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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 잘생겼다!-98화 (98/309)

제98화

[한 방 먹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린 게냐? 본존의 눈엔 훌륭하게 박살낸 모습만 보인다만.]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에 위철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자신이 뭔가 놓친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려는지, 그의 시선이 처참하게 분해된 중년인의 시신 쪽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들이 영상으로 찍혀, 고스란히 아모스 쪽에 넘어가 버렸거든요.”

맥없이 중얼거린 나는 허리를 숙여 중년인의 몸에 장착된 보디캠을 주워들었다.

보디캠은 짐작했던 대로 중년인이 착용한 유틸리티 벨트 속에 교묘히 감춰져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해봐야, 네놈이 쳐들어온 오행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 말고 더 있느냐?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게야.]

최근 들어선 제법 하계의 현대문물에 익숙해졌다곤 하나, 위철용에겐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즐비해 있는 미지의 세계인 듯했다.

침중하게 중얼거린 내 설명을 듣고도 그는 얼굴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후우. 놈들이라면 전후 사정을 전부 편집해서 잘라내고, 제가 오행 길드원들을 학살한 장면만으로 훌륭한 선동용 자료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슬쩍 한숨을 내쉰 나는 위철용에게 자세한 내용을 부연해 설명해줬다.

뒤늦게 무슨 말인지 이해한 모양인지, 위철용의 표정이 나와 비슷한 형태로 와락 구겨졌다.

[허어. 참으로 사특하면서도 간악한 종자들이로고. 그래, 뒤에서 그따위 수작질을 하는 것은 예로부터 밸 없는 놈들의 주특기였지 그런 놈들은 콱 그냥 눈알을….]

위철용은 으스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해부학적 지식이 충만하게 포함된 욕설을 쏟아냈다.

그의 욕설은 언제 들어도 인체의 신비를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할 정도로 유익하기 짝이 없었다.

위철용의 욕설에 힘없이 웃은 나는 보디캠을 손바닥 위에 올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헛! 허면. 지금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그 영상이란 놈이 아모스 쪽에 넘어가기 전에 가로채야 하지 않겠느냐?!]

순간,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위철용이 다급한 목소리로 어서 영상을 가로챌 것을 제의해왔다.

하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아뇨, 이미 늦었어요. 조금 전의 영상들은 진즉 서버에 저장된 상태일 거예요.”

중년인의 시신에서 찾아낸 보디캠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다.

주변의 모습들을 상세히 기록한다기보단, ‘은밀함’ 자체를 노린 모습으로 미뤄보건대, 이 보디캠은 실시간으로 클라우드에 자료가 저장되는 타입이 분명했다

때문에, 오행 길드로 위장한 강마병들이 태백의 무고한 직원들을 학살하는 영상과 내가 그들을 잔혹하게 처단하고 고문하는 영상은 이미 아모스의 손에 들어간 상황이 되어버렸다.

[서…서 뭐시기? 크흠! 아,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늦었다고 딱 잘라 단정할 수 있는 일은 없거늘!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대로 당하고 넘어간다는 것이 분하지도 않은 게야?]

여러모로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위철용은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나를 노려보며 따지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고구마를 잔뜩 베어 물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한 심정이 강렬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뭐…. 한 방 먹긴 했는데, 그냥 당하고 넘어간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참을 말없이 보디캠을 살펴본 뒤.

위철용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조금 전까지. 분명 계속 비관적인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지 않았었느냐!]

뜬금없이 능글맞은 미소와 마주한 위철용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확실히 조금 전까진 계속 ‘이미 넘어갔다.’니 뭐니 하는 비관적인 소리를 좀 하긴 했지.

실제로 이미 아모스 놈에게 한 방 얻어맞은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야….

“그랬죠. 그게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냥 당하고 넘어갈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그냥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얻어맞기엔 내 성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계속해서 가만히 보디캠을 바라보기만 한 것도 무력하게 화를 삼키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 놈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을까 궁리하던 중이었지.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한 방 맞은 덕분에 ‘쓸 만한’ 계획 하나를 떠올리기도 했고 말이야.

-우직!

위철용을 바라보며 씨익 웃은 나는 보디캠을 분해해 내부의 메모리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쪽에서 영상을 교묘하게 편집해, 선동용 자료로 쓰겠다면 말이죠. 이쪽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받아쳐주면 그만이잖아요?”

아모스에겐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애석하게도 내겐 이쪽 방면에 출중한 재능을 지닌 인재가 두 명이나 있었다.

***

불타는 태백 길드 본사 건물을 나선 뒤.

나는 대단히 당황한 표정의 서민혁에게 뒷수습 전반을 맡겼다.

뒤늦게 출동한 구급대며, 몰려든 방송국 기자, 협회 관리자들을 맞이하는 서민혁이 곤혹을 겪는 사이, 나는 신지현이 머물고 있다는 오피스텔 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이 양반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요?”

[글쎄다. 그걸 왜 본존에게 묻는 게냐?]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신지현의 오피스텔 앞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분리수거조차 되지 않은 쓰레기봉투들이 마치 산맥을 이루듯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텅 빈 위스키 병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진열된 채로 복도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딩동! 딩동!

경쾌한 벨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우렁우렁 퍼져나갔지만, 내부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인사부 직원들 증언에 따르면, 회의가 끝난 이후 곧장 자신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매니저님? 매니저님! 계십니까?”

가볍게 힘을 주어 문을 쾅쾅 두드리자, 그제야 내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스락바스락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오는 발걸음이 느껴졌다.

“아,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오래간만….”

“딸꾹! 뭐야. 오늘 아직 두 잔밖에 안 마셨는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신지현의 모습은 가관이 따로 없었다.

