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89화 (89/309)

제89화

허공에 흩날리는 천 조각을 발판 삼아 계속해서 겅중겅중 공중을 노닌 끝에, 나는 마침내 무사히 대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탁!

굳건한 대지 특유의 단단한 질감이 발끝에 느껴진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충만하게 차올랐다.

“흐억! 흐어어어….”

곧이어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지상에 도착한 것에 딱 맞춰서 깔맞춤 스킬이 해제되었다.

초월적인 인지능력 속에서 계속 유지해왔던 극한의 집중 상태가 저절로 스르륵 풀려 버렸다.

긴장이 풀린 입에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환희, 수천 미터 상공에서 나를 떨어뜨려 준 나슈리크에 대한 원한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농축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토해졌다.

-털썩

긴장이 풀리자, 다리의 힘도 스르륵 풀어졌다.

휘청,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나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를 위한 안배라더니, 까닥하면 뒈질 뻔했네.”

예고 없이 상공 수천 미터에서 사람을 떨궈놓는 것이 그 빌어먹을 ‘안배’의 일종이라면, 앞으로 어떠한 보상을 쥐여 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찬탈이 전쟁이고 나발이고, 하마터면 또다시 이승에서 사출될 뻔했으니 말이지.

[몸 성히 착지해서 참으로 다행…. 네놈을 위한 안배라고?]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고 있으려니,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내 몸을 살펴보던 위철용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혼잣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조화인 게냐? 게이트는? 유적은? 신전은?]

위철용은 나슈리크와 관련된 일에 대해 전혀 모르겠군.

나슈리크와의 만남은 먼젓번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으니까….

“그게 말이죠. 실은 지난번처럼 시간이 멈춘 뒤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혼란에 빠져 있는 위철용에게 나슈리크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이섬 게이트와 얽혔던 일련의 부자연스러운 개입의 배후, 나를 위해 그들이 준비해 놓은 안배, 마지막으로 찬탈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슈리크가 언급했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위철용에게 털어놓았다.

[찬탈의 전쟁이라….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 나슈리크인가 뭔가 하는 수상한 놈, 소설가 쪽에 제법 비상한 재능을 보이는 것 같구나.]

“예? 그쪽에선 무슨 수억 번 반복되어온 일이라는데요? 게이트가 발생한 이유도….”

[헛소리. 게이트가 발생한 이유는 ####…. 빌어먹을 인과율 같으니!]

놀랍게도 위철용은 찬탈의 전쟁이란 개념 자체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아니, 그것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수준을 넘어, 그는 나슈리크가 언급한 내용 전체를 헛소리니 소설이니 뭐니 하는 말 한마디로 일축하며 부정해버렸다.

뭐 그따위 헛소리를 순진하게 다 믿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위철용의 입가엔 고약하게 비틀린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한때 성좌였던 위철용이라면, 나슈리크가 언급한 찬탈의 전쟁에 대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반응이지? 찬탈의 전쟁이 나슈리크의 헛소리라고?

“새로운 질서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전쟁으로 인해, 게이트가 열린 것이라 그러던데요? 마족들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니까. 본존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하계를 살펴온 줄 아느냐? 하계의 문명이 쇠하고 흥하는 광경을 지켜본 것만 해도 네놈의 나이만큼은 되느니라. 그런데 그 찬탈의 전쟁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세상의 질서가 수억 번이나 변했다고? 웃기는 소리!]

위철용은 계속해서 조롱과 비웃음이 섞인 말투로 찬탈의 전쟁 자체를 부정했다.

그가 자신이 하계를 관측해온 까마득한 세월을 직접 언급하며,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노라 확신하는 통에 내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뭐지? 정말 위철용 말대로 나슈리크가 나를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가?

[마족이라는 놈들의 설명 또한 기가 막히는군. 그 하찮은 낙오자 놈들 따위가 세상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 성좌에게 도전하는 세력이라고? 하! 우스갯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지!]

“하찮은…낙오자들이라구요? …그러네요?”

마족을 하찮은 낙오자라 얕잡아보는 위철용의 오만한 발언 덕에 나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의문점을 하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마족이랑 성좌 사이에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 있기는 한 건가?

[당연하지! 승천에 실패해 필멸의 육신조차 벗지 못한 얼간이들이 그 마족이라는 놈들의 정체이니라, 필멸자 따위에게 손쉽게 영멸당하는 놈들 주제에 감히 성좌에게 도전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랬다.

위철용의 말도 그렇고, 내가 알기로도 마족들은 성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지난번에 아모스가 보여준 능력이 어마어마하긴 하나, 성좌들이 종종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이적 행위와는 감히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강력한 능력을 보여준 아모스조차, 남이섬 게이트에서 충분히 성장한 지금의 나라면 얼마든지 사냥이 가능한 수준에 불과했다.

회귀 전을 기준으로 해봐도 고작해야 성좌가 지닌 힘의 편린에 불과한 ‘화신’이 수백의 마족들을 학살하는 위력을 보여 줄 만큼, 성좌들은 마족과는 ‘격’ 자체가 다른 엄청난 존재들이었다.

[네놈을 좋다고 지켜보는 그 얼간이 성좌 놈들조차, 어지간한 마족 따위가 떼로 덤벼봐야 손가락 하나로 몰살시킬 수 있는 족속들이니라. 찬탈의 전쟁? 흥! 어디서 같잖은 소리를!]

아무래도 찬탈의 전쟁이란 개념 자체가 위철용에겐 일종의 모욕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어딘지 불쾌함이 느껴지는 듯한 표정으로 비웃음 가득한 콧방귀를 뀌어댔다.

