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으허허헉!”
폐가 꽈악 쥐어 짜이는 듯한 비명과 함께, 내 의식은 심상세계에서 현실로 복귀했다.
벌써 몇 번을 겪어봐도 심상세계에서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의 충격만큼은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전신을 강타한 아름다운 고통 덕분에, 내 몸은 마치 수조에서 강제로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요란스레 퍼덕거렸다.
내 몸이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던 듀라한의 푹신한 뒷좌석이 갑작스런 충격을 받아 요란스레 흔들렸다.
“흐헉, 흐허헉. 빌어먹을! 좀 곱게 보내주면 어디가 덧나나.”
거친 호흡을 토해낸 입에선 불평어린 욕지기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쥐어짜듯 새된 비명을 토해낸 폐가 쿡쿡 쑤셨다. 가슴께에서 뻐근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심장에 상당한 무리가 간 것 같았다.
망할, 이번엔 도대체 어떻게 보내줬길래 이렇게까지 참신한(?) 고통이 느껴지는지 모르겠군….
“서, 설용호 산군님! 괘, 괜찮으십니까?”
속으로 위철용에 대한 불만을 궁시렁대려던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내뱉은 비명과 뒷좌석 전체가 쿵쿵 울린 충격에 깜짝 놀란 모양인지, 운전석에 앉아있던 서민혁이 굉장히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다급히 안부를 물어온 것이었다.
전방주시의 철칙 따윈 잠시 잊어버린 채로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는 서민혁의 급박한 눈빛엔 나에 대한 염려와 걱정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피곤했나 봐요. 잠시 졸았더니 악몽을 좀 꿨네요.”
그런 서민혁과 걱정어린 얼굴을 마주한 나는 그에게 단순히 악몽을 꾼 것 뿐이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뭐, 악몽이라면 악몽이지. 그것도 아주 심술궂은 심술쟁이가 등장하는 질나쁜 악몽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하긴. 남부연합에서 그렇게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셨으니, 피곤하실 법도…. 아! 뒷좌석 드링크 캐비닛에 피로 회복제랑 이것저것 챙겨 뒀습니다.”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이 아저씬 눈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린다니까.
서민혁과 인연을 맺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서민혁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눈치’라는 개념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나조차도 때론 종잡을 수가 없을 만큼 모호한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이런 식으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미리미리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 어떤 때는 옆에서 그렇게 눈치를 줘도 내 의도를 가늠조차 못할 때가 있어, 사람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어 준단 말이지….
-벌컥.
머릿속에 떠오른 서민혁의 과거 행적들에 피식 실소를 지은 뒤, 나는 뒷좌석 중앙에 비치된 드링크 캐비닛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이야, 어떻게 제가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워놓으셨네. 역시. 우리 서 기사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시라니까.”
드링크 캐비닛 속의 내용물을 확인한 내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드링크 캐비닛의 내부엔 내가 평소 즐겨 마시는 피로 회복제와 각종 음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내가 별로 즐기지 않는 고급 주류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어느샌가 내 취향을 파악한 서민혁이 내용물을 새로 채워둔 모양이었다.
기특한 마음에 슬쩍 너스레를 섞어 서민혁을 칭찬해주자, 그의 얼굴이 금새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끔은 못미더운 행동을 하긴 해도, 이럴 땐 칭찬을 좀 해줘도 괜찮….
“가, 감사합니다. 역시 산군님께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요 며칠 동안 숙소 쓰레기통을 뒤져본 보람이 있네요!”
뭘 뒤졌다고?
잔뜩 흥분한 서민혁의 입에서 끔찍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튀어나왔다.
덕분에, 모처럼 그를 칭찬하며 음료에 손을 가져가려던 내 몸이 멈칫 굳었다.
음흉한 표정의 서민혁이 내가 머물렀던 숙소의 쓰레기통을 알뜰살뜰 뒤지는 장면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땀방울처럼 주르륵 돋아났다.
아니, 잘 나가다가 이건 또 무슨 갑작스러운 범죄 자백이래니.
“…숙소 쓰레기통은 왜 뒤지셨는데요?”
“하하하. 산군님을 모시는 수행원 입장에서 산군님의 취향을 조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쯤은 기본소양 아니겠습니까?”
서민혁을 대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씩 차가위지기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모습으로 미뤄보건대. 서민혁 본인은 진심으로 쓰레기통을 뒤진 것이 나를 위한 ‘노력’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보통 그런 ‘노력’을 하는 인간들을 일반적으로 ‘스토커’라고 부르지 아마?
