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침식형 게이트의 갑작스러운 소멸으로 인해, 서울로의 귀환준비는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분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애도하며, 맹주님께서 보내신 성의입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사망한 태백 길드원들의 보상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침식형 게이트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남부연합 측에서 선뜻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남부연합의 맹주, 양석필은 전령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달하면서 보상금에 관련된 서류를 보내왔다.
“휴우. 이 정도라면, 길드장님께서도 크게 문제 삼진 않겠네요.”
전령에게 전달받은 보상금 서류를 꼼꼼히 읽은 신지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태백을 언급하면서까지 안도를 표하는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남부연합 측에서 제법 섭섭지 않게 보상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침식형 게이트가 사라진 덕분에 여유가 좀 생겼나 봐. …미안해. 내가 너무 우리 일만 생각했었어.”
신지현과 시선이 마주친 양소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솔직한 성격의 양소혜답게, 그녀는 즉시 신지현에게 사과를 표했다.
“괜찮아요. 아까 말했었듯, 이곳의 딱한 사정은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신지현은 어쩐지 처연한 미소를 짓고는 양소혜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다만, 저희 길드장님과 돌아가신 분들의 유가족 분들에게 전할 말이 명분이 서지 않아서…. 미안해요. 저야말로 너무 사무적으로 나와서.”
신지현의 이토록 ‘인간적인’ 모습이라니….
그동안 이곳에서 몇 번이나 봐왔지만, 아직까지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곳에서 신지현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들은 악당의 숨겨진 속사정이나, 의외의 면모 따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가만….
회귀한 뒤부터, 신지현이 그때처럼 악독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긴 했었나?
“헌터님…?”
신지현과의 첫 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그녀가 보여줬던 모습들을 회상해보고 있으려고 하니, 양소혜를 떠나보낸 신지현이, 왜인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
“죄송하지만, 돌아가신 분들 관련해서 일이 좀 길어질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먼저 올라가시겠어요?”
기묘했다.
이미 남부연합 측으로부터 사망한 인사팀에 대한 보상을 전달받은 뒤였고, 관련 서류 작업 또한 끝이 난 터라 ‘굳이’ 신지현이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
조심스러운 표정의 그녀는 내게 먼저 서울로 올라갈 것을 권하고 있었다.
“보상 관련해서 남은 일이 더 있나요?”
“…그게. 아직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니까요. 그분들을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티르리니가 끌고 온 백골 군단이 워낙 난폭하게 날뛰었기에, 아직도 놈들에게 갈기갈기 찢겨나간 희생자들의 시신은 수습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러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는 당사자가 신지현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분들의 시신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죠. 좋습니다. 저 먼저 올라갈 테니. 매니저님께선 이곳에 남아, 그분들의 넋을 달래주도록 하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잘생기신 분이 마음도 고우시다니까.”
신지현은 내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내게 농담을 섞은 너스레를 가볍게 건네며,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없이 촉촉한 물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화안금정의 금빛 시야로 신지현을 살펴봤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단어는 한결같이 『진실』 일색이었다.
이상해. 이건 확실히 이상해….
신지현은 회귀 전,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엔 단순히, 내 잘생긴 외모에 홀린 탓에 그때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여기서 보여준 ‘이질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동안 신지현이 보여줬었던 모습들 전부, 회귀 전의 악독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여전히 속물적인 속내를 은근슬쩍 드러내며,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최소한 지금의 신지현에게선 ‘인간적인’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거 영문을 모르겠군.
신지현 역시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타락해 버렸던 걸까?
계속되는 의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각조각 난 퍼즐 조각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알 듯 말 듯 모호한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잠깐만!”
의혹과 의문을 간직한 채, 부서진 목책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듀라한에 몸을 실으려던 찰나.
그 모습을 보고, 멀리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온 양소혜가 나를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인데?”
땅이 푹푹 패일 정도로 격렬하게 뛰어온 양소혜를 질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잠시 숨을 몰아쉰 그녀는, 이내 씩 웃으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양소혜의 손은 호전적인 주인의 성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굳은살마저 알알이 박여있는 거친 모습이, 빈말로도 차마 보기 좋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삼스럽게. 뭘. 친구라며?”
하지만, 그렇게 투박한 손을 불쑥 내민 양소혜의 얼굴에선 부끄러움 따윈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당당함에 슬쩍 웃곤 내민 손을 꽈악 붙잡아 흔들었다.
“그래. 언젠가는 꼭 뛰어넘을 친구지.”
붙잡은 손에 강인한 압력이 전해졌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양소혜의 눈엔, 특유의 호전적인 투쟁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마웠어. 용호. 남부연합은 네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양소혜의 마지막 인사는, 멋이 없이 직설적이면서도 진부하기까지 했지만.
