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요즘 지현 씨 표정이 좋지 않더라니….”
이세영은 안타깝다는 듯, 슬픈 표정으로 연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쳐댔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진심으로 안타까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흑흑흑. 우리 지현 씨 어떡하지이.”
이세영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훑어대는 동작은 무대 위의 뮤지컬 배우마냥 우스꽝스러웠다.
목소리 또한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과장된 연기 톤이었다.
어쩐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선 가상의 연적에게 한 방 먹였다는 묘한 통쾌함이 묻어 나왔다.
“장난은 그만 두십쇼. 매니저님은 저와 나태상이 충돌한 이유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요.”
어디서 구했는지 부러진 펜촉을 제 목에 가져다댄 신지현은 나와 나태상을 멈춰 세웠다.
계속해서 헛된 소모전을 이어가 봤자.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다고 외친 그녀는 나태상에게 이쪽에서 한발 물러선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쪽에서 딱 한 달 동안 침묵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나태상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조리 폐기해주기로 말이지….
덕분에 한 달의 시간을 벌기야 했지만, 나태상을 옭아맬 자료는 모조리 놈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틀어졌다고 자책하고 있는 모양이시니….”
“그래서 요즘 저렇게 무리하고 계신가 보네요.”
거실에 걸린 대형 TV를 가리킨 이세영의 얼굴에 비로소 걱정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TV의 큼지막한 화면 속엔 상기된 표정의 아나운서가 저녁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태백 길드 계열사 J그룹 고위직 임원 최 모씨 부정 청탁 ‘연루 의혹….’
-태백 길드 무기장인 협동조합 조합장 김 모씨 상납금을 빌미로 폭리를 취한 것이 드러나….
-계속 터져 나오는 폭로, ‘태백 게이트’의 시작인가?
자책감 때문인지 신지현은 평소보다 배는 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쉴 새 없이 태백 길드의 상층부와 연결된 이들을 찾아가 ‘협상’을 했으며, 그 ‘협상’에 굴하지 않은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언론에 그들의 치부를 폭로해버렸다.
-…사정으로 태백과 오행 사이의 전면전은 대치 상태로….
덕분에 유영화를 지지해주던 태백 상층부의 사정이 복잡해지면서 오행과의 전면전이 단순한 대치 상태로 완화된 마당이긴 하다만….
저렇게 계속 무리해서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
“…….”
말없이 뉴스 화면을 들여다보는 나와 이세영 사이로 우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현 씨가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이번에도 부탁하셨던 ‘사진’들 다 찍어왔어요.”
우울함이 내려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기라도 하듯, 이세영은 명랑한 말투로 품속에서 갈색 서류뭉치를 꺼냈다.
“벌써요? 세상에…. 하긴 여기까지 잠입하실 정도의 실력이시니…. 것보다 정신 사나우니까. 안으로 좀 들어오시겠어요?”
헛웃음을 지은 나는 혀를 내두르며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세영이 ‘붙어’ 있는 창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창문….
그랬다. 이세영은 지금 30층 높이의 펜트하우스 창문에 거미처럼 찰싹 붙어 있는 상태였다.
보는 사람이 다 식겁할 만큼의 까마득한 높이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묘기 부리듯 재주를 넘어 사뿐히 발코니에 착지했다.
“읏챠! 그래요? 여기 보안시설은 화려하기만 하지 의외로 허술하던데…?”
허술하다니…. 안종훈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해맑게 웃으며 생글거리는 이세영의 태연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며칠 전, 나는 좁디좁은 원룸을 나와 안종훈의 소유였던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겼다.
안종훈의 모든 것을 빼앗은 판에, 좁은 원룸 따위에서 살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놈에게서 빼앗은 곳에 새로운 둥지를 튼 상태였다.
용의주도한 안종훈이 살던 곳이었으니만큼 이곳의 보안시설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으나, 이세영은 매번 손쉽게 나를 찾아왔다.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괴악한 악취미를 계속 자랑하면서 말이지, 지가 거미 남자, 아니 거미 여자야 뭐야?
“여기 건물주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날 소리를 태연하게 하시네. 여기가 얼마짜린데요.”
“뭐 어때요. 어차피 제가 방문한 사실을 평생 알지도 못할 사람인데요, 뭘. 칭찬이나 해주세요. 얼마나 어려웠는데.”
묘하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뽐내듯 가슴을 쭉 내민 이세영은 곧이어 칭찬해달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보통 어려운 게 아니긴 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호 제약의 보안을 뚫어낼 줄이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지금 터뜨리기 좀 그렇군요.”
“엥? 왜요? 이 사진 찍어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애석하게도 신지현이 터뜨리고 있는 ‘본보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부정청탁이나 착취, 폭리 같은 것들은 다른 것들에 비하면 애교 수준에 불과했다.
부정청탁 같은 건 죄다 묻혀버릴 판정도이니만큼, 이세영에겐 미안하지만, 그녀가 애써 찍어온 ‘사진’은 지금 공개하기엔 좀 이른 감이 있었다.
“빈민가 아이들을 납치해서 실험을 저지른 놈들인데! 이거면 대호 제약도 한방에…!”
“아직 이걸 터뜨리긴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고, 뭣보다…. 대호 제약은 산군 배상국의 영역이니까요.”
순간 배상국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세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고한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실험을 해온, 천인공노할 놈들을 용서치 말라 열변을 토하던 그녀의 눈빛에 두려움이 서렸다.
