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내가 듀라한의 트렁크에 실려 있었던 구호 물품들을 행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노량진 사람들을 위한 즉흥적인 구제활동이 개시되었다.
“사, 산군님? 갑자기 이건 무슨….”
공짜 식량에 공짜 식수, 그리고 공짜 의약품까지.
신지현이 남부연합을 위해 준비한 구호 물품들은 노량진의 빈민들에게도 충분히 탐나는 구성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듀라한 주위로 몰려들었다.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운전석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서민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어려운 분들 아니겠어요? 나와서 좀 도와줘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서민혁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곤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구호 물품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 하나를 그에게 안겨줬다.
-밀지 마! 밀지 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어쩜 얼굴도 고우신 분이 마음씨까지 이렇게 비단결처럼….
순식간에 몰려든 빈민들의 성화 덕분에 커다란 트렁크를 가득 채웠던 구호물자들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갔다.
구호 물품을 한아름 받아든 빈민들은 감동받은 듯 먹먹한 눈빛으로 내게 감사인사를 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여기저기서 북적북적 몰려든 빈민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조금씩 비어가는 트렁크를 바라보는 빈민들의 눈빛에 아쉬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본사에 남은 인사팀 잔류 인원들에게 이것들 좀 더 갖고 와달라고 연락해주시겠어요?”
“예, 옙! 아마 팀장님께서 준비해두신 여분이 좀 더 있을 겁니다.”
그런 빈민들의 아쉬운 눈빛을 슬쩍 바라본 나는 서민혁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서민혁은 군말 없이 내게 머리를 숙이곤,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슬슬….
“자, 자 여러분! 대단히 아쉽지만, 준비한 물품들이 전부 떨어져 버렸군요! 설마하니,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제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우렁우렁 퍼져나갔다.
물품이 동났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곧이어 아쉬움을 담은 탄성이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아직 구호 물품을 받지 못한 빈민들의 눈빛에 간절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이미 그것도 대비해 놨죠! 본사에서 곧 지원이 추가로 도착할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모두가 넉넉해질 수 있다구요! 외쳐! 설용호!”
-와아아아! 설용호! 설용호!
하지만, 지원이 계속된다는 말에 빈민들은 환희에 가득 찬 함성을 내지르며 내 이름을 연호했다.
간절함과 아쉬움을 머금었던 그들의 눈빛이 이번엔 희열과 기쁨 속에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럼 잠시, 저는 본사에 연락 좀 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동안은 여기, 제 부하 직원은 계속 이곳에 남아, 여러분을 도와드릴 겁니다!”
“산군님. 본사에서 곧 출발을…. 예?”
나는 서민혁을 지목하여, 앞으로는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라 선언했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뱉은 소리였기에, 갑자기 지목당한 서민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는 그의 눈빛은 ‘제가요?’ 라는 질문이 깃들어 있었다.
“본사에서 지원 오는 대로, 서 기사님이 주관해서 계속 이 행사를 진행해 주세요.”
“예, 예엣?!”
‘최대한 화려하게, 나 설용호가 노량진의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것처럼 행동해 달라 이겁니다. 모두가 제 부재를 깨닫지 못하도록!’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서민혁에게 나는 목소리를 낮춰,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
그제야 내 의도를 눈치 챈 서민혁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멍충하니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결연한 의지를 품었다.
“…알겠습니다. 산군님. 이번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동안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결심 때문일까?
차분하게 대답하는 서민혁의 목소리가 왜인지 비장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서민혁에게 씨익 웃어준 뒤,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게냐?]
빈민들에게 서민혁을 팔아넘기고 돌아서려던 찰나, 갑자기 위철용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곧이어 녹색 배후령의 형태를 한 위철용이 내 품속에서 쑤욱 빠져 나왔다.
듀라한을 둘러싼 빈민들의 행렬과 소란스러운 분위기, 평소와는 달리 진지해진 서민혁의 태도 탓인지 위철용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임기응변으로 어떻게 잘 넘겼어요.’
목소리를 낮게 깔아 위철용의 질문에 답해준 나는, 운룡보를 은밀히 발동시켰다.
구름 속에 숨어드는 한 마리 용처럼, 내 신형은 와글와글 몰려든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곤 슬금슬금 한성유통을 향해 도랑에 숨어드는 뱀처럼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것보다. 준비할 게 있으시다더니, 이제 다 끝나셨나 보네요?’
[아암! 그래, 언제든 그 같잖은 놈이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비를 철저히 해뒀느니라.]
위철용은 자랑하듯 으스대며 자그마한 비췻빛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철저하게 대비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엔 강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그 심어진 인격이니 뭐니 하는 것과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다니…. 그땐 어르신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을 표하는 위철용에게 나는 평소처럼 비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요상한 인격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감정이 좀 격해진 탓인지, 말끝을 흐린 내 목소리에 물기가 촉촉히 머금어졌다.
[이, 이놈이! 호, 혹시 아까 어딜 잘못 맞기라도 한 게냐? 평소답지 않게, 이게 무슨…. 크흠! 크흐흠!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긴….]
평소와는 다른 내 반응에 위철용 역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인지 얼굴이 벌겋게 물든 위철용은 민망함을 담은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쩐지 말을 잇지 못한 나와 위철용 사이에 어색하면서도 민망한 침묵이 감돌았다.
-끼이익!
그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나는 한성유통 본사 건물의 정문 앞에 도달했다.
녹이 슬어있는 금속 문을 열어젖히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거칠게 귓속을 파고 들었다.
