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이렇게 귀찮은 일에 동행을 자처하시다니. 우리 헌터님께서 무슨 일이실까요?”
말투는 샐쭉하니 퉁명스러웠지만 나를 바라보는 신지현의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있었다.
듀라한의 뒷좌석을 쓰다듬는 그녀의 휘어진 눈에서 노골적인 열망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신지현의 열망 어린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책망하듯 핀잔을 줬다.
“…그래도 산군과 만나는 일인데, 그게 ‘귀찮은 일’이라니요.”
우리는 지금, 유영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산군 ‘뇌제’ 나 태상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 딴엔 협상 대상이 강력한 무력을 지닌 산군이니만큼 모처럼 동행을 자처해준 것이었는데, 신지현이 그것을 ‘귀찮은 일’ 정도로 일축해버리니 묘하게 심기가 뒤틀렸다.
…거참.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대범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잘 모르겠군. 회귀 전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피, 재미없긴. 아무리 산군이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죠. 꼴에 산군이라고 제 구역에 콕 틀어박히기나 하곤, 지가 무슨 히키코모리야 뭐야.”
“히키코모리라니….”
천하의 산군을 순식간에 방구석 외톨이 정도로 격하시켜버린 신지현의 대범한 표현에 내가 아연함을 느낀 사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음료 캐비닛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냈다.
그리곤 신지현은 해맑은 표정으로 딱 봐도 독해 보이는 위스키를 내게 ‘병째로’ 권해왔다.
“어때, 헌터님도 한 병 하실래요?”
“한 병이요? 미쳤어요? 낮부터 그런 걸 병째로 들이키다니….”
“에이. 됐어요. 허우대도 훌륭한 남자가 약한 소리나 하시긴. 저 혼자 마실게요.”
다른 것도 아니고 신지현의 손에 들린 것은 족히 40도는 훌쩍 넘어가는 스코틀랜드제 40도짜리 스카치 위스키였다.
내가 신지현의 정신 나간 제안에 난색을 보이자, 그녀는 피식 웃더니 손에 든 위스키를 병째로 꼴꼴꼴 들이켰다.
그렇게 신지현은 마치 이온음료를 마시듯, 단숨에 독한 위스키 한 병을 통째로 비워버렸다.
…어떻게 되어 먹은 주량이냐 저건. 또.
“푸하! 역시 안종훈 그 양반이 술 보는 눈은 있다니까. 앞으로 좀 ‘자주’ 태워주세요. 이런 호사 좀 자주 누려보게.”
위스키를 한 병 비워낸 신지현은 진한 알코올 냄새를 풀풀 풍겨대며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일반인이라면 단숨에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응급실로 직행할 만용이었지만,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스레를 떠는 말투도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 핫! 자, 잠깐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런 신지현의 기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 순간, 우리가 뭐하러 가는 중이었는지가 떠올랐다.
덕분에 뒤늦게야 정신을 퍼뜩 차린 나는 화들짝 놀라 신지현에게 소리를 질렀다.
“새,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협상하러 가는 길에 위스키 원샷 때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뭘 모르시네. 옛날 해적 영화에서 이르길, 협상은 알코올에 젖은 상태로 하는 거랬어요. 게임에도 나오잖아요? 협솨아앙!”
내 격한 반응에도 괴상한 소리만을 늘어놓은 신지현은 피식 웃더니 위스키를 한 병 더 집어 들었다.
위스키병 라벨에 얼핏 비친 숫자로 미뤄보건대, 이번엔 50도를 훌쩍 넘어가는 물건이었다.
까드득 병뚜껑 돌리는 소리, 독한 참나무통 냄새와 함께 신지현은 이번에도 위스키를 병째로 한 방에 비워버렸다.
‘쟤…. 진짜 일반인 맞죠? 어르신?’
아무래도 신지현의 간덩이가 부어 있다는 내 가설이 맞는 모양이었다.
위스키를 두 병이나 통째로 비운 신지현의 주량에 나는 일종의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주량에 기함한 나는 머릿속으로 농담 삼아 위철용에게 질문을 던졌다.
[쯧쯧. 멍청한 놈 같으니…. 본존이 아무리 저 계집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지만, 네놈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구나.]
‘…예?’
하지만 위철용은 내가 기대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마리 술고래와 같은 신지현의 주량에 감탄하거나 경악하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나를 별로 곱지 않은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저 계집도 사람은 사람이라, 산군을 협박하러 가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게다.]
‘…두려움, 이라구요?’
힐난하는 듯한 위철용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신지현의 모습을 바라보자….
-덜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료 캐비닛을 뒤적이는 신지현의 왼손이 떨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위스키를 두 병이나 비우고도 음료 캐비닛을 뒤지는 이유는 바로,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해할 수 없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신지현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해고 뭐고, 그놈의 ‘그’ 신지현이란 표현은 도대체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예?’