“그거랑 스토커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히 스토커랑은 다릅니다. 저희는 산군님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허가된’ 쓰레기만 조사하고 있거든요. 산군님의 프라이버시가 노출될 만한 것들은 저희 쪽에서 미리 소각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눈치없이 알 수 없는 당당함과 자부심을 내비치는 서민혁의 모습에 머리가 살살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하긴…. 이 인간이 원래 속해 있던 동네가 인사팀이었지. 하기야 그쪽 부류는 정상인들과는 생각하는 것부터가 다르니까.
“…프라이버시고 나발이고, 당사자 기분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셨어요?”
“흐억!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예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뭔가 실마리가 될 만한 것들은 아예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않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긴 했다.
때문에, 아무리 쓰레기통 따윌 뒤져봐야.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취향이 노출되는 것 외엔 전혀 문제될 것이 없긴 하지만….
시커먼 사내놈들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버린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장면을 상상하니,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것보다 눈치가 이 정도로 없을 줄이야…. 운전기사 좀 바꿔달라고 부탁 해야하나?
“후우…. 됐으니까. 앞 좀 제대로 보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예, 옙!”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드링크 캐비닛에서 피로 회복제를 한 병 꺼내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침묵 속에서 꿀꺽꿀꺽 피로 회복제가 목을 타 내려가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
듀라한의 내부에 내려앉은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의 서민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없이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흘끗 바라본 나는 심상세계에서 위철용이 내려줬던 가르침을 떠올렸다.
“마음을 나눈다고 했었지. 아마….”
하지만, 아무리 위철용이 알려준 내용을 떠올리려 노력 해봐도 별 소득없었다.
오해(?)를 풀고 난 뒤에도 제법 앙금이 남았던 모양인지, 위철용의 손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그는 파천 복룡창의 제 일식, 연포의 원리를 생각해보라며, 육룡격만으로 내 몸을 복날 개 패듯 자비심 없이 두들겼다.
때문에, 위철용이 알려준 내용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엉뚱한 것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 어르신이 뭐라했더라? ‘대퇴골을 요렇게 부숴야 소리가 이쁘다.’ 였었던가?
“…미치겠군.”
“예? 예! 죄송합니다. 다시는 쓰레기통을…!”
“기사님 때문 아니니까. 신경 끄시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계속해서 심상세계에서 위철용이 조언해준 내용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내 입에서 욕지기가 신경질을 머금고 저절로 흘러 나왔다.
왜인지 내 혼잣말에 찔끔한 서민혁이 의문의 고해성사를 시작했지만, 나는 가볍게 그의 말을 일축하여 조용히 시키곤 계속해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진짜 모르겠네.”
심상세계에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나누는 것에 대한 요령보단, 위철용이 내 두개골을 반으로 나누는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덕분에 위철용이 내려준 가르침이 곱씹어지긴 커녕, 오히려 그에 대한 불측한 원한만이 무럭무럭 자라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노인네 내게 단순한 화풀이 한 것 같은데 말이야….
마음을 나눈다는 가르침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을 뿐, 위철용은 그저 자신의 화를 나눠줄 대상히 필요했던 게 아닐까?
-지이잉
머릿속에 엄습해온 실없는 헛생각에 피식 웃으며, 나는 뒷좌석의 창문을 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몰아내는 데 특효약은 역시, 신선한 산소를 흠뻑 들이키는 거지.
-꺄아아아악!
열린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온 것은 신선한 공기가 아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신선하게 자극해줄 시원한 바람 대신,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에서나 들을 법한 호들갑스러운 비명이 내 귓가를 자극했다.
“…꺄악?”
뭐야? 왜 도로에서 사람 소리가….
의아함을 품은 내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한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 연예인인가 봐! 신인인가?
-아냐. 요즘 핫하다는 그 ‘얼굴천재’ 설용호잖아! 어제 신문에서 봤어!
-요즘은 무슨, 그거 몇 주는 된 신문이잖아. 그런데…. 너무, 너무 잘생겼다아!
구경하듯 듀라한을 둘러싼 채로 꺅꺅 비명을 질러대는 허름한 옷의 소녀들과 반쯤 파괴된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 그 거리를 희망을 잃어버린 눈으로 배회하는 빈민들….
창문 밖의 풍경은 소름끼치도록 낯이 익으면서도, 차마 내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당혹스러운 요소들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꽁꽁 얼어붙었다. 사고가 뚝 정지되었다.
“저, 저기. 서 기사님? 여긴….”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서민혁에게 지금 이 해괴한 상황이 일어난 연유를 물어보았다.
“옙! 산군님께서 말씀하셨던 노량진입니다!”
서민혁의 입에서 군기가 빡 든, 쓸데없이 씩씩한 대답이 즉시 터져 나왔다.
조금 전의 실책을 만회하겠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일종의 비장미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서민혁은 눈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실책을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신지현이 올라오는 대로, 운전기사 좀 바꿔 달라 요청해야 겠군….
“…제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묻는 말이겠습니까? 잊으셨어요? 제가 여기 노량진에 왜 오겠다고 했었는지?”
