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하필이면 남이섬 게이트라니, 공교로운 일이로고….]
“그렇지 않아도 ‘우연’의 연속이었지 않습니까.”
푸른빛으로 이글거리는 게이트 앞에서 위철용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정욱에게 수상쩍은 연락을 받은 이후 벌어진 일들은 말 그대로 우연의 연속이었다.
‘우연히’ 일이 생긴 이세영은 더 귀찮게 하지도 않고 거처로 돌아가 버렸으며,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서민혁이 초인종을 눌러 내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냐며 물어왔고, ‘우연히’ 안부 차 내게 전화를 건 강태백은 남이섬에 나타난 신형 게이트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거참. 정말이지 ‘우연’의 연속이로군.
“그 빌어먹을 ‘우연’을 가장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치들은 내게 도대체 뭘 바라는 걸까요?”
[…필멸자의 행적에 이토록 누군가가 깊이 관여했던 적이 없거늘.]
위철용은 시름 섞인 신음을 토했다.
나는 눈앞에 입을 쩍 벌린 푸른빛 게이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곳이니, 제가 손해 볼 것은 없겠지만.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만은 않네요.”
남이섬 게이트.
회귀한 이후로 내가 반드시 손에 넣으리라 마음먹었던 게이트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보상이 짭짤하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영화, 아니 아모스를 견제할 수 있는 고유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 며칠 전부터 더더욱 바라왔던 곳이었는데….
원래대로라면 2년 후에 열려야 할 게이트였지만, 무슨 농간인지 마치 나를 유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시점에 나타나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 게냐?]
“일단은…. 무슨 농간인진 모르겠지만.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누군가의 안배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내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모스와 놈을 지지하는 산군들을 꺾기 위해서라도, 빨리 성장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들어가 봐야죠.”
***
“…!”
푸른빛 게이트를 지나, 남이섬 게이트 내부로 들어선 순간.
나는 새로운 이변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백합을 손에 쥔 처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가뭄을 노래하는 시인이 당신의 관심을 갈구합니다.」
「장미를 두른 과부가 당신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심상세계의 그것처럼 뿌연 연기만 가득했던 홀로그램 창이 원래의 붉은빛을 되찾았다.
오랜만에 내 앞에 스르륵 떠오른 채널에 낯익은 성좌들의 반응이 주르륵 올라왔다.
“…저기, 어르신? 그 심상세계인지 뭐시기 때문에 채널에 혼선이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끄응. 그랬지. 애석하게도 앞으로 좀 더 시일이 걸려야 정상으로….]
머릿속에 찾아온 혼란에 위철용에게 멍한 목소리로 채널의 상황에 관해 물어보자, 위철용은 어쩐지 궁색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고쳐졌는데요?”
[뭐라고? 아직 본존과 네놈의 연결이 혼선이…. 맙소사….]
위철용의 눈이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내 채널의 메시지창이 떠오른 허공을 바라보았다.
[장미를 두른 과부, 이 요망한 계집이 네놈을 바라보고 있었다니. 허 참.]
순간 멍하니 중얼거린 위철용의 입 밖으로 예상치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곤 그렇게 뇌까린 그의 눈이 경악을 담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 역시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위철용이 지금 채널창의 메시지를 읽은 거 맞지?
“어, 어르신 방금 채널창 메시지를 읽으신 것 마, 맞죠?
[허어…. 그것참. 알 수 없는 일이로고. 어째서 본존에게 이것이 보이는지 당최 연유를 모르겠군]
머리를 흔든 위철용은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였다. 수상쩍은 우연의 연속에서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를 해뒀지만, 이런 형태의 변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숲 속의 조각가가 당신에게 애정을 갈구합니다.」
「얼어붙은 파란 양이 당신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합니다.」
…뭐여 이건 또.
게다가 성좌들의 기묘한 반응이 머릿속에 찾아온 혼돈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한 달 동안 단절되었던 소통이 기묘한 형태로 재개되자, 무언가를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성좌들의 반응이 격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의 관심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호숫가의 대장장이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네 마음을 잡진 못하는 게냐? 내게 관심을 보여다오. 제발.』
「축하합니다! 돌마루의 사냥꾼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설용호! 설용호! 우.윳.빛.깔. 설용호! 저는 당신의 포로임다!』
「축하합니다! 영원한 숲의 화신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숲이 당신을 위해 노래합니다. 부디 제게도 당신의 노래를 들려주세요.』
…일반적으로 성좌와 헌터의 관계는 전형적인 갑을 관계다.
