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어머나. 무서워라…. 하지만, 이걸 어쩌죠? 애석하게도 저는 다 믿는 구석이 있답니다.”
나태상의 눈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광포한 살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는 신지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위스키를 두 병의 위력 탓인지, 그녀는 계속해서 생글거리며 나태상에게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믿는 구석이라고? 뒤쪽의 애송이? 하! 고작해야 산군 중에서도 말석에 불과했던 안종훈 따위와 이 몸을 비교하겠다는 건가?”
안종훈을 언급한 나태상은 비웃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비틀리며 올라간 입꼬리에서 섬뜩하게 드러난 놈의 송곳니는 진득한 피 냄새를 풍겼다.
음울하게 끈적거리면서도 찌릿한 기운이 사무실 내부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몸은 산군이시다! 그 애송이 놈처럼 재수 좋게 허약한 안종훈 따위를 잡아먹고 올라선 얼뜨기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강자를 꺾고 그의 자리를 쟁탈한 진또배기 산군이시지!”
-파직 파지지직!
폭풍처럼 포효하는 나태상의 입에서 마치 우레와 같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우스꽝스러웠던 노란빛 양복이 시퍼런 전하를 머금었다. 그의 몸에서 비롯된 시퍼런 전하가 파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외골격을 형성했다.
마치 신화 속의 뇌신처럼 천둥을 휘감은 나태상의 몸이 자리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얼뜨기를 믿고 감히 네년 따위가 이 몸에게 같잖은 협박 따위를 해!”
천둥과 같은 외침 소리와 함께, 사무실에도 천둥이 쳤다.
신지현을 노려보는 나태상의 눈이 번개를 머금었다. 그의 눈이 살기를 머금고 번들거렸다.
코끼리조차 순식간에 튀겨 죽일 수 있는 막대한 양의 전하가 나태상의 손에 집결되었다.
“…저를 죽이시는 건 쉬울지도 모르지만. 과연 그게 현명한 방법일까요? 제가 우리 산군님만을 믿고 이렇게 찾아올 여자가 아니라는 걸 그쪽에서도 잘 아실 텐데….”
일반인이라면 순식간에 심장마비에 걸려 죽을 만큼 지독한 살기에 노출되었지만, 신지현은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태상의 위협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신지현은 태연한 목소리로 나태상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펄럭.
그러면서 신지현은 이것 좀 보라는 듯, 슬쩍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들췄다.
그녀가 코트 밑에 받쳐 입은 가죽 갑옷의 가슴께엔 붉은빛이 규칙적으로 점멸 중인 기계장치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따위 조악한 장난질 따위를.”
기계장치의 정체를 눈치 챈 나태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무실 안의 모든 것을 튀겨버릴 기세로 퍼져나가던 살기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절 죽이시는 건 간단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 심장이 멎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아시겠죠?”
무슨 일이 벌어지긴, 신지현의 심장이 멎거나 무슨 이변이 감지된 순간, 신지현이 미리 안배해둔 대로 나태상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정보’들이 신문사로 넘어가겠지.
신지현의 심장과 연동된 기계장치. 그녀가 회귀 전에도 자주 써먹었던 협박 수단이었다.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나태상을 바라본 신지현은 특유의 교활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크으윽…. 네년 여전히 더러운 방법을….”
“이 바닥이 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쪽에서도 ‘더러운’ 방법을 입에 담으시기엔 행적이 좀….”
계속해서 나태상에게 이죽거리는 신지현의 눈은 의기양양한 승리의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허튼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는 듯, 그녀는 한 손으로 기계장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은 써먹는 것이 미숙하군. 저걸 저렇게 훤히 보여주면 어쩌자고….
물론, 내가 옆에 서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겠지만, 지금의 신지현이 시도한 방법은 무모하면서도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인간을 초월한 산군 앞에서 굳이 저렇게 약점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역시 아직은 어설퍼. 애송이!]
위철용 역시 신지현의 미숙한 실수를 눈치 챈 것 같았다.
일전의 대화로 그녀에 대한 앙금을 어느 정도 털어낸 탓인지,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신지현의 위기를 알렸다.
