고 살라는 농담을 건네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빠져나왔다.
“어디 보자. 감독 겸 시나리오 라이터와는 이야기가 끝났으니. 다음은 편집자인가.”
선동과 여론조작에는 놀랄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신지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영상을 편집하는 것엔 영 재능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그녀의 시나리오대로 영상을 짜 맞춰줄 편집자를 구하는 것이었고 다행히 내가 아는 인물 중에 그런 일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주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이세영, 이 아가씨는 또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네놈에게 홀딱 빠졌었으니, 아마 지금쯤 실연의 고통으로 이불을 눈물로 적시고 있지 않겠느냐?]
위철용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똑같이 내 외모에 홀딱 반해,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이이긴 하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실시간으로 저질러 대는 사건들의 뒷정리를 하느라, 지금 시점에서 신지현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애정보단 애증 쪽에 더 가까운 상태였다.
하지만 이세영은 줄곧 내게 반해 있었던 상태였기에. 내 실종 소식에 영 좋지 못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웅! 우우우웅!
걱정 어린 마음에 이세영이 건네준 연락용 휴대폰의 전원을 켠 순간.
그동안 그녀가 보내왔던 메시지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우두두 빗발쳤다.
실시간으로 주르륵 올라가는 메시지의 향연과 쉴 새 없이 알람을 토해내며 부르르 진동해대는 휴대폰의 범상치 않은 모습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무사하신 거죠? 제발 대답 좀 해보세요. 용호 씨?
-실종이라니, 뭔가 꾸미고 계시는 거죠? 그렇죠?
…
-대답해대답해대답해대답해대답해대답해대답해!
-찾아갈거야찾아갈거야찾아낼거야찾아낼거야!
“맙소사…. 이게 다 뭐람.”
상부에 실종 보고가 올라간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락용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통화는 321통이나 되었으며, 읽지 않은 메시지는 2,407개에 달했다.
처음의 메시지에선 이세영의 걱정 어린 감정이 여실히 녹아들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메시지에선 광기와 집착 어린 혼돈만이 가득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메시지의 향연에 기겁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이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뚜뚜.
짧은 신호음이 이어진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으나, 곧바로 전화를 끊는 소리가 이어졌다.
뭐, 뭐지? 전화는 또 왜 바로 끊는 거야.
-우웅!
『통화 불가. 사무실 방문 요망.』
갑자기 끊어진 전화에 의아해하는 사이,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평소 이세영이 보내던 것과는 달리, 전송된 메시지는 굉장히 드라이한 정보만을 담고 있었다.
“이 아가씨에겐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어째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든 나는, 즉시 노량진에 있는 한성유통 본사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세영의 301호 사무실 앞에 도착한 뒤. 긴장된 마음으로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계십니까?”
빛 한 점 들지 않은 301호 사무실 내부는 여전히 컴컴한 어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천장까지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과 그 사이로 정신없이 휘날리는 퀴퀴한 먼지들의 향연.
겉으로 보기엔 며칠 전,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아왔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간악한 원수 놈.”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으려니, 어둠 속에서 이세영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나를 대하던 애교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적개심이 가득 서려 있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원수 놈이라고?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세영 씨? 다짜고짜 이게 무슨….”
“후후후. 사악한 마족 놈답게 목소리마저 그와 똑같이 꾸몄군. 허나! 정보단체에서 일 한지 어언 20년! 그런 얄팍한 술책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부와아아악!
이세영의 서늘한 웃음이 들린 순간,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리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단검 두 자루가 나를 향해 쇄도해왔다.
“아니, 사람 말을 좀! 들어봐요!”
“죽엇!”
공격을 피해낸 나는 손을 내저으며 이세영과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계속해서 단검을 휘둘러 댔다.
-후와앙! 후와앙!
이세영이 공격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재빨랐고 또 은밀하기까지 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단검 두 자루는 아차 하는 순간, 내 앞섶을 가르고 지나갔다.
몸을 숙여 아슬아슬하게 피한 덕분에, 상처까진 입지 않았지만 단단한 가죽 갑옷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호오. 네놈의 감각마저 속일 정도로 은밀한 공격이라니. 역시 본존의 눈이 헛되지 않았군.]
‘지금 그런 것에 감탄할 땝니까?’
계속해서 무식하게 단검을 휘둘러대는 이세영의 막무가내식 대화법과 계속해서 이죽거리는 위철용 덕분에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이세영을 바라보는 내 두 눈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달에서 비롯된 시커먼 내력이 광폭하게 날뛰며 온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부와아아악!
“이거 말로 해선 안 되겠네, 그래, 오늘 제대로 한번 붙어 보자고.”
이세영을 향해 으르렁거린 나는 거추장스럽게 나풀거리는 갑옷을 붙잡아 뜯었다.
손에 집중된 내력이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여 가죽 갑옷을 마치 종잇장처럼 쭈욱 찢어버렸다.
그렇게 상반신이 완전히 헐벗은 상태가 되어버렸지만, 촤르륵 일어난 외골격이 찢어진 갑옷을 대신해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복근.”
하지만 내가 내비친 적의에 대한 이세영의 반응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어둠 속에 녹아들어 내 사각을 노리던 그녀는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채, 나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시선은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내 복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 참기름을 바른 것처럼 참하게 반들거리는 광택! 정확하게 여섯 쪽으로 딱 갈라진 초콜릿 초콜릿 복근! …세상에. 설마 진짜로….”
