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84화 (84/309)

제84화

-콰지직!

다리에 힘과 내력을 집중시킨 순간, 단단한 석재 바닥이 갯벌처럼 움푹 들어갔다.

머릿속에 운룡보의 오묘한 구절이 떠오른다. 싶더니, 이내 운룡보가 가장 파괴적인 방법으로 발현되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내 신형이 갈나르의 육중한 거구를 향해 쏘아졌다.

벼락을 머금은 먹구름처럼 시커멓게 물든 창날이 여섯 마리의 용을 번개처럼 쏟아냈다.

파천 복룡창의 제 일식 연포 육룡격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태로 펼쳐졌다.

-콰득! 콰득! 콰드득!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여섯 마리의 용이 생명 그릇이 숨겨진 급소를 연달아 꿰뚫었다.

갈나르의 생명 그릇을 꿰뚫은 창날이 가죽을 뚫었다. 근육을 찢었다. 뼈를 박살냈다. 단단한 뼛속에 숨겨진 생명 그릇을 반으로 와지끈 쪼갰다.

일반적인 리치라면 바로 죽어 나빠질 만큼 치명적인 공격이건만….

《끄읍! 끄으읍! 이번 실험체는 유난히 사납군요! 놈을 포획한 학생들에게 벌점을 줘야겠어요!》

생명 그릇을 헤집어 놨음에도 불구하고, 갈나르는 그리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창날이 몸을 헤집는 동안 몸을 비척거리며 방정맞은 비명을 토해내긴 했지만, 장난기 넘치는 쾌활한 목소리엔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꿀럭. 꿀럭. 꿀럭.

“…또냐?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여!”

리치라면 약점인 생명 그릇이 아작 난 그 순간부터 움직임이 멎어야 할진대, 지금의 갈나르에겐 별로 해당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놈의 생명 그릇을 벌써 수십 번은 작살 낸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갈나르의 생명 그릇은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었다.

-휘리리리릭!

불합리함에 이를 득득 간 나는 연이어 파천 복룡창의 제 이식 독룡아 펼쳤다.

어둠달의 창날이 기묘하게 휘었다. 휘어진 창날이 갈나르의 사각을 거침없이 파고 들어갔다.

단단한 창대가 마치 부드러운 채찍처럼 움직였다. 채찍처럼 휘어진 창대가 순간적으로 물리법칙에서 벗어난 듯 기이한 궤적을 그렸다.

그래도 갈나르의 움직임이 느려 터졌기에 망정이지, 이렇게 계속 속도를 살려서 공격해 나간다면….

《좋은 소식이에요 여러분. 드디어 준비운동이 끝났답니다!》

…뭐여?

파고 들어간 독룡아가 또다시 갈나르의 생명 그릇을 물어뜯으려는 찰나!

굼뜬 몸놀림으로 내 공격을 맞아주기만 하던 갈나르의 움직임이 갑자기 심상치 않게 변했다.

-휘익!

거대한 근육질 몸뚱이가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재빠른 몸놀림을 보였다.

그 몸뚱이가 잽싸게 비틀어질 때마다. 놈의 급소를 노린 독룡아가 허무하게 허공을 스쳤다.

상반신을 흔드는 것만으로 가볍게 독룡아를 피해내면서 내게 재빨리 달려드는 모습이 마치 프로 복서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라이트닝 볼트!》

우렁찬 주문 영창 소리와 함께 내게 가까이 파고든 갈나르의 눈에서 싯누런 기운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샛노란 전하가 파지직거리며 놈의 손에 모여들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가 갈나르의 반격을 예고했다. 찌릿찌릿한 기운이 내게 엄습해왔다.

“치잇!”

허공을 허무하게 스치기만 하던 창날을 급히 회수하며, 나는 창 전체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재빠르게 창 자루의 가운데를 부여잡곤 마치 풍차처럼 창 전체를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후웅! 훙! 훙!

시커먼 기운을 일렁이며 회전하는 창이 큼직한 방패가 되었다.

그렇게 내게 날아들 갈나르의 번개 화살을 튕겨낼 준비를 하려던 순간!

-쐐애액!

순간 화안금정에 희한한 공격 경로가 비쳤다.

예상했던 번개로 이뤄진 마법의 화살 대신, 갈나르의 육중한 주먹이 벼락처럼 파고 들어왔다.

신개념 라이트닝 볼트(물리)에 기함한 나는 재빨리 창의 회전을 멈추곤, 창 자루를 비틀어 놈의 주먹을 가까스로 흘려보냈다.

-꾸과아앙!

그렇게 흘려보낸 갈나르의 큼지막한 주먹이 바닥을 강타했다.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돌조각들이 요란하게 허공으로 흩날렸다.

단단한 돌바닥이 쩌저적 갈라지더니 운석이라도 맞은 양 거대한 크레이터를 형성했다.

이처럼 갈나르가 선보인 라이트닝 볼트(물리)의 위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라며?

“이게 무슨 라이트닝 볼트… 크읍!”