“그래, 그게 우리 지현 씨의 가슴에 부착된 이상 어쩔 수…. 죽엇!”
-쿠르릉!
체념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나태상이 벼락같이 만년필을 집어 던졌다.
시퍼런 뇌기를 머금은 만년필이 천둥소리와 함께 빛살처럼 신지현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산군답게 기계장치의 핵을 정확하게 노린 기습이었다.
-쩌엉!
하지만 나태상의 기습은 어둠달의 창대에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시퍼런 뇌기를 머금은 만년필은 시커먼 어둠이 번들거리는 창대에 막혀 완벽히 무력화되었다.
대화 도중 방심한 틈을 노린 비열한 공격이었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내 눈을 피할 순 없었다.
“……!”
“……?”
기습이 허망하게 무위로 돌아간 순간, 신지현과 나태상의 얼굴엔 두 가지 표정이 교차했다.
파리하게 질린 신지현의 얼굴엔 공포와 안도가 동시에 떠올랐다.
벌겋게 달아오른 나태상의 얼굴이 의문과 분노를 동시에 머금었다.
만물이 숨을 죽였다. 오싹한 냉기를 품은 갑작스러운 침묵이 사무실 위로 내려앉았다.
“흐응. 이거 안종훈보다 못한 것 같은 위력인데….”
바싹 얼어버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마침내, 나는 그동안 유지해온 침묵을 깨뜨렸다.
사내다운 매력을 풍기며 굳건히 다물어져 있었던 잘생긴 입술이 서늘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서늘한 비웃음만큼이나 싸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뭐, 뭐? 이, 이 얼뜨기 새끼가 감히!”
기이하게도 그는 유독 안종훈이란 단어에 과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비웃음에 노출된 나태상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활활 달아올랐다.
격렬한 감정 속에서 다시 벼려진 그의 분노가 이번엔 대상을 바꿨다.
파직! 파지직! 시퍼런 전하가 주인의 감정에 반응하며 내게 적의를 드러냈다.
“얼뜨기라….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선배…. 못하는 말이 없네?”
나는 신지현과 달랐다.
애석하게도 그녀처럼 얌전히 나태상의 분노를 부드럽게 넘길 만한 자제력 따윈, 애초부터 내겐 존재하지 않는 덕목이었다.
폭풍 같은 분노를 드러내는 나태상을 똑바로 노려보는 내 두 황금빛 눈동자가 투지를 머금기 시작했다.
“얼뜨기? 운이 좋아? 언제부터 산군이란 자리가 운 따위로 결정되는 자리였지? 감히 산군을 모욕하는 말을 입에 담아!”
젊은 수사자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노릿한 황금빛으로 물든 두 눈에서 광폭한 투기를 머금은 안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시커먼 기운이 일렁거리는 검은 심장이 맥동하며 내게 힘과 투지를 불어넣었다.
-쿠와앙!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과자처럼 와자작 갈라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건물 전체가 우르릉 흔들렸다.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한 마리 수사자처럼 나는 어둠을 두른 채 나태상에게 달려들었다.
-파지직! 피지직!
어둠이 넘실거리는 시커먼 창날이 시퍼런 전하로 이루어진 나태상의 외골격과 충돌했다.
어둠달의 검은 심장이 격렬하게 맥동하며 외골격을 까드득 갉아먹기 시작했다.
시퍼렇게 물든 외골격이 정신없이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전하를 흩뿌렸다.
“안종훈을 ‘따위’라고 부르기엔 그쪽의 실력이 그리 대단치는 않은 것 같은데?”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나는 나태상의 현 실력을 바로 가늠할 수 있었다.
확실히 ‘뇌제’라는 별명이 흰소리는 아닌 모양인지 그의 외골격은 안종훈보다 월등히 강했다.
하지만 나태상의 실력을 가늠한 뒤로도 나는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그리곤 놈과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자신만만하게 이죽거리며, 도발하듯 입꼬리를 뒤틀었다.
“크으으읏!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힛!”
