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장식용 외골격에서 터져 나온 내력의 폭풍은 실험실 전체를 처참하게 박살 내 놓았다.
넓은 실험실 바닥 전체가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끝없이 늘어져 있었던 책상과 의자는 원래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꺼으으으.》
갈나르 역시 무사하지 않았다. 강인한 물리 내성을 지닌 언데드의 몸뚱이조차 내력의 폭풍 앞에선 피륙으로 이뤄진 나약한 육신에 불과했다.
놈의 거대한 몸에 붙어있던 근육과 피부는 걸레짝처럼 너덜너덜 찢겨나갔다. 내부의 강인한 뼈들이 폭풍우 속 나무들처럼 우지끈 꺾여버렸다.
《…나쁜 소식이에요. 여러분 교수님은 이제 살 것 같지 않아요.》
맥없는 목소리와 함께 갈나르의 두개골에서 새어 나오던 노르스름한 빛이 사그라들었다. 육중한 몸뚱이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위업 [수업 끝!] 달성!」
「칭호 [광기 어린 실험의 종결자]가 수여됩니다.」
「칭호 보상 – 능력치 보너스 포인트 [+10]」
「최초 위업 달성 보상!」
「최초로 위업 [수업 끝]을 획득하여, 특성 트리에 고유 특성 『육체와 영혼』이 추가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특성 포인트가 제공됩니다.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세요.」
「축하합니다! 30레벨 특전으로 『외골격 – 피에 젖은 갑주』 특성이 개방됩니다.」
갈나르가 숨을 거두자, 단숨에 레벨이 한 단계 올라, 나는 드디어 외골격을 형성할 수 있는 3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상했던 것처럼 최초 위업 달성 보상으로 목표로 했던 특성 『육체와 영혼』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안배 덕분인지 목표로 했던 것들이 단숨에 달성되어버렸다.
“후우우….”
일이 잘 풀린 것은 다행이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외골격을 찍을 수 있는 레벨을 달성하니, 조금 전 거금을 주고 구입했었던 장식용 외골격이 유독 더 아깝게 느껴졌다.
여전히 몸 위에서 화려한 외형을 뽐내고 있는 장식용 외골격의 쓸데없이 화려한 자태에 나는 아쉬움을 담은 한숨을 토해냈다.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하하하! 믿고 있었다고! 그 쓰레기 아이템을 그렇게 사용하다니! 역시 대단해!』
「축하합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흠. 누가 설용호를 의심했겠는가. 그쪽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가 그런 무의미한 낭비를 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네.』
…정말 믿고 있었어? 아까 낭비 어쩌고 하면서 실망하지 않았었던가?
레벨업으로 인해 존재력 포인트 보유 한도가 풀리자, 성좌들의 후원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내 가슴 아픈 소비를 낭비로 일축하던 모습과는 아주 딴판인 모습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회귀 후 처음 사용한 것치곤 제법이로다. 역시 본존이 잘 가르친 탓이지.]
왜인지 뽐내듯 가슴을 쭉 내민 위철용이 스스로를 추켜세우자, 내 입에 걸린 힘없는 헛웃음이 더욱 힘을 잃어버렸다.
한때는 성좌라는 양반들에게 조금이나마 존경심이 있었지만,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존경심이 퍽퍽 깎여나간단 말이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덕분이죠. …아깝긴 하지만.”
파천 복룡창의 암룡출동은 호신강기, 그러니까 외골격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초식이었다.
외골격에 내력을 주입한 뒤, 폭발시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파괴적인 초식이었지만, 외골격을 배우기 전까진 그림의 떡이나 다름이 없는 물건이었다.
장식용 외골격도 구입한 이유도 오로지 이 한방을 위해서였다. 외골격의 위력과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내력을 주입할 수 있는 매개체만 확보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에휴. 특성 트리 오픈.”
