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컴컴한 고대의 지하 유적형 게이트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이곳이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였기에, ‘아침’이 찾아왔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극도로 단련된 육신은 체내에 각인된 생체시계에 따라 정확한 시간에 내 의식을 깨웠다.
“오늘도 차린다. 정신! 힘세고 강한 아침!”
의식을 차린 순간, 자연스레 눈이 번쩍 떠졌다.
애써 밝은 어투로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지만 음울한 기분을 밝게 만들어주진 않았다.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기며 넓은 공동 안에 퍼져나갈 뿐이었다.
[쯧쯧. 드디어 돌아버린 게냐?]
특유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위철용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배후령 육신은 어둠 속에서도 녹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덕분에 위철용의 입에 걸린 비웃음을 여느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돌아버리기는요. 조금이라도 밝게 행동해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이섬의 게이트에 들어온 뒤로 어느새 나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크기와 복잡한 구조를 자랑하는 유적형 게이트의 특성이었기에, 예나 지금이나 게이트 내부에서의 노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눅눅하면서도 퀴퀴한 공기와 시커먼 어둠 속에서 세 번의 음울한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동안 겪어왔던 인고의 시간을 돌이켜본 내 입가에 쓰디쓴 쓴웃음이 걸렸다.
[성좌 놈들 때문에 그따위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고?]
위철용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흘겨봤다.
물론, 진지하게 그렇게 지겨운 주제로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나를 향해 눈을 흘기는 그의 눈과 입은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에헤이. 그거 이야기 끝난 지가 언젠데 또 그러시네. 어차피 제 목소리 듣지 못한다면서요? 뭐. 그렇지 않아도 요즘 어둠 속을 헤매기만 하니까, 성좌들의 반응이 좀 심심해지긴 했네요. 노출이 대세라는데 살짝 뭔가를 보여줘 볼까…?”
위철용의 농담 섞인 흰소리에 나 역시 장난을 섞은 농담으로 받아쳤다.
당장에라도 옷을 벗을 것처럼 지퍼에 손을 가져다 대니, 위철용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그와의 농담을 주고받은 덕분인지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유쾌해졌다.
“것보다. 벌써 이틀째인데. 어디까지 파고들어 가야 할지 감이 안 오네요.”
게이트 내부에서의 노숙이야 애초에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만, 이렇게까지 깊이 진입하는 것은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상하군. 본존이 기억하기로는 이곳이 이렇게까지 황량한 곳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죠. 그땐 보통 2층 언저리에서 사냥해도 충분했었는데, 이번엔 2층부터 엘븐 가디언 놈들을 찾아보기 이렇게 힘드니. 이게 무슨 일인지….”
원래 내 계획은 유적 지하 1~2층 언저리에서 사냥하며 레벨을 올리는 것이었다.
언제든 빨리 철수할 수 있도록 게이트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1층에선 그나마 괜찮은 개체 수를 보였던 엘븐 가디언들이 2층을 기점으로 확 줄어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난,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미처 생각하지도 않았던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거 아무래도. 뭔가 냄새가 나죠?”
[냄새뿐이더냐. 애초에 시간을 거슬러 적절한 남이섬 게이트가 나타난 사실 자체가 수상쩍지 않았더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노골적이잖습니까.”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내 시야에 푸른빛이 번들거리는 화살표가 또 눈에 들어왔다.
층의 끝마다 하나씩 발견했고, 지금 내가 위치한 곳이 5층이니 이번이 다섯 번째 화살표다.
노골적으로 누군가 나를 유적의 깊은 곳까지 끌어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화안금정엔 진실이라 잡혀서 또 혼란스럽단 말이죠.”
[본존도 저것에서 딱히 사이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느니라.]
푸른빛이 번들거리는 화살표에선 무슨 이유에선지 『진실』이란 단어가 떠올라 있었다.
저것을 볼 때마다 위철용 역시 특별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노라, 내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수상쩍은 점은….
『LV. 28』
[…애송이 지금 네놈 레벨이 몇이지?]
“정확해요. 이번에도 28이네요.”
엘븐 가디언의 개체 수를 누군가 고의로 조절했다는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가뭄에 콩 나듯 희귀한 빈도로 분포된 엘븐 가디언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때마다. 화살표 아래엔 현재 내 레벨과 동일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로군. 필멸자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자가 있었나?]
위철용조차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녹색으로 어슴푸레 빛나는 그의 비췻빛 고개가 절레절레 휘저어졌다.
“이번에도 내려가 봐야겠죠?”
[끄응. 내키지는 않는다만. 이제 와서 무르기도 애매하지 않느냐.]
“그렇죠….”
지하 6층으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계단 앞에서, 나와 위철용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
-뿌드드득!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특성 포인트가 제공됩니다.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세요.」
「능력치 상한이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능력치에 포인트를 더 투자할 수 있습니다.」
유적의 지하 6층으로 내려온 지, 체감상 반나절이 지났다.
정확하게 아홉 번째 엘븐 가디언의 핵을 뽑아낸 것과 동시에 레벨이 또 한 단계 상승했다.
앞으로 목표로 했던 레벨까지 불과 한 단계만 남은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까지 편하지 않았다.
“상태창 오픈!”
