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서민혁의 연락을 듣고 급히 상경한 신지현은 곧장 나를 찾아왔다.
들은 바가 있어선지, 사무실 소파에 걸터앉은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 기사님이 어디까지 상황을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나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신지현에게 이제껏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였다.
물론, 유영화와 나눴던 대화에 관련해선 약간의 각색을 곁들였다.
“오행 길드와 전면전을 선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긴 했지만. 세상에….”
유영화, 아니 아모스는 내 앞에서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말 많은 악역의 슬픈 클리셰라며, 자신이 무엇을 꾸미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도발적인 태도는 덤이고 말이지….
그 아모스의 광오한 말을 일부나마 전해들은 신지현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새, 생각해보니까 이거 큰일 아니에요? 어, 어서 길드장님…. 아니, 혀, 협회장님께 알려야 해….”
신지현은 다급하게, 헌터 협회 협회장에게 유영화의 정체와 계략에 대해 알려야한다 역설했지만. 나는 그녀의 반응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유영화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매니저님도 아시잖습니까….”
아모스는 단순한 여흥이라 지껄였지만, 놈이 꾸민 계책을 깨부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세영이 조사해온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모스는 이미 수많은 이들을 포섭한 상태였다.
자신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놈은, 태백의 상층부뿐만 아니라 헌터 업계 전반을 포섭해 자신의 뜻대로 부리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내가 아무리 유영화의 정체에 대해 떠들어 봐야.
놈이 포섭한 세력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바다에 조약돌 하나 던진 것보다 못한 파급력을 지닐 뿐이었다.
“그, 그야 그렇지만. 이대로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잖아요! 어, 어떻게든 해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신지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얼굴에선 무고한 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염려가 절절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
순간, 아모스의 음흉한 얼굴과 신지현의 절박한 표정이 머리에서 겹쳐졌다.
그 덕분에, 그동안 가졌던 오랜 의문 중 하나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겠군.
아무래도 회귀 전의 신지현 또한, 아모스 혹은 놈과 유사한 놈의 수작질에 당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때와 지금의 어색한 갭을 도저히 설명할 순 없으니 말이지.
얼떨결에 찾아온 때 아닌 깨달음(?)에 피식 웃은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안쓰럽게 덜덜 떨고 있는 신지현의 눈앞에 USB 메모리를 하나 꺼내 놓았다.
“당연히, ‘어떻게든’ 해야겠죠. 그래서 제가 매니저님을 부른 게 아니겠습니까.”
서류를 건네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웃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신지현은 얼떨떨하게 USB 메모리를 받아들었다.
“이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일단 이걸로 유영화의 ‘굳건한’ 세력을 좀 ‘설득’해보자구요.”
때로는 칼보다 펜이 더 강할 때도 있는 법이다.
신지현에게 건네 준 메모리엔 태백 길드 상층부의 치명적인 약점이 가득 들어있었다.
이중계약, 탈세, 보험사기, 부정청탁 등등.
회귀 전의 기억을 살려, 비밀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얻어낸 것들이었다.
다행히, 놈들이 자신과 정적들의 추악한 약점을 보관해 둔 곳은 회귀 전과 똑같은 곳에 있었다.
원래는 훗날, 본격적으로 태백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사용할 자료들이었지만….
변수가 생긴 이상,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유영화의 세력을 설득한다구요? 설마…!”
역시, 총명한 신지현답게 그녀는 약간의 단서만으로 내가 무엇을 넘겨줬는지 눈치 챈 것 같았다.
사냥감을 포착한 암여우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나는 똑같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
신지현에게 메모리를 넘겨준 뒤.
나는 비밀리에 다시 한성유통 본사를 찾았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화려한(?) 방식이 아닌, 어둠이 드리운 야음을 틈타 나 혼자서만 은밀히 이세영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어, 어서 오세요. 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를 찾아오시다니….”
때 아닌 방문을 받은 이세영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나를 맞아줬다.
또 머릿속으로 괴상한 망상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몸을 배배 꼬는 그녀의 몸짓이 그녀의 심상치 않은 내면을 잘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 봐도 해괴한 이세영의 반응에 쓰게 웃곤, 나는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만, 사건이 사건인지라….”
“사, 사건이라뇨? 우, 우리 설마 들킨 거예요?”
‘사건’이란 단어 두 글자에 발갛게 달아오른 이세영의 얼굴이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이유로 말을 더듬었다. 달떴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뇨, 들켰으면. 저보단 태백 길드의 법무팀이나 유화영의 끄나풀들이 먼저 여길 덮쳤겠죠.”
이세영의 긴장을 풀어 줄 요량으로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망상이 또 괴상쩍은 방향으로 진행된 모양인지, 하얗게 질린 이세영의 눈빛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세, 세상에…. 아, 아빠 귀에 들어가면, 저, 저 죽는단 말이에요.”
…또냐.
이번에도 이세영이 두려워하는 포인트는 정상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녀는 유영화나 태백의 법무팀 보단, 자신의 아버지 귀에 이 일이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거 참.
담력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특유의 망상벽이 보여주듯 4차원적인 사고 때문인 건지….