당연히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성좌가 ‘갑’이었으며 헌터는 ‘을’에 불과한 존재이건만, 나의 관심을 갈구하는 성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은 일반적인 ‘갑을 관계’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아니…. 아무리 내 외모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변했다지만, 이건 도대체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군. 이 양반들 도대체 왜 이래?
[어쩜 이렇게 괴상망측한 것들만 모였을꼬….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로구나]
“괴상망측한 것들이라뇨? 아는 분들이라도 있으세요?”
끝없이 밀려오는 감정표현과 후원의 향연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십 명에 다다르는 성좌들이 계속해서 후원과 메시지를 전해오는 통에 눈이 다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존재력 포인트에 상한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그들은 끊임없이 1포인트씩 후원하며 내게 관심을 애걸하고 있었다.
[필멸자 시절의 감성을 버리지 못한 치들이다. 세월에 뒤처진 채 언제나 필멸자들의 삶을 지켜보며 그들의 삶을 관음하며 동경하는 족속들이지. 말 그대로 한심한 것들이니라.]
“…하기사 우윳빛깔 설용호라니 도대체 언제 적 감성인지 모르겠네요.”
위철용은 채널창을 바라보며 신랄한 비판을 쏟아부었다.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며 진취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에겐, 나를 바라보는 성좌들이 썩 달가운 존재들로 비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필멸의 삶을 동경한다니. 초월적인 성좌들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단 말이야?
[하기야 네놈의 외모가 외모이다 보니, 놈들에겐 네놈만큼 관심이 가는 존재도 없겠지.]
…가만 이거, 괜찮은데?
위철용의 씁쓸한 중얼거림에, 나 역시 쓰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려던 찰나.
머릿속에 기묘한 아이디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죠. 제가 ‘관심이 가는’ 존재긴 하겠죠.”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는 위철용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내게 동경의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성좌들 역시 일종의 ‘인격체’라는 소리다. 당장 위철용만 봐도 그렇듯 필멸자 시절의 감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만큼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성좌들도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을 최대한 이용해 먹을 계획을 짜봐야겠네요.”
그동안 나는 성좌들에게 압도적인 감사만을 표하며, 그들을 받들어 모시며 포인트를 빨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철용의 말대로 성좌들이 나를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한세훈이 그랬던 것처럼 굳이 성좌들의 반응에 매번 황송하다는 듯 굽신거릴 필요가 없겠지, 연애든 거래든 모든 것은 밀고 당기기에 달린 법이다.
이제 그들의 반응을 볼 수 있으니만큼, 적절한 밀고 당기기를 시전하면 어떨까?
[…또 무슨 생각인 게냐.]
위철용의 미심쩍은 표정에 미소를 지은 나는 회귀 전 심심할 때 시청하곤 했던 너튜브 채널의 까칠한 BJ의 얍실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그 양반 시청자들이랑 밀고 당기는 솜씨가 예술에 이른 수준이었지. 틈틈이 봐두길 정말 잘했어.
***
남이섬 게이트의 정식명칭은 ‘고대 엘프 유적’이다.
전체적으로 지하 유적의 형태를 한 곳이니만큼, 이곳의 몬스터는 ‘엘븐 가디언’밖에 없었다.
비록, 골렘의 일종이라 생명체가 아니기에 놈에게서 정수를 취득할 수는 없지만….
-뿌드득
엘븐 가디언의 동력원인 고대 마력 핵은 결코 정수에 뒤지지 않는 고가를 자랑했다.
집채만 한 골렘의 동력원으로 쓰이는 놈이기에 출력도 굉장한 데다. 뭣보다 별도의 가공 없이 아이템에 바로 박아 넣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으니까.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뽑아낸 고대 마력 핵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버려진 유적의 인형 술사가 당신을 대견해 합니다.」
「가면을 쓴 족제비가 당신의 비열한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청초한 꽃의 여인이 당신의 기발한 생각에 눈을 반짝입니다.」
엘븐 가디언이 감정이 없는 골렘이었기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할 거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성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듯, 그것은 오산에 불과했다.