“끄응. 하지만 그의 말 하나하나가 왜인지 계속 마음에 걸린단 말이죠….”

[그거야, 놈이 보여주었던 능력 때문이 아니겠느냐? 헛소리에 비상한 재주를 지닌 놈이긴 하다만, 보여준 능력 하나만큼은 본존도 깜짝 놀랐을 만큼 기묘한 것이었으니. 네놈에겐 오죽 대단하게 느껴졌겠지.]

나슈리크의 능력을 언급한 순간, 위철용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불쾌함을 가득 품고 찡그려졌던 얼굴이 이번엔 걱정과 우려를 품고 진중하게 변했다.

확실히…. 나슈리크가 했던 말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그가 보여줬던 능력은 엄청난 것이긴 했으니까.

어쩌면 위철용의 말대로 나는 나슈리크의 신비한 능력과 분위기에 압도당해 그의 말에 강렬한 신뢰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런 것치곤 계속 찬탈의 전쟁이란 단어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여하튼 그런 놈이 준비한 것이니만큼, 본존은 그 ‘안배’라는 말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구나. 뭔가 던져주면 좋다고 무작정 덥석덥석 받아먹는 멍청이를 옆에 둔 덕에 더더욱 말이지….]

“아니, 제가 공짜를 좀 좋아하긴 해도, 수상한 냄새 풀풀 풍기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주워 먹는 얼간이는 아니거든요?”

갑자기 훅 들어온 멍청이 취급에 발끈해서 위철용에게 항변은 했다만, 뭐…. 좀 찔리긴 하네.

[그런 것치곤 네놈 스스로도 찔리는 눈치인 것 같다만?]

***

“그나저나, 여긴 도대체 어딜까요?”

풀 내음이 가득한 대지 위에 털썩 주저앉은 상태로 위철용과 대화를 나눈 사이, 헌터 특유의 초월적인 재생능력이 다리의 부상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하게 자라있는 나무와 이름 모를 식물들뿐이었다.

분명 지하 8층은 보랏빛으로 가득 차 있던 폐허였는데 말이지…. 설마 지하 9층으로 이동한 건가?

[글쎄다. 헌데, 그걸 왜 본존에게 묻는 게냐?]

“저야. 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동안 천 쪼가리에 정신을 집중한 통에 다른 것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혹시 뭐라도 보신 게 있나 해서요.”

[그야 본존도 네놈만을…. 크흠! 본존이 그놈이 장난질한 게이트의 구조를 알 리가 있겠느냐. 어리석긴.]

아무 생각 없이 내게 솔직히 답하려던 위철용의 얼굴이 갑자기 벌겋게 물들었다.

중간에 말끝을 흐린 그는 주로 민망할 때 튀어나오는 예의 과장된 헛기침을 섞으며 툴툴거리는 말투로 내게 독설을 톡 쏘아붙였다.

“생각해보니 그러시겠네요. 아무렴, 설마 우리 어르신께서 절 걱정하시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을 리가….”

[크흠! 큼! 그렇지. 본존은 그 간악한 놈의 수작이 놀라운 것뿐이니라.]

거,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네.

위철용의 솔직하지 못한 태도에 속으로 낄낄 웃은 나는 땅을 박차며, 운룡보를 발동시켰다.

-파팟!

땅을 한 번씩 박찰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정신없이 휙휙 바뀌었다.

하지만 제법 먼 거리를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식물과 나무들이 제공하는 갈색과 초록색의 지루한 데칼코마니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이섬 게이트 내부에 이 정도로 광활한 숲이 있었던가? 설마. 다른 세계에 떨어져 버린 것이….

“정지! 거기 누구…. 어라? 설용호 헌터님 아니십니까.”

…아니었군.

끝없이 펼쳐진 나무와 식물의 향연에 괴상한 생각이 머리에서 이어지려던 찰나, 초록색으로 가득 찼던 시야가 확 넓어지며 낯익은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유의 검은색 갑옷을 차려입은 순박한 인상의 청년들, 설악 공격대의 공격대원들이었다.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온 나를 경계하며 무기를 치켜든 그들은 내 얼굴을 확인한 뒤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는 아니지. 설악 공격대? 게이트 조사는 저 혼자 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예상치 못한 인물들과 마주친 탓인지 내 입에서도 순간적으로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간신히 튀어나온 헛소리를 수습하며 정신을 가다듬는 데는 성공했지만, 설악 공격대를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엔 의문 부호만이 한가득 떠올랐다.

뭐야? 얘네들이 도대체 왜 게이트 내부에 들어와 있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내 질문과 마주한 설악 공격대원의 얼떨떨한 얼굴에도 의문 부호가 한가득 떠올랐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왜 굳이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의문이 서린 표정이었다.

…당연하다고? 아차! 설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 나를 구조하기 위해 들어온 건가!

“이런! 시간이 너무 지체된 탓에 저를 구조하러 들어온 거군요. 보시는 바대로 저는 멀쩡합니다.”

박정욱에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통보는 해둔 상태였지만, 지금의 상식으로는 게이트에서 일주일이나 연락이 두절 되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신변의 위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박정욱이 휘하의 공격대원들을 지휘해, 구조대를 파견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난 층은 전부 내가 공략한 상태인 데다. 지하 8층이 그렇게 붕괴해버린 탓에 이곳 지하 9층까지 도달하기란 쉬운 일이었을 테니. 설악 공격대가 이곳에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저기…. 설용호 산군님? 게이트라니. 여긴 남이섬 관리 센터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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