[이제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신지현 저 아이가 그때의 그 계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내 기억 속, 회귀 전의 신지현은 모종의 이유로 ‘뒤틀려버린’ 모습이었다.
아모스의 수작인지, 아니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신지현은 명백히 별개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회귀 전에 신지현에게 갖고 있었던 원한 탓인지. 그동안 그녀가 아무리 개념 찬 모습을 보인다고 한들, 내게는 그런 모습들마저 하나같이 의심스럽고 고깝게만 느껴졌었다.
‘…그래요. 슬슬 인정할 때도 되긴 했죠.’
“어머…?”
마음속에 결심이 서자, 나는 신지현의 손에 들린 위스키를 한 병 뺏어 들었다.
엉겁결에 내게 위스키를 빼앗긴 신지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꿀꺽.
크으윽! 이런 걸 어떻게 마셔댄 거야?
신지현이 집어 들었던 위스키는 내게 상상을 초월한 맛의 혁명을 선사해줬다.
어찌나 독한지, 벌겋게 달군 쇠를 통째로 삼키는 듯 목 전체가 후끈거릴 지경이었다.
입안에 남은 알싸한 알코올 향과 화끈거리는 고통 덕분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끄윽. 죄송합니다. 매니저님.”
빌어먹을. 역시 취하지는 않네.
신지현에게 맨정신으로 말하긴 뭔가 오글거려서 알코올의 힘을 좀 빌려볼까 했지만,
헌터의 초인적인 신진대사는 독한 위스키마저 즉시 해독할 정도로 강인했다.
애석하게도 확 달아오른 취기는 알딸딸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금방 사라져버렸다.
금방 사라진 취기에 쓴웃음을 지은 나는, 위스키를 다시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곤 잠깐 찾아온 불콰한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신지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정 한번 독특하시네요. 그래, 이런 사람 꼭 한 명씩 있지. 술만 들어갔다 하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
엉겁결에 내 뜬금없는 사과와 마주한 신지현은 피식 웃음을 흘렀다.
“아뇨, 헌터가 술에 취하는 거 보셨습니까? 젠장. 좀 취했으면 좋을 텐데.”
“그럼 갑자기 무슨…. 핫! 설마 또 뭔가 저지르신 거예요? 어쩐지, 갑자기 따라오겠다더니…. 이번엔 뭐에요? 저 모르는 사이에 그 양반이랑 한 따까리 하기라도 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살짝 욕지기를 중얼거린 나는 신지현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나직하게 심호흡한 뒤, 마음속에 담아놨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 매니저님을 쌍X이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음을 정리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동안 신지현에 대해서 있었던 이미지를 한마디 욕설로 축약해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그래, 그렇지 때로는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사내…. 아니! 지금 뭔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뭐요? 쌍X? …헌터님께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뜬금없는 사과에 이어, 뜬금없는 욕설과 마주한 신지현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화를 내며 소리를 빼액 내지른다든가, 쿨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주억거리지도 않았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신지현은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야이 정신 나간 놈아, 갑자기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저 아이가 어떻게 반응을 하겠….]
위철용 또한,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욕설을 박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대단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기왕 털어놓을 거, 숨김없이 털어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계속해서, 내 사회성에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는 위철용에게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위철용의 충고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지금의 난 모종의 결심을 한 상태였다.
[터, 털어놓는다고? 무, 무엇을 말이더냐?]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이 인정한 벗에겐 숨기는 거 하나 없이 속내를 그대로 털어놔야 진짜배기 사내라고.’
회귀 전의 원한도 있겠다.
원래는 철저하게 내 쪽에서 신지현을 일방적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동행하며 그녀의 진면목을 지켜본 결과, 생각이 변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기적이지도, 악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삭막해진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남을 도우려 드는 착해빠진 순둥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뭐, 말투는 순둥이완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말이지.
[…신지현, 그 아이를 인정한 게냐?]
‘인정 못 할 것도 없죠.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일반인에 불과한 신지현이 산군과 단독으로 면담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무고한 피를 줄이기 위해, 산군과의 ‘협상’에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섰다.
스스로 두려움을 술로 마취시키기까지 하면서 말이지….
그녀의 각오를 확인하자, 나는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내 마음속에 세워진 편견의 장벽은 그렇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위철용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신지현은 음료 캐비닛에서 술을 한 병 더 꺼내 들었다.
그리곤 왜인지 그녀의 눈가에 습기가 맺힌다 싶더니, 신지현은 이번에도 꺼내든 술을 병째로 꿀꺽꿀꺽 들이키기 시작했다.
-탕!