『침입자 감지…. 섬멸 프로토콜 기동』
『오류. 절대적인 아름다움 발견. 신원 확인 요망. 창조주 종족의 외모와 일치합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종족이시여.』
엘븐 가디언이야 감정이 없는 존재라서 내 외모가 먹힐 구석이 없다지만, 문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 고대 유적의 주인이 엘프였다는 것이다.
잘생긴 외모에 유별난 자부심을 지녔던 고대 엘프 족들은 엘븐 가디언들에게 자신들을 식별할 방법의 하나를 ‘외모’로 지정해 놓았다.
내 유별나게 잘생긴 덕분에 엘븐 가디언들은 나를 그들의 창조주와 같은 고대 엘프 족이라 인식하였고, 덕분에 나는 손쉽게 놈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투콱!
하지만 엘븐 가디언은 아무리 그래도 위험도 1급짜리 몬스터다.
선수 필승에 입각한 기습으로 핵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쉽게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핵을 공격당한 엘븐 가디언의 굳게 다물어진 입에서 묘한 기계음이 들렸다.
『타격을 감지했습니다. 자가 방어모드로 돌입합니다.』
『공격자 신원 확인…. 확인 완료. 전설적인 바람둥이 ‘파라과이 잭.’ 혼인 빙자 사기로 수배 대상입니다.』
[푸흡!]
엘븐 가디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감정한 목소리에 위철용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전설적인 바람둥이라는 말에 마치, 사례라도 걸린 양 그는 연신 캑캑대며 눈물을 흘렸다.
…파라과이 잭이 도대체 뭐하는 놈이여?
“큿!”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달아오른 민망함의 열기를 전투의 열기로 바꾸며 나는 핵을 파고든 어둠달을 역수로 꼬나쥐었다.
-푸쾅!
“치잇!”
거참. 만만치 않은 놈일세….
범죄자 운운하는 것으로 봐선 제법 특이한 개체인지, 이번엔 유독 저항이 거셌다.
역수로 꼬나쥔 어둠달을 깊숙이 박아 넣으려 했지만, 놈이 입에서 발사한 에너지 덩어리 때문에 일단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핵 방어시스템 가동.』
-철커덕
설상가상으로 이번 개체는 특수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엘븐 가디언의 머리에 박힌 마력 핵이 몸속으로 철컥 수납되었다.
엘븐 가디언의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약점은 바로 머리에 박힌 마력 핵을 분리하는 것이다.
약점을 숨기다니, 저건 도대체 무슨 불합리한 기능인지 모르겠군.
-까드득.
엘븐 가디언 특수 개체의 졸렬한(?) 수작질에 나는 이를 갈았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까드득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호응하여 힘껏 틀어쥔 어둠달이 시커먼 빛을 토해냈다.
-띠릭 띠리리릭
그렇게 막 어둠달을 휘두르려던 찰나, 채널 창이 소란스러워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성좌들의 후원 메시지들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버려진 유적의 인형 술사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약점을 숨긴 엘븐 가디언은 눈 쪽을 공략하면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가면을 쓴 족제비가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눈이요? 공략도 모르고 훈수라니…. 그것보단 차라리 입안의 스위치를 눌러보세요.』
「축하합니다! 열대 섬의 불꽃 도마뱀이 당신에게 존재력 포인트를 1 후원하셨습니다.」
『현직 골렘 공략 장인입니다. 입안 스위치 눌러 보호 상태 푸는 방법은 간단하답니다. 입에서 에너지 탄막을 발사할 때 창끝을 바로 쑤셔 넣으세요』
이건. …훈수인가?
관심을 원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성좌들은 이제 내게 엘븐 가디언을 공략하는 방법을 후원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부우오오옹
성좌들의 훈수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려니, 엘븐 가디언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순간, 성좌들이 일러준 대로 살짝 벌려진 입안에서 푸른빛이 점멸하는 커다란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어둠달을 벼락처럼 엘븐 가디언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