“대호 제약이 미친개의 영역이라구요?”
“…예. 워낙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분명히 거긴 배상국과 연결된 곳이에요.”
태백의 산군, ‘미친개’ 배상국.
미친개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산군 중에서도 가장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었다.
그나마 안종훈은 자신의 이익과 그것과 관련된 이들과 관련해선 일말의 대화라도 통하는 인물이었지만, 배상국은 그런 기준 따윈 전혀 없이 순수하게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미친놈 소굴이긴 했지만. 배상국의 영역이라니. 그런 정보는 길드에서도 알지 못…. 마, 맙소사. 저, 저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이세영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이 아예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기대를 품고 핑크빛으로 반짝거렸던 눈은 혼란과 두려움을 품고 혼탁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터뜨리기 힘들다는 겁니다. 놈이 작정하고 나서면 세영 씨도, 아니 한성유통도 무사하지 못해요.”
이세영의 두려움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으스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를 가했다.
혹시나 그녀가 정의구현(?)에 눈이 멀어, 헛짓하기 전에 나는 그녀에게 공포로 만들어진 목줄을 채웠다.
“아, 알았어요. 이, 일단은 조, 조심할게요. 으으으…. 미친개라니. 내가 무슨 짓을….”
배상국의 악명이 워낙 높기 때문인지 효과는 탁월한 것 같아 보였다.
두려움에 절어버린 이세영은 자신이 찍어온 사진을 벌레 쫓듯 황급히 거실 탁자 위로 던져버렸다.
…그래. 배상국이라면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긴 하지.
미친개 배상국, 태백에서 순수하게 무력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잔혹한 손속과 집요하게 잔인한 성격으로도 악명이 높은 작자라, 이세영이 두려움에 질리는 것도 당연했다.
[‘아직’이라면 희망이 있단 말인 게냐? 나태상이 그리 강해진 걸 보고도?]
가만히 대형 TV 속 뉴스를 보고 있던 위철용이 갑작스레 흥미를 보였다.
내 말에 강한 흥미를 보이는 그의 눈빛엔 과하게 느껴질 정도의 기대감이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든 강해져야겠어요. 아모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다른 산군들을 사냥하기 위해서도.’
신지현은 자신의 실수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은 나 역시도 안일하게 나태상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나태상의 약점을 워낙 명확하게 꿰고 있기도 했고 내 실력에 자신이 있어 놈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는 내가 기억하던 전성기 시절보다 강해진 상태였다.
놈과의 승부가 아슬아슬한 무승부로 끝난 뒤. 나는 다시 한 번 ‘성장’의 기회를 갈망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네놈도 잘 알다시피 역사가 변해버렸지 않았느냐? 본존도 앞으로의 전개를 가늠하지 못하는 판국이니 네놈의 지식도 쓸모가 있을지 걱정부터 되는구나.]
위철용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역사가 변했음을 내게 일깨워줬다.
원 역사에선 대 침식 이후 누군가의 안배인지 전국에 수많은 ‘안정된’ 게이트들이 출몰하여 헌터들의 성장을 도와줬지만, 지금은 새로운 게이트에 대한 소식조차 없었다.
때문에 위철용의 말처럼 원래 내가 계획했었던 ‘독식을 통한 성장’은 차질을 빚고 있는 상태였다.
‘정 뭐하면 신지현을 통해, 3등급 이상의 게이트라도 구입해서 레벨이라도 올려놔야죠. 최소한 아모스를 상대하려면 외골격 정도는 만들어야 할 텐데….’
-우우우웅.
갑자기 요란스러운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TV 앞 탁자 위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웅웅 연속으로 진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진동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
-달칵.
『가평군 남이섬에 새로운 게이트 출몰.』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마력 수치를 지녔음』
『먼젓번의 침식형 게이트와는 달리 굉장히 안정된 상태.』
스마트폰의 자그마한 화면엔 박정욱이 보낸 메시지가 연속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 답게 요점만 간략하게 정리해놓은 메시지에 눈이 간 순간, 나는 그만할 말을 잃어버렸다.
…남이섬에 굉장한 마력 수치를 지닌 새로운 게이트라고?
“…말도 안 돼.”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누군가 내 열망을 읽기라도 한 듯, 거짓말처럼 내가 가장 원하고 있던 게이트가 딱 적절한 시기에 열려버렸다.
“아, 맞다. 박정욱 산군님이 전해 달라 하셨는데. 새로운 게이트가 나타났다네요? 먼젓번의 침식형 게이트와는 달리, 이번엔 기존의 것과 별 차이 없이 안전한 형태라서 조사할 가치가 있다나 뭐라나…. 뭐, 수치가 좀 과도할 정도로 높게 측정되긴 했지만요.”
다분히 작위적이다.
누군가가 나를 안배해 끼워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이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또 메시지가 온 것과 동시에 패닉에 빠져있던 이세영이 갑작스럽게 신형 게이트를 입에 담는 모습 또한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였다.
[애송이, 이건 아무래도….]
위철용 역시 수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살짝 눈빛이 변한 이세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확실히 누군가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네요.’
아모스와 엮인 이후, 벌어진 일들은 단순히 ‘역사가 변했다.’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누군가가 나의 행보를 읽기라도 한 듯, 역사의 변곡점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생각 이상의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엔 아예 대놓고 이것 보라는 듯 나를 유인한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