LV.29 설용호
근력 547 민첩 545
재주 545 체력 545
행운 25 인지 25
내력 545 매력 565
-외모지상주의
-파천 복룡창
-일기당천
-화안금정
-낙오자들의 진혼곡
상당히 오랜만에 열어본 상태창의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엔 흡족한 수치들이 적혀 있었다.
언제나처럼 내게 호의적인 성좌들의 열성적인 후원 덕분에 올릴 수 있는 모든 능력치를 최대한도대로 찍을 수 있겠지만….
『555 555 555 555 555』
“이번엔 또 뭘까요? 능력치를 저 수치대로 맞추라는 것?”
[…뭐하는 작자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까지 하계의 일에 간섭을 해오다니….]
지하 7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어째선지 다섯 개의 굵은 쇠사슬로 봉인되어 있었다.
7층이 화살표는 쇠사슬들이 교차한 정 중앙에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는 555라는 숫자가 다섯 개 새겨져 있었다.
정황상 생각 없이 능력치를 투자하지 말고, 해당 수치에 따라 맞추라는 것 같은데. 5 성애자도 아니고, 도대체 이렇게 맞춰봐야 무슨 의미가…
-철컥. 철커덕.
힘 능력치에 포인트를 투자해 555를 예쁘게 맞춘 순간, 화살표 위에 적혀있던 555 숫자 중 하나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곤 요란하게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굵다란 쇠사슬 중 하나가 뱀처럼 움직여 벽 안으로 철커덕 수납되었다.
“…있네.”
이게 무슨 공들인 광대놀음인지 모르겠군.
알 수 없는 장난질에 쓰게 웃은 나는 화살표가 지시한 대로,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는 모든 능력치를 555에 맞췄다.
「위업 [능력치 빙고] 달성!」
「칭호 [수치에 집착하는 자]가 수여됩니다」
「칭호 보상 – 스킬 [깔맞춤]을 획득하셨습니다!」
…뭐여?
다섯 개의 능력치를 똑같이 555로 통일한 된 순간. 어찌 된 영문인지 위업이 달성되어 버렸다.
아니, 이렇게 간단한 조건을 그 누구도 충족시키지 못했단 말이야?
세상을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집착을 보이는 다양한 족속들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능력치를 똑같은 수치로 깔맞춤 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괴짜들은, 회귀 전만 해도 수두룩 뻑뻑하게 만났던 만큼 흔한 유형의 집착이었는데….
고작 이것만으로 위업이 달성되어 버렸다고?
「축하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이야! 역시. 설용호 님이십니다! 그 맞추기 힘든 능력치 빙고 업적을 달성하시다니!』
갑작스러운 업적 달성에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채널 창에 알 수 없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고작 능력치를 555로 맞추는 게 힘들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축하합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물론 능력치 555로 맞추는 거야 쉬운 일이지, 하지만. 숨겨진 조건을 달성하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그걸 그가 해내 버렸군.』
「축하합니다! 고통을 모르는 병사가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크하하하! 그렇지! 세상에 어느 누가 똑같은 몬스터를 55마리 잡은 시점에 다섯 개의 능력치를 555로 맞출 생각을 했겠나.』
숨겨진 조건이 그런 거였어?
성좌들의 조언이 사실이라면, 굉장히 달성하기 괴랄한 조건이었다.
다섯 개의 능력치를 똑같은 몬스터 55마리를 쓰러뜨린 시점에 모두 555로 맞춰야 한다니.
정말이지 업적 보상 칭호대로 ‘수치에 집착하는 자’가 아니고서야 달성할 엄두조차 못 내는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깔맞춤」
등급 : 고유
효과 :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를 가장 높은 능력치와 똑같이 깔맞춤 합니다. (지속시간 5분. 재사용 대기시간 55분)
『“헤헤…. 완벽해! 완벽한 대칭이야!”
숫자엔 도대체 어떤 마력이 숨어 있었던 걸까요?
모든 것을 똑같은 숫자로 통일해야 한다는 그의 집착은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맙소사.
위업 달성 보상으로 획득한 스킬의 설명을 읽어본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나 눈을 비볐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기적인 효용이었다.
성좌들의 빵빵한 후원 덕분에, 레벨 업 할 때마다 나는 포인트를 투자하는 것이 가능한 능력치를 최대치까지 균등하게 올릴 수 있었지만….
행운과 인지력만큼은 25까지 찍은 이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걸 일시적으로나마 가장 높은 능력치로 깔맞춤 해준다고?
“…미쳤군.”
일반인 기준으로 평균적인 능력치는 10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지를 25까지 올린 것만으로도 헌터는 인간을 초월한, 초인적인 육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걸 가장 높은 능력치로 맞춰 준다면….
“시, 시전. 깔맞춤.”
떨리는 목소리로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했다.
굳이 소리를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것을 소리 내서 읽어버렸다.
「스킬 깔맞춤이 발동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매력 능력치와 동등한 수치로 통일됩니다.」
-쭈와아아압!
스킬이 발동된 느낌이 듦과 동시에, 내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귓가엔 정적이 찾아왔다.
“…!”
일시적인 고요함이 지나간 뒤, 정보의 폭풍이 찾아왔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모든 감각이 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해졌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 시야에 들어온 만물이 고유한 정보들을 토해냈다.
윙윙거리는 청각은 게이트 내부의 모든 소리들을 빨아들여 다양한 정보의 노래를 토해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