《잘 기억해두세요. 학생 여러분! 잘 발달한 근육은 마법과도 같은 위력을 낸답니다! 보세요! 체인 라이트닝!》

갈나르의 불합리한 기술명에 미처 불만을 토할 새도 없었다.

내 입에서 불만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자세를 수습한 갈나르의 새로운 공격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연쇄 번개라는 이명에 걸맞게, 전하를 품은 갈나르의 주먹이 쉴 새 없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후웅! 꽈앙! 후웅! 꽈앙!

어지간한 성장기 소년의 허리둘레만 한 팔뚝이 거칠게 바람을 갈랐다. 성인 남성의 머리통만큼 거대한 주먹이 계속해서 폭음을 터뜨렸다.

마치 위빙이라도 하듯 내 창날을 피하면서 연속으로 파고드는 갈나르의 공격은 ‘라이트닝’이란 이름처럼 마치 번개와도 같았다.

교수라는 직함에도, 리치라는 정체성에도, 커다란 덩치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을 만큼 파괴적이면서도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콰앙! 투쾅!

“치잇!”

나는 어둠달을 재빠르게 휘두르며 번개처럼 쇄도해오는 갈나르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어찌나 대단한 위력인지 창 자루로 갈나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낼 때마다 손이 저릿했다.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죄 없는 돌바닥이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하게 변해버렸다.

아니, 리치라며. 마법사라며! 도대체 이 별종은 무슨 의도로 만든 거야!

“…혹시 나를 정성스레 엿 먹이기 위한 큰 그림이었나?”

지나치게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버린 갈나르 덕분에, 이 사태를 빚어낸 존재에 대한 원망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남이섬 게이트에 들어선 이래로 그 이름 모를 존재가 나를 위해 해줬던 것들은 하나같이 편애에 가까운 배려와 안배였다.

하지만 원 역사와 달라져 버린 갈나르에 관해선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져 버렸다.

지금 나를 희롱하듯 공격해오는 갈나르는 편애가 아니라 혹시나 ‘편오’의 마음이 개입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불합리한 존재였다.

《끝내주는 소식이에요. 여러분. 교수님의 몸이 더욱 가벼워졌답니다! 라이트닝 볼트!》

-빠아앙!

이름 모를 존재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머릿속을 잠식해온 찰나의 순간, 빈틈을 노린 갈나르가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가벼워졌다고 지껄이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놈의 몸놀림은 한층 더 빨라진 상태였다.

거세게 휘두른 가죽 채찍처럼 순식간에 음속을 뛰어넘은 모양인지 갈나르의 주먹에선 대기를 잡아 찢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치잇!”

나는 가까스로 운룡보를 운행해 눈 깜짝할 새에 날아든 갈나르의 라이트닝 볼트(물리)를 피해냈다.

그리곤 계속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지껄이는 갈나르를 똑바로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동안 날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줬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장난질인지 모르겠군. 도대체 저걸 어떻게 잡으라는 소린데!

[어떤 해괴한 취향의 소유자인지는 모르겠다만, 꽤 재미난 짓을 했군.]

“재미난 짓이요? 불합리한 짓의 산물이겠죠!”

내가 불합리함의 결정체인 갈나르에게 짜증과 막막함의 감정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위철용은 갈나르라는 존재 그 자체에 큰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책상 위에 떡하니 자리 잡은 채, 팝콘이라도 와작와작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위철용의 모습이 지금이 내겐 묘하게 얄밉게 느껴졌다.

[불합리하다니, 지금의 네놈에겐 딱 적절한 수준이니라. 네놈에게 어떤 애정이 있는지는 본존도 잘 모르겠다만, 놀라울 정도로 네놈에게 시련이 될 만큼으로만 딱 맞춰놨거늘, 불합리는 무슨 불합리!]

“제 수준에 맞다니, 그건 또 뭔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저걸 도대체 어떻게 잡으라고!”

위철용은 내게 좋은 수련이 될 수 있겠다는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이번만큼은 난 위철용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기억을 열심히 뒤져봐도 갈나르 같은 유형의 적을 쓰러뜨릴 뾰족한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지.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미치광이 교수 갈나르에게 항의합니다.」

「백합을 쥔 처녀가 미치광이 교수 갈나르에게 폭풍 같은 분노를 드러냅니다.」

“보십쇼. 성좌 양반들도 불합리한 모양인지 갈나르 놈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습니까.…그래요 그래, 댁들은 내 마음 이해하죠? 네?”

[태반이 네놈 얼굴만 보고 좋다고 달려드는 놈들인데 퍽이나 네놈의 실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겠군. 잡생각 말고 지금은 놈을 쓰러뜨릴 궁리나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위철용의 매정한 말에 장난삼아 성좌들의 반응까지 끌고 와봤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위철용은 진심으로 지금의 내가 저 괴물 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치 특유의 재생력으로 약점인 생명 그릇까지 계속해서 재생하는 놈을 지금의 내가 무슨 수로 상대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네.

아직 파천 복룡창의 후반부 초식도 배우지 않은 상황이라 재생형 몬스터엔 답이 없….

“…!”

가만, 파천 복룡창?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분명 ‘그것’을 익혔었지?