내가 안종훈의 이름 석 자를 언급하자, 나태상은 다시 한 번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눈이 뇌기를 머금었다. 뇌기가 시퍼렇게 파직 거리며 위협적으로 불똥을 튀겨댔다.
-꽈릉!
순간, 나태상의 손에 응집된 뇌기가 번개가 되어 벼락처럼 내가 서 있던 곳을 강타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눈 한번 깜빡할 찰나의 순간에 이뤄졌다.
그만큼 나태상의 공격은 번개처럼 빨랐다. 천둥소리와 함께 사무실에 시퍼런 빛이 번쩍였다.
“어딜!”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
나태상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화안금정을 통해 놈의 공격을 감지했다.
나태상의 손에서 시퍼런 전하가 번뜩인 것과 동시에 나는 신지현을 와락 끌어당긴 채, 놈의 공격을 간단히 피해버렸다.
-푸스슥
제법 질 좋은 몬스터 가죽을 사용하여 범상치 않은 내구도를 자랑하는 물건인 모양이었지만, 나태상의 살벌한 화력을 당해낼 순 없었다.
나태상의 번개에 적중된 의자가 순식간에 새까만 재로 변해버렸다.
그 무식한 위력 탓인지, 신지현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변해버렸다.
“우리 매니저님 죽으면 그쪽이 손해 아니던가? 이거 위험하….”
그렇게 바짝 얼어붙은 신지현을 안전한 곳에 내려준 뒤. 나는 나태상을 향해 조롱하듯 이죽거렸다.
살짝 비틀린 입꼬리와 위로 솟구친 채 휘어진 눈꼬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는 기운을 흩뿌렸다.
-꽈릉!
애석하게도 나태상은 내 도발에 동요하지 않았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놈은 뭐라 말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문 채로 주먹을 휘둘렀다.
황금빛으로 물든 시야 속에서 시퍼런 전하가 또다시 나를 노리고 쇄도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사무실에 번개가 쳤다. 천둥이 울부짖었다.
-카드득!
가볍게 나태상의 공격을 피해낸 나는, 놈에게 반격하듯 어둠달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어둠달에서 자연스럽게 독룡아가 펼쳐졌다.
어둠을 머금은 한 마리 용이 나태상의 사각을 노리고 파고 들어가, 놈의 목을 물어뜯었다.
시커먼 창날과 시퍼런 외골격이 요란스럽게 마찰하며 시뻘건 불꽃을 토해냈다.
“요 잔망맞은 날파리 놈이!”
-쿠릉!
…이거 아무래 생각해도 이상한데?
두 번, 나태상이 내게 공격해온 것은 총 두 번이다.
전하로 이루어져 공방 일체를 자랑하는 나태상의 외골격엔 한 가지 약점이 존재했다.
외골격을 구성하는 것과 놈이 공격해올 때 소모하는 것도 똑같은 전하였기에
회귀 전에도 놈에겐 두 번 공격할 때마다 외골격이 일시적으로 약해진다는 약점이 존재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놈의 외골격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난 표정으로 나태상은 내게 ‘세 번째’ 공격을 시도해왔다.
-콰콱!
…이번에도 막혔어?!
세 번째 공격이 끝난 뒤임에도 불구하고 나태상의 외골격은 이번에도 약해지지 않았다.
화력이 대단한 대신, 한번 공격할 때마다 외골격을 소모하는 것이 나태상이 가진 외골격의 특징인데….
이번에도 내 공격을 튕겨낼 정도로 놈의 외골격이 건재한 상태라고?
“…….”
갑자기 닥쳐온 예상외의 상황에 나는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멀리서 화력을 퍼붓는 화력전에선 그 누구보다 더 강력한 힘을 보여주던 인물이 나태상이었지만 특유의 약점 탓에, 회귀 전 놈은 산군 중에서도 상대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놈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역시 놈을 가볍게 보고 있었는데….
나태상은 어째선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월등히 강해진 상태였다.
-파지직!