멍한 표정으로 내 배를 바라보던 이세영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 복근에 대한 예찬을 중얼거린 그녀는 비척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일어난 초현실적인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가까이 접근한 이세영은 천천히 내 복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왼쪽 세 번째 식스팩이 살짝 찌그러진 것까지 정확해…. 저, 정말 용호 씨에요?”
내 복근에 대해 쓸데없이 해박한 지식을 토로한 이세영은 고개를 들어. 눈물이 어룽거리는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이렇게 잘생긴 헌터가 저 말고 또 있겠습니까.”
복근으로 사람을 구별하다니, 이건 스토커의 신기원이라 봐야 하느냐….
어처구니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맥이 탁 풀려버렸기에, 내 입에선 힘없이 그녀의 추측(?)을 긍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앙! 용호 씨이이!”
눈가에 어룽거리기만 했던 눈물이 마침내 터졌다.
내 답변을 들은 이세영은 마치 미아보호소에서 엄마를 발견한 아이처럼 기쁨과 서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통곡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내 품속에 안기듯 뛰어들어 눈물과 콧물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흐어엉. 흐어어엉. 주근줄 아뢌는데 아빠한테 유서도 써놓은 데에.”
그렇게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이세영은 계속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맨살에 자꾸 축축하면서 뜨뜻한 것이 닿는 것이 계속해서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괜히 나 자신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흐느끼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오싹 소름이 돋기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댁이 유서는 왜 써놓는 건데.
[신지현 그 아이도 그렇고 이 아이도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째 이번에 네놈과 엮이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구나.]
‘아, 아니. 그냥 이 양반들이 독특한 케이스….’
이세영을 보고 묘한 비웃음을 띈 위철용에게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왠지 회귀 후 나와 엮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김혜연이 그중에서도 가장 정상에 가깝긴 했으나, 그녀와 그녀의 동생 김혜옥이 보여줬던 기행들을 생각해보면 그녀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예. 어째 말씀하신 대로 정상이 없네요. 정상이….’
나는 비죽비죽 비웃음을 흘리는 위철용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양소혜도, 박정욱도, 서민혁도…. 누구를 떠올려봐도 하나같이 정상과는 거리가 먼 양반들이었다.
회귀한 대신 뭔가 마가 낀 건가? 어떻게 된 것이 이번 생애엔 주변에 정상적인 인물들이 하나도 없네….
“…헤헤. 요 복근! 요 복근! 이 요망한 복근!”
…진짜로 정상이 없어.
어느새 기력을 되찾은 모양인지, 이세영은 괴이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을 파묻고 있는 통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가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이 보나 마나 음험하게 헤벌쭉한 미소를 가득 띤 상태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
이세영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것은 그녀의 칭얼거림을 꽤 오랫동안 받아낸 뒤였다.
그동안 그녀는 내가 실종당한 동안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는지, 그동안 내 흔적을 탐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왔는지 등등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고생이 많으셨군요.”
나를 공격한 것에 대한 기나긴 사과를 마지막으로 마침내 이세영의 말이 끝났다.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 10년은 족히 늙어버린 느낌이 들어,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용호 씨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졌네요. 고마워요.”
어쩐지 후련한 표정이 된 이세영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뒤늦게나마 조금 전 보여줬던 그 망가진 모습을 수습하려는 모양이었지만….
글쎄, 그 모습이 좀 인상 깊었어야지.
“흠흠. 그런데 회포나 풀기 위해 저를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실까요?”
책상 쪽으로 다가간 이세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내게 찾아온 목적에 관해 물었다.
물론,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약간의 장난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세영 씨가 영상 편집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셨다고 들어서요.”
신지현의 말에 의하면, 뜻밖에 이세영은 영상 편집 쪽에 놀라운 재능을 보유하고 있단다.
정보단체에 속한 인물들이 으레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이세영은 그 신지현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대단한 정보조작, 아니 ‘편집’ 실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태백 길드 상부층과 ‘협상’할 때도 그녀의 편집기술이 제법 유용하게 쓰였다니까, 이번 일에도 큰 활약을 할 수 있겠지.
“아! 네네. 너튜브에서 화제가 됐었던 ‘그 헌터 끝내주게 잘생겼다.’가 제가 편집한 영상이에요!”
영산 편집을 언급하자 이세영의 눈빛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런데. 어째 동영상 이름이 묘하게 불안한데. 설마, 아니겠지?
“한번 보시겠어요?”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린 이세영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해,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세상에. 이거 접니까?”
“네네! 설용호 님 총집편! 잘나가는 헌터들은 하나씩 있다는 매드 무비에요.”
이세영이 보여준 영상은 그 썸네일부터 심각한 시각적 압박을 선사해왔다.
상반신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내 모습이라니….
도대체 이 사진은 어디서 구한 거지? 아니, 애초에 난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고!
“…영상 자체는 잘 만드셨네요?”
“그쵸? 그쵸? 태백 길드에서 공식 홍보영상으로 쓰겠다고 그러더라구요!”
심히 부담스럽게 편집된 통에 민망함이 스멀스멀 몰려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상 자체의 퀄리티는 굉장한 수준이었다.
태백에서 오래전에 공개했던 조악한 화질의 CCTV 영상과 언론에 보도되었던 짤막한 영상만으로도 이세영은 한편의 훌륭한 영화를 뽑아낸 상태였다.
“…예. 그렇다면 믿고 맡길 수 있겠네요. 우리 영화 한 편 만들어 봅시다.”
쓸데없이 뛰어난 편집기술을 지닌 이세영의 합류로 모든 것이 갖춰졌다.
남은 것은 이제, 아모스의 공작질에 대항할 명작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