생각이 파천 복룡창에 미친 순간, 바쁘게 팽팽 굴러가던 머릿속으로 얼마 전에 익힌 파천 복룡창의 새 초식이 번뜩 떠올랐다.

파천 복룡창의 제삼식에 대해 떠오른 생각은 이내 사고의 톱니바퀴가 되어 비어있던 자리에 딱 맞게 맞물려 들어갔다.

“…그래,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사고의 톱니바퀴가 맞물리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어째서 갈나르에게 저렇게 해괴한 특성을 부여했는지, 또 위철용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계속해서 개입해오는 존재가 무엇을 안배해놨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타닷!

해결책을 발견한 나는 땅을 박차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남은 내력을 긁어모아 다리에 주입하자 주변이 흐릿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실험실 가장 구석에 도착한 나는 길쭉한 책상 뒤로 몸을 숨겼다.

《이럴 수가! 여러분. 실험체가 한계에 몰렸답니다! 교수님과 함께 즐거운 숨바꼭질을 즐겨볼까요?》

“포인트 숍 오픈”

갈나르가 명랑하게 종알거리며 나의 행방을 찾는 동안 나는 포인트 숍을 열었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을 질끈 감곤 무려 3000 포인트 짜리 아이템을 하나 질러버렸다.

그래, 아깝긴 하지만. 이 역시 투자의 일환일지니….

「호숫가의 대장장이가 당신의 낭비에 경악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의 낭비에 탄식합니다.」

수령한 상품의 포장을 벗기자, 갈나르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던 채널 창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곤 경악한 성좌들에 의해 채널 창 전체에 화르륵 불이 질러졌다.

상품의 정체를 눈치 챈 성좌들은 나의 낭비에 경악하며 하나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장식용 외골격』

등급 : 희귀

설명 : 일시적으로 외골격을 재연할 수 있는 장난감입니다.

포인트 숍에서 내가 구매한 것은 바로, 허세용 아이템으로 유명한 『장식용 외골격』이었다.

심플하기 짝이 없는 설명답게 장식용 외골격의 효능은 지극히 간단했다. 말 그대로 장식에 불과한 외골격을 일시적으로 몸 위에 둘러 주는 것이 끝.

성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처럼 존재력 포인트를 3,000포인트나 투자해서 구입하는 것 자체가 낭비로 보일 정도로 가성비가 꽝인 아이템이었다.

때문에, 회귀 전에도 저걸 사는 멍청이가 있겠느냐는 비웃음을 받던 아이템이었지….

솔직히 나도 이걸 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걸 진짜 구매하는 똥 멍청이가 나올 줄은 이걸 만든 놈조차 몰랐을 거다.]

“저도 이걸 지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광대놀음에 어울려주려면 입장료가 필요한 법이죠.”

-차르르륵!

위철용에게 씨익 웃어준 나는 장식용 외골격을 몸에 장착했다.

허세용 아이템이란 이름답게, 화려한 장식이 치렁치렁 매달린 연미복이 형태의 외골격이 내 몸 위로 차르륵 펼쳐졌다.

-번쩍!

동시에 내가 숨어있는 곳이 여기라는 것을 광고하기라도 하듯 장식용 외골격에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무지갯빛이 뿜어져 나왔다.

《좋은 소식이에요. 여러분. 실험체를 다시 발견했답니다!》

-쿠콰앙!

쓸데없이 요란한 무지갯빛 덕분에, 갈나르가 나의 위치를 바로 파악해버렸다.

돌바닥이 쩌적 갈라지는 폭음이 터졌다. 거대한 근육질 언데드의 육중한 몸이 발사된 대포처럼 순식간에 내게 짓쳐들어왔다.

-부와아아앙!

전신의 체중을 실은 육중한 일격이 내 숨통을 노렸다.

깍지를 낀 갈나르의 두 손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대기를 찢었다.

하지만 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달의 창 자루를 까드득 틀어쥔 채, 놈의 공격 범위 안으로 뛰어들었다.

「가면을 쓴 족제비가 눈을 질끈 감습니다.」

「복슬복슬한 양 떼의 수호자가 비명을 지릅니다.」

「버려진 유적의 인형 술사가 당신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붉은빛 홀로그램의 채널 창에선 성좌들의 안타까운 반응이 계속 올라왔다.

장난감 같은 장식용 외골격만을 두른 채 갈나르의 공격 속으로 뛰어드는 내 모습은 그들이 보기에도 훌륭한 자살희망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파천 복룡창 제삼식….”

꼿꼿이 허리를 편 내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내 몸 위로 펼쳐져 있던 장식용 외골격이 시커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둠달의 검은 심장이 터질 듯 격렬하게 맥동하며 내게 내력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끝이에요 학생 여러분! 실험체는 이제…》

갈나르의 주먹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그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응집된 기운이 폭풍처럼 회오리쳤다.

“…암룡출동!”

-…!

시커멓게 물든 외골격이 산산이 부서진 순간, 세상에서 일순 소리가 사라졌다.

시간이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 만물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멈춰버린 시간에 시커먼 잔금이 와자작 와자작 끼어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