“…제가, 이쪽 마당에서 몇 년을 일해 왔습니다만. 정말이지 헌터님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철이 한참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이 소박하니 장식된 로비에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중년인이 묘한 표정으로 대뜸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보통 의뢰인들께선 이곳, 노량진에 방문하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에 급급합니다만, 헌터님께선 다르시더군요. 자신의 이름을 건 구제 활동이라니…. 이거 저희가 한방 먹은 기분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성유통의 김보현입니다.”
눈에 호기심 어린 이채를 띤 중년인, 김보현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정보단체에 속한 인물답게, 그는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늘게 뜬 두 눈에 ‘제법’이라는 감정이 내비치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내가 요란스러운 구제활동을 시작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그쪽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제 쪽에서도 대비를 좀 해둘까 했거든요. 반갑습니다. 설용호입니다.”
그런 김보현에게 나는 ‘대비’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구제활동을 기획한 이유가 서민혁의 실책 때문이긴 했지만. 그렇게 즉흥적으로 짜낸 계획 역시, 어느 정도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정보단체’와 접선한 이상. 내가 그들과 접촉했다는 것. 아니 그들이 둥지를 튼 노량진에 방문헀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건 새어나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내가 요란스럽게 내 이름을 걸고 구제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그렇게 새어나간 소문에 대비하여 일종의 알리바이를 구축해 놓기 위해서였다.
서민혁이 열심히 굴러주고 있는 덕분에, 밖에선 아직도 내 이름 석자가 우렁차게 연호되고 있었다.
“저희 쪽엔 걱정하신 것처럼, 입이 가벼운 친구는 없는데 말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확실히, 그 나이에 태백의 산군 자리까지 쟁취하신 분답군요. 301호입니다. 이쪽 계단을 따라, 쭈욱 올라가시면 됩니다.”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김보현은 여전히 나를 호의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인지 피식 웃음을 지은 그는 주머니를 뒤져 얇실한 카드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301』
김보현이 건네준 낡은 고동색 플라스틱 카드엔 희미하게 301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에게서 카드를 받아 든 나는, 그가 안내해준 대로 3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서, 설용호 헌터님? 오, 오셨네요? 바, 반갑습니다.”
건네받은 카드키를 이용해, 두꺼운 금속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이세영이 특유의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투로 나를 반겨줬다.
[정보를 다룬 다는 놈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런 어두컴컴한 곳을 선호는지 모르겠구나.]
위철용의 푸념처럼 301호 사무실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니 음침한 분위기였다.
창문조차 없는 3평 남짓한 사무실 내부엔 책장이며 서류철 등등이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때문에, 천장에 딱 하나 있는 조명조차 다양한 장애물에 가로막혀, 그리 만족스러운 밝기를 제공해주지 않고 있었다.
“새, 생각했던 것보단 엣취! 빠, 빨리 도착하셨네요?”
거기에 좁다란 공간 전체가 책과 서류로 가득 차 있어, 공기조차 텁텁하기 짝이 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낡은 잉크냄새와 쿰쿰한 먼지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덕분에, 상기된 얼굴로 낡은 소파 위에 앉아있던 이세영이 요란하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께서, 단둘이 은밀하게 만나자고 하시는데,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죠.”
이세영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흘끗 바라본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평소보다 더욱 감미로운 목소리로, 더욱 낮은 톤으로 그녀에게 책에서 익혀둔 작업성 멘트를 날렸다.
[…몇 번을 들어봐도 참. 본존도 그리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만. 네놈은 정말이지 그쪽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군. 굳이 그 따위 말을 해서 점수를 깎아먹어야겠느냐?]
내 입에서 흘러나온 느끼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위철용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요. 이거 나름 유명한 책에 나온 건데.’
[책? 채액! 혹시 그 책의 제목이 ‘당신도 할 수 있다. 솔로 탈출.’ 뭐 그런 게냐? 그따위 책을 순진하게 믿고 따라하는 얼간이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느니라. 그런 것에 넘어갈 여인 따윈 이 세상에….]
“아. 아으으 무, 무슨 말씀을 그, 그렇게 하세요.”
위철용과 잠시 투닥이는 사이,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이세영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더욱 새빨갛게 화악 달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부끄러움을 가득 담아 더듬거리던 목소리는 아예 풍 맞은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손가락은 갈 곳을 잃고 애꿎은 책상만을 벅벅 긁었다.
‘이 세상에 있는데요?’
[끄응…. 그놈의 외모가 뭔지. 원.]
보란 듯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위철용을 바라보자, 위철용은 못마땅한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희극적인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곤, 나는 여전히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푹 떨군 이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 에헤헤. 첫 아이 이름은 용식이로….”
확실히, 이세영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군 채로 자신만의 달콤한 망상 속 세계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약간의 달콤한 말과 생긋 웃음 지은 눈웃음조차, 이세영에겐 이성을 말끔히 날려버릴 만큼 치명적인 유혹으로 작용해버린 것 같았다.
[네놈의 외모도 외모다만. 이 계집은 정도가 유독 심한 것 같지 않느냐?]
‘…그러게요. 아, 생각해보니까. 얜 튜토리얼 타워에서부터 이랬던 것 같네요.’
하긴, 튜토리얼 타워부터 이세영은 내게 지나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땐 레벨이 1에 불과하였기에, 외모지상주의의 매력보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었을 텐데도 그녀는 나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었다.
내게 이정도로 푸욱 빠진 상태라…. 흐응. 그래, 그렇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