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끼기긱.
관절을 기괴하게 삐걱거리며 다가온 나슈리크의 생김새가 상세히 눈에 들어왔다.
청동으로 주조되었는지 푸르스름한 빛을 띤 얼굴은 로마 장군들의 그것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속 재질의 입은 근엄한 표정 그대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물어진 입 부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과율의 이방인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기괴한 동상, 나슈리크가 나를 지칭했던 단어를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웅얼거렸다.
생소한 단어의 나열을 입안에서 뒹굴뒹굴 굴려 봐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생소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위철용이 그동안 주구장창 저주해오던 인과율이라는 단어와 그것에서 벗어난 ‘이방인’이란 단어가 도저히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조합되지 않았다.
위철용 말대로라면, 인과율이란 성좌들조차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법칙이라는데….
내가 그런 엄청난 것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인과율의 이방인이시여.』
높낮이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마친 나슈리크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풍화 속에 깎여나간 동상의 눈 부위에서 맺힌 안광이 내 쪽을 향했다.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이 판을 치는 게이트에서 안광을 뿜어내는 동상 정도야, 지극히 평범한 축에 들어가는 정도였지만…. 왜인지 나는 그런 나슈리크의 모습이 두렵게 느껴졌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마치 몬스터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공포가 내 심장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날 부르는 게 맞긴 하나 보네. 그러니까…. 세월 속의 망령 양반? 그쪽은 대체 뉘시길래. 나를 그따위 기묘한 단어의 조합으로 부르는 거지? 혹시 그런 식으로 오그라드는 별명 붙여주는 게 그쪽 취미야?”
심장을 갉아먹는 공포와 뇌로 침투해오는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뻣뻣하게 얼어붙는 주먹을 꽉 틀어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농담을 섞어가며 나슈리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월 속의 망령, 몰락한 세계의 파수꾼, 영락한 절대자…. 억겁의 시간 속에서 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대의 상식을 기준으로 저는…. 한때 성좌라고 불렸던 존재, 정확하게는 그들을 이끌던 우두머리였다고 할 수 있겠군요.』
긴장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던진 질문이 엄청난 대답을 들고 돌아와 버렸다.
나슈리크가 스스로 밝힌 그의 정체는 초라한 외형에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불려 왔던 나슈리크의 또 다른 이름들 역시,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았다.
성좌씩이나 되는 존재들을 거느렸던 존재라니…. 그런 존재가 이런 식으로 몰락해버렸다고?
“누가 누굴 이끌어…? 성좌들 귀에 들어간다면 불경하다며 난리를 쳤을 법한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자빠지셨네. 지금 그쪽이 지껄이는 소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머릿속에 든 의문은 다른 의미에서 공포를 몰아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몸을 조금씩 풀어가며, 나는 일부러 과장된 의심을 듬뿍 섞어, 나슈리크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곤 그를 떠보기 위해,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이죽거리며 슬쩍 나슈리크의 반응을 살폈다.
『당연합니다. 저는 그저 끊임없이 흘러온 투쟁과 찬탈의 세월 속에 파묻힌 망령에 불과하니까요. 지금의 승천…. 아니, 성좌라는 존재들은 제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비아냥과 의심이 섞인 무례한 질문에도 나슈리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에서 새어 나오던 안광이 마치 웃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에서 또다시 낯선 개념들의 향연이 둑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투쟁과 찬탈의 세월? 승천…어쩌고?
-파츠츠츠츠
역시 알아듣지 못할 소리의 향연이 이어질 땐, 화안금정을 써먹어 보는 것이 최고다.
최소한 그런 생소한 단어들이 뜻하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가려주니까 말이지.
장마철 쓰나미처럼 범람해오는 낯선 단어들의 홍수에 나는 화안금정을 발동시켰다.
내 두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자, 여느 때처럼 내 시야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슈리크의 머리 위엔….
『??』
“…뭐?”
나슈리크의 머리 위에 떠오른 것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었다.
그의 머리 위엔 화안금정을 습득한 이래 처음 보는 물음표가 두 개나 떠올라 있었다.
화안금정이…. 먹히지 않는다고?
『그리운 눈이로군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남긴 파편만으론 저를 꿰뚫어 보지 못할 겁니다.』
내 눈을 바라본 나슈리크의 안광이 그리움에 젖은 듯 묘한 습기를 머금었다.
놀랍게도 그는 화안금정이 무엇인지, 또 그것의 원주인이 누구인지까지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대가 갑자기 기이한 말들을 늘어놓는 저를 신뢰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지닌 제 벗의 눈에 맹세컨대. 저는 그대에게 오로지 진실만을 전할 것입니다.』
나를 대하는 나슈리크의 태도는 과할 정도로 공손함을 담고 있었다.
외형은 그렇게 호감이 가는 생김새가 아니었지만, 그의 말투만큼은 한결같이 정중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 즉 그의 눈에 맺힌 안광 역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주황색으로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쪽에서 아무리 진실이니 뭐니 떠들어 봐야….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하지만 나슈리크의 공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겐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나슈리크와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그 꺼림칙한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이 빚어낸 의심이 마음속 한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계속해서 내게 그에 대해 삐딱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인과율의 이방인이자 규격 외의 존재. 언젠가는 제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아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규격 외의 존재라고? 그건 또 무슨….”
나슈리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규격 외의 존재’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박혀있던 가시에 걸려들었다.
“…!”
왜인지 가슴이 선득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풀어헤친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
불안한 감정에서 비롯된 으스스한 한기가 등골에 스며들었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그대는 모종의 이유로 인과율의 저주받은 굴레에서 완벽히 벗어난 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대를 규격 외 존재라고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지요.』
설마, 놈은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모종의 이유’에 강세를 둔 나슈리크의 말에 또다시 가슴이 선득 내려앉았다.