눈에서 퍼런 뇌기를 흩뿌리며 나태상은 네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양손에 막대한 양의 전하가 응집되었다. 놈의 외골격이 그에 호응하며, 응집된 전하를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두근!
동시에 어둠달에 박힌 검은 심장이 묵직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시커먼 어둠이 마력회로를 타고 울컥울컥 내게 새로운 활력을 선사했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안광이 더욱 짙어지며 요사한 빛을 흩뿌렸다.
“주, 주목! 여기 좀 봐주세요!”
그렇게 네 번째 충돌이 이어지려던 그 순간!
팽팽하게 맞서던 나와 나태상의 사이에 별안간 벌벌 떨리는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
“…매니저님?”
…저 여자는 얌전히 숨어있으라니까, 갑자기 왜 끼어들고 난리야?
벌벌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신지현이었다.
“후, 후우우. 태백에서 손꼽히는 분들답게 사, 살벌하게들 싸우시네.”
나와 나태상이 공방을 나누는 동안,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신지현은 공포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몸을 주물럭거리며, 특유의 미소와 함께 너스레를 떨었다.
“싸, 싸우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지, 질질 끌어봐야 피차 좋을 것 없을 텐데.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때요? 저희 쪽에서도 물러나 드릴 테니 다시 협상해보는 건?”
어느새 챙긴 건지, 신지현은 두 손으로 큼지막한 벽걸이 시계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슬슬 여섯 시에 가까워지는 시곗바늘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크흐흐. 내가 그 협상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나?”
“지금 시간은…. 어디 보자, 다섯 시 오십 팔 분이네요? 어머나. 오늘 일곱 시 무렵에 중요한 손님께서 이곳에 방문할 예정이라 들었는데…. 그분께서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시려나?”
‘손님’이란 단어를 들은 나태상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크으으윽! 네, 네놈들 같은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데는 삼십분이면 충분해!”
“글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지껄이는 것치곤, 내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지 않았나?”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인지, 나태상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놈은 몸에서 다시 한 번 시퍼런 전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형태를 갖춰가는 놈의 외골격에 대항하듯, 어둠달에서도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시구나…. 그럼 이건 어때요?”
다시 시작된 대치를 지켜보던 신지현은 생긋 웃더니, 들고 있던 시계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곤 품속에서 사무용 커터칼을 하나 꺼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덜미에 가져갔다.
“…!”
-푸욱.
순간적으로 커터칼이 피부를 살짝 찢고 들어갔다.
경악 어린 정적 속에서 새하얀 목을 타고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야야. 좀 아프긴 하겠지만, 이대로 조금만 힘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 내 수고가 덜어지겠지. 뭐하는진 모르겠지만. 할 수 있으면 해봐.”
-까드드득
나태상의 이죽거림에 신지현은 망설임 없이 커터칼의 스위치를 위쪽으로 드르륵 올렸다.
삐죽 튀어나온 칼날이 길어지며, 그녀의 목에 난 상처가 한층 더 깊어졌다.
새빨간 선혈이 목덜미를 타고 흐를수록, 그것을 지켜보는 나태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의표를 파고들어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인질로 잡다니, 걸물은 걸물이로군.]
번개를 이용해 신지현과 기계장치를 동시에 태워 없앤다면 모를까.
그녀가 저런 식으로 목숨을 잃을 경우, 낭패를 보는 것은 나태상 쪽이었다.
무엇보다, 나태상에겐 내 수비를 뚫고 신지현의 목숨을 가져갈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크으으윽! 이야기는 들어보지.”
이를 으드득 깨문 채로 신지현을 노려보던 나태상이 입에서 마침내 항복 사인이 나왔다.
그의 몸 전체를 휘감고 있던 외골격이 푸스스 흩어졌다. 사방에 들끓었던 전하도 칼날처럼 벼려진 살기도 모두 멀끔하게 자취를 감췄다.
“진작 말로 할 때 들으셨으면 좀 좋을까요?”
신지현은 여전히 부러진 펜촉을 제 목에 가져다 댄 채로 생긋 웃었다.
약간의 광기까지 느껴지는 신지현의 웃음이 오늘따라 섬뜩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