“안 돼! 이번엔 발가벗겨진 채, 게이트에 던져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농담입니다. 진정하세요 세영 씨.”
순간, 본의 아니게 이진욱의 엄혹한 교육 방식을 엿본 것 같았지만, 나는 패닉에 빠져 몸을 떨기 시작한 이세영의 어깨를 붙잡아, 강제로 시선을 마주했다.
“들킨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네.”
핏기를 잃어버렸던 이세영의 볼이 다시 바알갛게 물들었다.
혼란에 물들었던 눈도 다시 특유의 달뜬 기운을 머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그녀에게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조사하셨던 유영화 산군에 관련된 말입니다만….”
신지현에게 일러줬던 내용이 다시 한 번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내 설명을 듣던 이세영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돼요. 5대 길드 전체가 휩쓸리는 대 전쟁이라니. 헌터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한 전쟁이라니….”
다행히, 이세영의 반응 역시 신지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이세영은 내 앞에서 처음으로 진중하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세영 씨께 부탁드릴 만한 것이 있어서요.”
“부탁이요?”
진중함을 찾은 이세영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먼젓번의 그 중성적인 허스키한 톤으로 변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품속에서 USB 메모리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세영 씨께 부탁드릴 내용은 간단합니다. 여기에 나온 장소에 가셔서. 사진을 몇장 확보해주세요.”
이세영에게 건네 준 메모리엔 신지현에게 준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이 들어있었다.
메모리에 기록된 장소들은 태백의 상층부와 유착 중인, 정부 소속의 공무원과 헌터 협회 직원들의 비밀 장부가 보관된 장소들이었다.
애석하게도, 모든 자료들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비밀 회선 상의 네트워크 속에 남아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것 외의 자료들을 확보하기 위해, 이세영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그녀와는 신지현만큼 깊은 유대를 쌓지는 않았기에, 어느 정도 위험성이 있긴 했지만….
“용호 씨의 부탁이라면, 이쯤이야 당연히 해드릴 수 있죠. 금방 보내드릴게요!”
기껏 되찾은 진중함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엔 의미가 없는 것인지, 나의 ‘부탁’을 받아 든 이세영의 표정이 또 다시 꿈꾸듯 몽롱하게 변했다.
최소한 나를 위해, 유영화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자료를 조사해왔던 것 하며.
저렇게 내게 푹 빠진 듯 몽롱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봐선 어느 정도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여인의 연심을 이용하는 것만큼 치사한 일은 없지만 말이지.]
‘끄응,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위철용이 정곡을 찔러왔다.
그의 말대로 어떻게 보면, 이세영이 나를 사모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치사한 짓이긴 하지만.
반대로, 사랑에 눈이 먼 여인만큼 믿을 만한 인물이 없는 법이니까….
“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아파오는 양심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이세영의 손을 와락 붙잡았다.
“으핫! 힉! 흣! 아, 알겠어요. 최, 최대한 빨리 보내 드릴게요….”
마주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뜨끈한 온기에 이세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놈의 계책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만…. 고작 이 정도만으로 그 간악한 것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이더냐?]
뜨끔거리는 양심을 마음속으로 부여잡고, 달래고 있으려니, 어쩐지 언짢은 듯 걱정스러운 듯 묘한 안색의 위철용이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아모스, 본인을 막아낼 순 없겠지만. 최소한 놈을 둘러 싼 세력을 와해할 순 있을 겁니다.’
그랬다.
신지현과 이세영을 이용해 꾸민 계책은, 아모스 본인을 노린 것보단.
그녀의 행위에 설득력을 부여하며,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비호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는 주변 세력을 노린 것이었다.
유영화의 몸을 통해, 아모스에게 직접적으로 포섭된 다른 산군들이나, 헌터들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반대로, 유영화의 세력에 얽매여 아모스에게 ‘협조’ 중인 세력들의 경우엔, 직접적으로 포섭되었다기보단, 이익이나 정치를 통한 ‘간접적’인 형태로 포섭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렇게 ‘간접적’으로 포섭된 이들을 노리기로 결정하였다.
[네놈 말대로 일이 그리 쉽게 풀린다면 좋겠다만….]
나름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했지만, 위철용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는 편이 더 낫지 않겠더냐?]
…아니면, 위철용 입장에선 직접 쳐부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추잡한’ 방법을 쓰는 것이 못마땅한 걸지도.
‘그들쯤 되는 위치의 권력자들에게 육체적 폭력은 그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거든요. 잠깐 동안은 효과가 있을지언정, 육체적인 폭력은 오히려 반감을 부르기 마련이지만….’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위철용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이권과 사회적 명망이 달린 형태의 폭력은 권력자들 입장에선 무엇보다 두려운 법이죠.’
위철용이 제시한 육체적인 대화는,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폭력 앞에 잠깐 굴복할 수야 있겠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내 말을 들어줄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치부를 손에 쥐고, 그들이 이권과 사회적 명망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협박을 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기 마련이지….
손을 마주 잡은 채, 몽롱한 표정을 짓는 이세영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아모스를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날렸다.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고?
그래, 네놈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응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