확실히 ‘규격 외의 존재’라는 단어는 지금의 나를 정의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단어였다.
난 위철용의 희생을 통해 비극적인 운명에서 탈출하여 과거로 회귀한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회귀한 뒤로도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정해져 있었던 역사의 흐름을 계속해서 뒤틀어 오기도 했으니….
나라는 놈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격’이란 개념에서 충분히 벗어났다고 봐도 무방한 존재였다.
“…모종의 이유로 내가 규격 외의 존재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혹시 그 ‘모종의’ 이유라는 게, 이 잘생긴 외모 아닌가? 고고하신 그쪽 입장에선 이 잘생긴 외모를 직접 언급해주기 민망해서 돌려 말하는 거지?”
치명적인 비밀을 들킨 것만 같은 예감에,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동요한 마음을 들키는 것은 더 큰 손해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나는 동요하지 않은 척. 태연한 목소리로 농담을 섞어가며 나슈리크에게 떠보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외모 역시 훌륭하기에 그것만으로도 규격에서 벗어났다 칭할 수 있겠습니다만…. 애석하게도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내게 진실만을 전해줄 거라 맹세하지 않았어? 속 시원하게 어디 이유라는 걸 좀 솔직히 털어놔 봐.”
계속해서 무례한 태도로 일관해도 나슈리크는 내 무례함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살짝 입술을 깨문 나는 관자놀이에 겨눈 러시안룰렛의 방아쇠를 당기는 심정으로 나슈리크에게 ‘모종의 이유’에 관해 물었다.
『숨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인도석. 어떻게 된 일인지 필멸의 존재에게 그것이 흡수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그대는 인과율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로 거듭났지요.』
…다행이야. 회귀한 것 때문이 아니었군.
다행히도 나슈리크가 규격 외의 존재 어쩌고를 운운한 ‘모종의 이유’는 내가 걱정한 것과는 다른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혹시나 회귀한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뭔가 제약이 생기나 했…. 잠깐만, 뭐라고?
“…인도석?”
하지만 이번에도 나슈리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답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질의 것이었다.
‘모종의 이유’는 그야말로 전혀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인도석. 적어도 내가 아는 아이템 비스름한 것 중 ‘인도석’이란 이름 석 자가 들어있는 것은 별자리 인도석이 유일했다.
혹시…. 이번에도 낙오자들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랑 연관된 건가?
『찬탈과 투쟁의 전쟁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하지 못해 낙오자로 추락한 가엾은 이들, 승천을 위해 노력했으나 필멸의 굴레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해 낙오자로 남아버린 불쌍한 이들, 권좌를 찬탈당해 낙오자로 영락한 나약한 얼간이들…. 그대가 품은 인도석은 다양한 이유로 낙오해버린 낙오자들을 위로하여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 같은 힘입니다.』
역시 낙오자와 관련이 있었군….
위철용과 티르리니가 입에 담았었던 ‘낙오자’가 나슈리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별자리 인도석의 원래 용도는 낙오자라는 존재로 영락한 이들을 달래주며, 그들을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물건인 것 같았다.
“낙오자라는 자들의 힘을 빌려 쓰며, 그들의 기억을 엿보는 것이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행위인가? 어째 내가 아는 인도석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나슈리크가 말한 별자리 인도석의 원래 용도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사용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회귀 전엔 별자리 인도석의 형태로 반쪽짜리 헌터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용도로 활용되었고, 회귀 후엔 내게 흡수된 채 낙오자들의 진혼곡이라는 스킬이 되어 낙오자들의 능력과 기억을 빌려오는 용도로 쓰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용례가 용례인데, 안식이나 구원이란 단어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좀 많이 멀지 않나?
『그런 방식으로나마 그들은 세상에 남긴 한을 풀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대가 낙오자들의 힘을 휘두르며, 그들의 기억에 공감할수록 그들의 넋은 그대를 통해 스스로를 옥죄는 미련들을 털어내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쩐지 하나같이 우울한 기억뿐이더라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망령들을 위한 사후 트라우마 치료실 같은 느낌인 게로군.
가면 놀이 스킬을 사용하면서 낙오자의 일원인 ‘벗에게 독살당한 광대’의 힘을 빌려 쓸 때마다, 내 머릿속에 동기화되어 흘러들어온 그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암울한 것들이었다.
낙오자라는 이름에 맞게 암울한 삶을 살아온 양반인가 했는데, 그것들이 모두 그가 세상에 남긴 미련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낙오자들 심리치료 해주는 것이 인과율에서 벗어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얼핏 보기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과율의 이방인이시여. 그대가 인과율에서 벗어난 이유는 ###』
갑자기 인도석과 인과율의 사이에 얽힌 비밀을 말하려던 나슈리크의 목소리에 위철용의 그것과 같은 잡음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도 그들이 말하는 인과율의 속박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모두의 희생을 통해 간신히 확보해낸 귀중한 시간 속에서도 인과율의 저주받은 속박은 여전히 저를 옥죄고 있는 모양입니다.』
희생이란 단어를 언급한 나슈라크의 안광이 텁텁한 탄식을 품고 어둡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의 안광이 어둡게 물든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두운 감정 속에 시커멓게 물들었던 안광이 다시 강렬한 주황빛을 내뿜었다.
『허나, 저희 쪽에서도 인과율의 틈새를 통해 그대를 위한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었습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안배라는 단어를 피 토하듯 내뱉은 나슈리크의 안광이 태양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주홍빛 안광 속에서 나는 굳센 결의와 강렬할 열망을 옅볼 수 있었다.
…역시 내게 계속 개입해온 것이 댁이었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