독한 술을 잘도 꿀꺽꿀꺽 비워낸 신지현은, 텅 비어버린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어찌나 감정이 강하게 실려 있었는지, 그 충격에 운전석에 앉은 서민혁이 움찔 몸을 떨 정도였다.
“푸하! 그래요.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맞아요. 소문대로 저 돈도 잘 밝히고. 막말도 잘해요…. 그리고… 그리고….”
입가에 주르륵 흘러내린 술을 슥 닦아낸 신지현은 푸념하듯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들을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소문들을 하나씩 입에 담을 때마다 그것에 비례하여 그녀의 표정이 계속해서 어두워졌다.
입가에 걸린 쓰디쓴 미소가 더욱 서글프게 변했다.
“월급 도둑에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에…. 그래요. 헌터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네요.”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쌓아둔 한이 새어 나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얼거리는 신지현의 얼굴은 화로에서 갓 빼낸 주물처럼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술을 한 병 더 빼 들었다.
-턱!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신지현의 손아귀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무슨 짓이에요? 드라마 안 보셨어요? 넋두리하면서 우아하게 술을 마시는 건 악역의 특권이라구요.”
신지현은 어딘지 우울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매니저님이랑 계속 같이 다녀보니까. 생각이 변하더라고요. 매니저님.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던데요?”
“좋은…. 사람이요?”
신지현은 의외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되물었다.
“예,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본인에게 이득될 것은 쥐뿔도 없는데.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아무나 못 할 짓이죠.”
“모, 목숨을 걸긴요…. 여, 여차하면 빠져나올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매니저님께 못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신지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는 말에, 쑥스러워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못되게 굴어요? 뭘요? …설마! 아니, X발! 그동안 계속 사고치고 돌아다녔던 게, 다 저 엿먹이려고 그랬던 거예요?”
머리가 좋은 만큼 눈치도 빠른 모양이로군.
굳이 긴 설명 없이, 신지현은 내가 무엇을 사과했는지 즉시 눈치 채버렸다.
더듬더듬 말하는 그녀의 눈에 히스테리 가득한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뭐,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는데. 부정은 못 하겠네요. 죄송합니다.”
“갸아아아악! 어쩐지이이이!”
기왕 사과하기로 마음먹은 것,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신지현은 손을 요렇게 갈고리 모양으로 굽힌 채, 나를 노려왔다.
“어허, 진정하세요. 진정!”
“막아? 막아?! 댁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탈모에! 위장병에! 끄아아악!”
잔뜩 독이 오른 신지현은 계속해서 나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일반인에 불과한 그녀가 헌터의 반사신경을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의 필사적인 공격은 내가 슬쩍슬쩍 휘두른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그래도, 고생만 하신 건 아니었잖아요?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도 했고. 숙원도 몇 개 이뤄 드렸고….”
“…망할.”
마음고생이 심하긴 했겠지만, 그로 인해 신지현이 얻어낸 이득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것을 상기시켜주자, 신지현은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털썩 주저앉았다.
“근데, 도대체 왜 갑자기 제게 그런 요상한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심심해서?”
“아뇨. 당연히 아니죠. 매니저님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어요.”
뭔가 좀 멋들어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간질거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간질간질하니 민망한 기분이 들어, 나는 앞으로 그녀에게 일을 진심으로 믿고 맡기겠다는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러니, 매니저님. 앞으론…. 아니,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
산군 ‘뇌제’ 나태상.
특이하게도 그는 산군의 작위를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태백 산하의 공격대 같은 무력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금융 쪽에 천부적인 수완을 드러낸 나태상은 산군이 된 뒤로 자신의 이미지와 인지도를 이용해 태백 길드의 재계에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태백의 상층부로 도약하였다.
때문에, 지금 나태상이 기거하는 곳은 예전에 증권가가 들어서 있었더니 여의도 중심에 있었다.
“흐응. 이거 인사팀, 아니지 이제 감찰팀의 팀장이신, 신 팀장님 아니신가. 이거 오랜만이군.”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나태상이 업무를 보고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특이한 복장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부담스럽게 촌스러운 노란 양복에 빼곡하게 그려진 번개무늬를 시작으로, 고전적으로 촌스러운 흰 와이셔츠에 빨간 단색 넥타이와 독특한 번개무늬 형태의 안경까지….
심지어 컨셉까지 충실하게 머리까지 노랗게 물들인 것이 한번 보면 도저히 잊어먹을 수 없는 행색이었다.
특이한 복장의 사내, 나태상이 가식이 만연한 미소를 띤 채로 신지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신지현 역시 그의 인사를 가식적인 미소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위스키를 포함한 술을 연달아 비워낸 지, 아직 삼십 분이 지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인사에선 짙은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호오…. 한때 사무직의 신이라 불렸던 우리 지현 씨가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며 남자랑 같이 나타나다니. 그쪽도 ‘훌륭한’ 태백의 일원이 된 모양이야.”