조금 전 간부 회의에 참석했었다는 것이 진실인가 의심될 정도로 그녀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양손에 위스키 병을 들고 독한 위스키를 병나발째 불고 있는 모습이야 익숙하다 쳐도.

평소 입고 다니는 가죽 갑옷형 코트 위에 계절에 맞지 않는 알로하 셔츠를 겹쳐 입은 것과.

양다리에 복실복실한 수면 바지를 한쪽만 입은 모습이란, 세기말 감성이 따로 없었다.

“끄윽! 설용호! 그 개자식은 말이야. 말만 번드르르하게 해놓고 뒈져서는 날마다 이렇게 환영으로 나타나기나 하고!”

-꼴꼴꼴

잔뜩 얼굴을 찌푸린 신지현은 손에 든 위스키 병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의 목젖이 움직일 때마다 위스키 특유의 독한 스모키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저, 매니저님? 매니저님?”

“…뭐여? 오늘은 왜 이렇게 흔들려? 아이씨. 오늘 세잔밖에 안 마셨는데.”

불콰하게 취한 채로 헛소리를 해대는 신지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술병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세잔? 설마 이 아줌마는 병나발을 ‘잔’ 단위로 계산하는 건가?

“어어? 아직도 안 사라지네에? 에이씨. 뒈진 놈 말 안 들어요. 꺼져!”

취권을 수련하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대던 신지현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러왔다.

감정이 실린 모양인지, 그녀의 주먹엔 일반인치곤 제법 매서운 힘이 실려 있었다.

-콰악!

계속되는 술주정에 가볍게 한숨을 쉰 나는 그녀의 주먹을 손으로 붙잡아 멈춰 세웠다.

그리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도를 실어 붙잡은 주먹에 슬쩍 힘을 실었다.

-꾸드드득!

순간적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악력이 신지현의 주먹을 조였다..

그녀의 얼굴이 허옇게 변한다 싶더니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야야…. 뭐야? 이게 왜 만져져? 어? 어어?”

붙잡힌 주먹을 빼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신지현의 손이 내 몸에 닿았다.

단단한 가죽 갑옷에 손이 스친 순간,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사, 살아 있었어요?”

술에 취해 불그죽죽하던 얼굴색이 원래 색을 되찾았다.

축축 늘어졌던 목소리엔 또렷한 총기가 다시 돌아왔다.

흐리멍덩하게 풀린 채 죽어있던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을 되찾은 신지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내게 뒤늦은 안부를 물어왔다.

“예…. 뭐 죽지는 않았고 어떻게 살아는 있네요.”

갑작스러운 신지현의 태도 변화에 쓰게 웃은 나는 최대한 따뜻한 미소를 유지하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줬다.

“…….”

끄응. 이거 어째 귀찮게 될지도 모르겠군.

신지현의 불그스름한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괜히 안겨 와선 있는 말 없는 말 다 털어놓는 것이 약속된 전개….

-쫘아악!

어라?

하지만 신지현의 반응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펑펑 울면서 은근슬쩍 달려들 줄 알았는데, 나를 반겨준 것은 그녀의 매콤하면서도 맛깔난 따귀였다.

“크으으윽! 쓰읍! 헌터라는 인간들은 정말이지! 짜증나게 튼튼하다니까!”

소리는 제법 요란했다만. 애석하게도, 신지현의 따귀는 내게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따귀를 날린 그녀 쪽이 퉁퉁 부어오른 손바닥을 부여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래! 살아있을 줄 알았지. 우리 헌터님이 누군데! 얼마나 건강해! 얼마나 튼튼해!”

요란스레 말하면서 퍽퍽 내 가슴을 두들기는 신지현의 손길은 그녀답지 않게 제법 매서웠다.

한 대 한 대 때릴 때마다 원망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했다.

“예…. 늦어서 미안합니다. 저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사정? 사정은 무슨! 제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요? 그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고생의 연속!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야지! 아암!”

…아무래도, 그동안 쌓인 게 제법 많았나 보군.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나와 신지현은 한배를 탄 상태로 아모스를 공격하던 중이었으니까.

내가 갑자기 덜컥 게이트에서 실종되어버렸다니, 총명한 그녀로선 하루하루가 목숨을 위협받는 위기의 연속이었겠지.

“다음 계약금 정산일 때 두고 보자고요!”

그나저나, 신지현답다면 신지현답달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보자마자 이런 반응이라니….

어느새 품속에서 빼든 계약서를 나풀거리며 소리 지르는 신지현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어느 정도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시간이 지나간 뒤.

나는 신지현에게 태백 본사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헌터님 오자마자 사고 한번 거하게 치셨다. 그쵸?”

오행 길드로 위장한 이들의 보디캠 이야기가 나오자, 신지현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했다.

위스키 대신 꺼내든 토닉워터를 한 모금 들이킨 그녀는 대놓고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책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길드 본사 건물이 불에 타고 있기도 했고, 흉수 놈들도 거기 있었는데.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나 역시 거리낄 게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한 행위는 길드를 보호해야 하는 산군의 의무에 충실한 행위였으니까.

원론적으론 내가 잘못한 짓은 하나도 없지.

“으으윽. 여전히 한 마디도 질 생각을 안 하시네요. 대놓고 그쪽에게 놀아난 주제에.”

숙취인지, 아모스에게 넘어간 영상 때문인지. 신지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절 찾아오신 건데요? 이미 영상은 다 넘어갔다면서요.”

“영상은 여기에도 하나 있죠.”

주머니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낸 나는 신지현을 향해 빙글거리며 웃었다.

“영화 한 편 찍어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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