조용히 서민혁을 질책하는 목소리가 서늘한 냉기를 품었다.
언제나 그를 대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던 내 잘생긴 얼굴에 서리가 끼었다.
룸미러 너머로 그를 노려보는 내 황금빛 눈동자가 노기를 품고 차갑게 번들거렸다.
“으. 으어어. 세, 세상에. 제가 무슨 짓을….”
한기를 풀풀 풍기는 내 시선과 마주한 서민혁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마도 그는 이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산군님!”
롤스로이스를 개조해서 만든 탓인지, 듀라한의 내부엔 신기한 장치가 장착되어있었다.
서민혁이 앉아있던 운전석이 통째로 회전해, 내가 앉아있는 뒷좌석 쪽을 향했다.
그렇게 나와 얼굴을 마주한 그는 연신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해댔다.
“…….”
하지만,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서늘한 표정으로 서민혁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북극의 바람처럼 시린 한기를 품은 눈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서민혁은 몸을 움찔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저….”
서민혁은 변명하듯 입을 웅얼거렸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비친 노량진은 여전히 활력이 없이 축 처진 분위기였다.
흉물처럼 부서진 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니 꿉꿉했고, 거리를 배회하는 행인들의 표정엔 눅눅한 절망만이 깃들어 있었다.
-저거 태백의 그 얼굴천재인가 뭔가 하는 놈이 타고 다니는 물건이지?
-그 얼굴천재로 유명한 헌터 나으리가 지금 노량진에 와 있다고?
-썅. 면상도 반반해. 돈도 많아…. 인생 한번 X나게 불공평 하네. X벌.
때문에, 중세시대의 권력자가 거주했던 궁전처럼, 웅장한 사이즈와 절제된 화려함을 자랑하는 듀라한은 그렇게 음울한 노량진 거리의 풍경과 대비되어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노량진을 배회하던 행인들은 한번쯤은 멈춰서서 질시 어린 시선으로 듀라한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덕분에, 내가 노량진에 방문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동네방네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쪽 덕분에 비밀 엄수는 이미 물 건너갔네요.”
노량진에 찾아온 이유는 바로, 한성유통과 비밀리에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아모스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 이세영은,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노량진까지 불러들였다.
굳이 본사에서 비밀스럽게 접선하자고 한 것으로 미뤄보건대, 필시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알아냈기 때문이겠지만….
“으허헉! 죄,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한기가 풀풀 날리는 내 목소리를 들은 서민혁은 벌벌 떨며 황급히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문제는, 서민혁이 부주의하게 이곳 노량진 한복판, 한성유통 본사 건물 건너편까지 듀라한을 끌고 들어온 시점에서부터 비밀엄수는 진즉 물 건너가버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듀라한의 외형이 행인들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끌 만큼 화려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듀라한의 소유주가 나, 설용호라는 사실이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비밀은 개뿔, 오히려 엉뚱한 소문이나 퍼지지 않기를 기도해야할 지경이군.
“후우…. 알았으니. 일단 트렁크나 좀 열어봐요.”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부글거리는 짜증과 울화를 꾹꾹 억눌렀다.
이미 일이 틀어져 버린 상황이니만큼, 지금은 서민혁 따위에게 화를 낼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바로, 달라진 변수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하는 것이니까.
잠시 머리를 굴려 새로운 계획을 세운 나는 서민혁에게 지시를 내린 뒤. 차에서 내렸다.
-진짜 설용호네. 실몰로 보니까. 아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빛이 나.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잘생길 수가 있지…?
-하, 인생 한번 X나게 불공평하네 진짜. 제발 고통스럽게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행인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질시와 부러움에 가득 차 있는 음울한 시선과 눅눅한 목소리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럴 수가!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설용호! 얼굴천재로 유명한 그 잘생긴 헌터입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나는 내게 집중되는 주변의 음습한 시선과 질시어린 관심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입가엔 음침한 노량진의 분위기를 환하게 밝힐 만큼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마치 아이돌 가수라도 된 것마냥, 내 쪽에서 먼저 행인들에게 다가가 과장된 인사를 건넸다.
“으, 으아아. 실물이 더 잘생기셨…네요. 그, 그런데 헌터님께서 노량진 같은 곳 갑자기 무슨 일로….”
얼떨결에 나와 악수를 나눈 행인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흘끗 바라본 그녀는 뒤늦게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내가 노량진에 찾아온 이유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질문을 시작으로 다른 행인들의 눈빛에도 뒤늦게 노량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다운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있다는 제보를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행인들의 불안한 눈빛에 나는 따스한 미소와 훈훈한 온기가 서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곤 슬쩍 손가락을 뻗어, 활짝 열린 듀라한의 큼지막한 트렁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