계속해서 차오르는 아쉬운 감정을 꾹 억누른 뒤, 나는 특성 트리를 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내 눈앞에 수십 개의 별로 구성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별자리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촤르륵 펼쳐졌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특성 트리 한가운데엔 그동안 잠겨있던 특성 하나가 개방되어 있었다.
『외골격 – 피에 젖은 갑주』
등급 : 희귀
설명 : 특성 트리의 고유 외골격을 습득합니다.
유난히 찬란히 빛나는 그 특성은 기대해왔던 외골격을 찍을 수 있는 특성이었다.
그동안 기대해 온 특성이니만큼 나는 한 치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새로 얻은 특성 포인트를 즉각 외골격에 투자했다.
「외골격 – 피에 젖은 갑주를 습득하셨습니다.」
「특성 트리에 남아있는 데이터에 기초해 외골격을 형성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스템 창의 메시지와 함께 특성 트리의 보랏빛 별자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진 빛은 보랏빛 빛무리가 되어 내 몸 위로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따스한 빛무리의 향연에 마치 딱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편안하면서도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차르르륵
내 몸에 내려앉은 빛무리가 내 내력에 반응하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공에 기반을 둔 특성 트리답게, 끝없는 고행의 길 특성의 외골격은 호신강기와 유사한 물건이다.
질기면서도 강인한 방어도를 자랑하며, 기본적으로 내 내력에 기반을 둔 놈이기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놈이란 소리지.
이제 외골격도 얻었으니, 본격적으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겠…어라?
「특전 『외모지상주의』의 숨겨진 효과가 발동합니다.」
「외모지상주의 효과에 따라 외골격 『투신의 갑주』가 『미의 화신』으로 진화합니다.」
뭐? 뭐가 어떻게 바뀌었다고?
요긴하게 써먹었던 외골격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해괴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외모지상주의의 숨겨진 효과 때문에 외골격이 진화한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차라라락!
칙칙한 보랏빛 갑옷 형태로 형성되던 외골격에서 갑작스레 황금빛 광채가 뿜어졌다.
검은 가죽 갑옷 위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황금빛 외골격이 형성되었다.
“…뭐여 이건.”
『미의 화신』이란 거창한 이름답게 형성된 외골격의 형태는 굉장히 특이했다.
깔끔한 금빛 양복 같으면서도, 군데군데 알알이 박혀있는 보석들 덕분에 예스러우면서도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회귀 전, 항상 달고 살았던 피에 젖은 갑주와는 아예 생긴 것부터 차원이 달랐다.
[애, 애송이 네, 네 이놈 도대체 그 모습은….]
쓸데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골격에 할 말을 잃고 있으려니, 멍하니 바라보던 위철용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촉촉한 핑크빛을 머금은 그의 녹색 얼굴에선 당황과 황당,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양반은 뭘 잘못 잡쉈나. 새삼스레 왜 이래?
“갑자기 또 왜 그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외골격이….”
[흐어억! 어째서 본존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뭐여…?
나와 시선이 닿은 위철용은 황급히 고개를 홱 돌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위철용의 얼굴이 마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의 풋사랑처럼 수줍은 빛을 띠었다.
「축하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걸작입니다! 정말이지 이젠 죽어도, 아니 소멸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가면을 쓴 족제비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흐흑. 오빠…. 절 가져주세요.』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르르 못 참겠다! 설용호! 내가 당장 그쪽으로….』
「관리자.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고통을 모르는 병사의 의사소통을 제한시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성좌들의 반응 역시 열광적인 수준을 뛰어넘었다.
붉은빛 홀로그램 창이 성좌들의 후원 메시지와 감정 표현으로 쉴 새 없이 도배되었다.
주르륵 올라오는 메시지에선 왜인지 불쾌한 열기가 후끈후끈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길래….”
성좌들과 위철용의 해괴한 반응에 상태창을 확인해 본 나는 그대로 멈칫 굳어 버렸다.