산군의 초인적인 감각으로 신지현의 몸에서 풍겨오는 주향을 감지한 모양인지, 나태상의 눈썹이 경멸을 담아 살짝 휘어졌다.
그렇게 시선에 경멸을 담은 나태상이 뒤늦게 나를 바라보며 저열한 농담을 건네 왔다.
“태백의 일원이야 예전부터였죠.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선배님 태백의 설용호입니다.”
“흐응. ‘얼굴 천재’답게 그쪽도 천재인가? 낮부터 쌍으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다니, 보통 대단한 솜씨가 아닌가 봐?”
나태상은 의도적으로 내 인사를 무시하며 흘려보냈다.
그리곤 신지현을 바라보며 또다시 희롱에 가까운 저열한 농담을 던졌다.
“아무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요.”
나태상의 추잡한 농담에도 신지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생긋 웃은 얼굴로 능글맞게 그의 희롱을 받아친 그녀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보기 좋은 커플께서 대낮부터 왜 이 몸을 찾아오셨나?”
“오행에 대한 공격과 유영화 산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주셨으면 해서요.”
어쩐지 흥미를 이른 나태상이 용건을 묻자 신지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생글생글, 능글능글 거리며 말을 꺼낸 신지현의 말투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들은 나태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호오…. 일개 인사팀장 따위가 감히 산군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내게 번복하라 시키다니…. 우리 지현 씨가 못 보던 사이에 간담이 많이 커진 모양이야.”
-콰직!
나태상의 손에 쥐어진 만년필이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와직 접혔다.
만년필에서 터져 나온 잉크가 그의 손을 시꺼멓게 적셨다. 터져 나온 잉크만큼 시커먼 살기가 나태상의 몸에서 뭉클뭉클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머? 걱정해주신 덕분인지 간 건강은 확실히 좋아졌어요. 뭐…. 아무리 간담이 커졌다고 해도 제가 ‘감히’ 산군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죠. 거래하러 온 거예요.”
나태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도 신지현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띤 상태로 그녀는 나태상에게 태연하게 거래를 제안했다.
“…거래라고?”
의외의 내용을 들어서일까?
나태상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음험한 기운이 뚝 멎었다.
역시, 그도 태백의 상층부에 속한 인물답게 이런 쪽으론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특히나 신지현이 ‘수상쩍은’ 반응을 보여서인지 그는 즉시 행동을 취했다.
“이보게들, 자네들은 잠시 나가주게.”
“예?”
신지현의 눈치를 살핀 나태상은 사무실의 모든 인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무실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의 입에서 천둥이 쳤다.
“말대꾸하지 말고 어서!”
나태상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천둥은 단지 묘사적인 의미에서의 천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뇌제라는 별명에 어울릴 만큼 찌릿찌릿한 번개의 힘을 담고 있었다.
때아닌 날벼락에 노출된 직원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래…. 무슨 ‘거래’인지 한번 이야기나 나눠보지.”
직원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간 것을 확인한 나태상이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신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태백의 ‘높으신 분들’께선 서로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
단순히 ‘약점’ 정도가 아니라 언제든 서로의 정치적, 사회적 생명을 끝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물건까지 쥐고 있었기에, 신지현의 눈치를 살피는 나태상은 은근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촤르르륵
말없이 미소를 지은 신지현이 들고 온 서류를 나태상 앞에 모조리 쏟아버렸다.
정성껏 사진까지 동봉된 서류를 바라본 나태상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서류 속엔 나태상의 저지른 범죄들이 알뜰살뜰 적혀 있었다.
당연히, 일반인들 따위에게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헌터협회 고위직 간부의 자녀라든지, 다른 5대 길드 간부의 자녀 등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납치, 살해 등등의 증거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금융권 장악하시겠다고 ‘노력’하시더니. 재밌는 일들을 많이 저지르셨더라구요? 이런 것들이 알려지면 아무리 나태상 산군님이라도 무사히는 넘어가지 못할 텐데.”
무사히 넘어가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이야 제가 가진 권력을 동원해 철저히 묻어버릴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태상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정, 재계의 고위직들이었다.
그는 금융권을 장악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고 또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자네가 도대체 어떻게 이걸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협박을 하는 건가?”
“예. 협박 맞아요. 죄송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움직이시지 않으면 바로 이걸 언론에 뿌릴 거예요.”
예상치 못한 ‘거래’ 조건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나태상이 으르렁거리듯 신지현을 바라보았다.
신지현은 여전히 능글거리는 얼굴로 그의 살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여기서 살아나갈 자신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