상태창에 떠오른 새로운 외골격은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외골격 - 미의 화신』
등급 : 초월
설명 : 발동시간 동안 외모지상주의의 모든 효과가 2배가 됩니다.
…외모지상주의의 모든 효과가 2배가 된다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효과에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외모지상주의의 효과는 외모와 매력 수치가 극한까지 보정된다는 것인데. 그걸 2배로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달칵.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을 빼 들어 얼굴을 비쳐 본 순간.
내 입에선 얼빠진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5인치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사내다운 호방함이 잘 살아있는 눈썹은 일류 화가가 그려낸 듯 완벽한 형태를 자랑했고. 서글서글하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눈은 반짝이는 은하수를 품고 있었다.
오뚝 솟아오른 콧대는 배의 돛대처럼 완벽하게 얼굴의 밸런스를 잡아주고 있었으며, 루비처럼 붉은 입술은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마력과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 강한 폭력성을 품고 있었다.
잘생겼다는 개념에 수치를 감히 부여할 순 없겠지만, 2배라는 수치가 이해가 갈 정도였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기존의 내 외모가 2배씩 업그레이드 된 듯 폭력적일 만큼 잘생긴 외모였다.
[크윽. 진정해라 위철용. 저것은 설용호다. 네놈이랑 똑 닮았던 그 설용호다….]
오죽하면, 내 얼굴에 슬슬 익숙해졌던 위철용마저 스스로 따귀를 때려가며 자기암시를 걸 정도였다.
…이건 위험한 수준인데?
-츠츠츠츠
알 수 없는 위험을 느낀 나는 외골격을 해제해버렸다.
외골격을 해제하니 주변을 밝게 물들였던 황금빛 광채가 잦아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으응? 크흠! 크흐흠!]
눈에서 번뇌의 빛이 점멸하던 위철용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듬성듬성 남은 옆머리를 뽑아버릴 듯 부여잡던 그의 얼굴에 평온이 찾아왔다.
제정신이 돌아온 위철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크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뭘 어쩌시려고….
「축하합니다! 호숫가의 대장장이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아니! 이것 보쇼! 보기 좋았는데 그걸 왜 해제해!』
「축하합니다! 복슬복슬한 양 떼의 수호자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필멸자들의 잔재주에 꽤 조예가 밝다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또 새롭게 흥미롭군요. 조금 더 연구해보고 싶은데, 다시 변신해주시면 안 되려나요?』
「축하합니다! 버려진 유적의 인형 술사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윽! 불공평한 세상!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놈이 더 잘생기게 변신하는 재주를 익히다니!』
성좌들의 반응 또한 아쉬움 일색이었다.
몇몇 성좌들은 아예 그것을 변신(?)이라 받아들였을 정도로 새로운 외골격의 효과는 정신 나간 수준의 효능을 발휘했다.
-차르르륵
성좌들과 위철용의 반응에 쓴웃음을 짓고, 꺼내 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려던 찰나.
비늘 쓸리는 소리와 함께 옷 위로 외골격 특유의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뭐지?”
외골격 특유의 질감의 정체는 바로, 장식용 외골격이었다.
어째선지 새로운 외골격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식용 외골격은 여전히 해제되지 않은 채로 내 몸 위에 남아있었다.
-번쩍!
「축하합니다! 백합을 쥔 처녀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꺄아아악! 오빠아아! 날 가져요!』
계속해서 남아있는 장식용 외골격에 머리를 갸웃한 나는 다시 미의 화신 외골격을 착용하였다.
세상이 황금빛으로 번쩍 빛나며, 아름다운 외골격이 내 몸 위로 내려앉았다. 채널 창이 다시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르르륵
다시 한 번 외골격을 해제했지만, 여전히 내 몸 위론 장식용 외골격이 남아있었다.
‘장식용’이란 위상에 걸맞게 아무래도 장식용 외골격은 정상적인 외골격의 메커니즘과는 좀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았다.
가만? 외골격 두 개가 동시에 착용이 된다고…?
“대박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