나는 그녀의 멋없는 인사에 담긴 투박한 감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양소혜에게 시원한 미소로 답해준 뒤.
나는 서울로 향하는 듀라한에 몸을 실었다.
****
“…여긴?”
서울로 올라가는 길.
듀라한의 뒷자리에 기대어 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싶었더니, 어느새 나는 회색빛 구름이 가득한 삭막한 공간, 심상세계에 와 있었다.
“어째선지, 며칠 전부터 본존을 바라보는 네놈의 태도가 불측하기 짝이 없더구나.”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범인이 입을 열었다.
범인, 위철용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바위 위에 걸터앉아 창날을 숫돌로 슥슥 갈았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잔뜩 찌푸려진 그의 얼굴에선 소심한 분노가 뚝뚝 흘러나왔다.
“불측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어르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잖아요?”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속마음은 뜨끔했다.
얼마 전, 티르리니 사건에서 위철용이 보여줬던 이질적인 모습으로 인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그를 피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틀. 본존이 이곳에 갇혀 고독을 곱씹은 것이 무려 이틀이다. 본존을 존경한다는 놈이 본존을 이틀씩이나 이곳에 가둬 놨다는 말이지…?”
섬뜩하게 잘 갈아진 창날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리는 위철용의 눈알이 묘하게 번들거렸다.
그의 입에서 으스스한 목소리로 불만이 토해졌다.
…잠깐만. 뭐라고?
“예? 무슨 소리십니까. 그동안 저랑 딱 붙어서 행동하셨잖습니까.”
내가 잠깐 위철용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은 고작 반나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가 이틀간 이곳 심상공간에 갇혀 있었다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이틀 전이라면, 내가 성식회가 관리하는 마을에 도착했을 시기였다.
그때부터 심상공간에 갇혀 있었다니…. 이건 또 무슨.
…설마!
“흐흐흐.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시겠다? 이미 늦었느니라. 이제부터 느긋하게 본존의 고독한 분노를 맛보아야 할 것이야.”
위철용의 몸에서 스멀스멀 음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뚝뚝 떼어 말하며, 입가를 핥는 그의 눈알이 광기를 머금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보십쇼. 이곳에 갇혀 계셨던 게 확실합니까?”
“아암! 이렇게 삭막한 공간이 여기말고 또 있겠느냐! …잠깐만. 네놈 표정이 왜 그러느냐?”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광기가 번들거리던 위철용의 눈빛이 이채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그게….”
티르리니와의 전투가 끝났을 때, 위철용(?)이 내게 보였던 반응부터. 아모스와의 전투가 끝난 뒤의 대화 내용에 이르기까지.
나는 위철용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흐음. 그래. 본존이 그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였단 말이지. 허헛. 이거 그동안 신경을 안 썼더니, 고놈이 멋대로 튀어 나가버렸군.”
의외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위철용은 의외로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아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이상해진 건가?
-따악!
“그 눈깔! 그 눈빛! 그게 바로 불측하다는 게다.”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두개골이 반으로 뽀개지는 듯, 화끈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어찌나 대단한 고통이었는지, 비명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미심쩍은 태도가 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인지, 위철용은 노성과 함께, 즉각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내게 응징을 가했다.
“후우…. 어째 최근 들어 기억이 온전치 않다. 싶더니. 그런 일이 있었었군. 거참. 신경쓰지 않았더니 다시 튀어나오고 지랄이로구나.”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내 모습에, 위철용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긴 한숨과 함께, 그의 입에서 기묘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되었다.
“네놈도 알다시피, 본존은 그리 ‘성실한’ 성좌가 아니었다. 애초에, 등선한 이유가 누구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으니, 본존에게 있어 성좌의 고리타분한 의무 따윈,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성좌의 의무?
위철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개념에 의문을 막 표하려던 찰나.
위철용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묘한 손짓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전에 말했지 않았더냐, 필멸의 존재에서 탈각한 성좌에겐 강력한 제약과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지루한 의무가 주어진다고.”
그래…. 회귀하기 전에 위철용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그래서 좀 의무를 좀 저버렸더니, 그 엿같은 놈들이 본존에게 새로운 인격을 심어놨지 뭐냐.”
“새, 새로운 인격이요?”
강제로 의무를 다하게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인격을 심는다니! 그건 또 무슨…!
“본존과는 달리 꽤나 깐깐한 샌님 놈을 심어놨었는데, 본존이 누구더냐?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잘 분리해서 무의식 저편에 예쁘게 봉인해 놨었느니라.”
넘쳐 오르는 자기애에 취했는지. 위철용은 으스대듯 자신의 대단한 권능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워낙 존재감이 없던 놈이라, 배후령으로 영락하며 사라졌나 싶었더니. 아직 놈이 남아있었던 모양인 게로구나. 하지만! 이제라도 알아차렸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야.”
뭔가 심각한 일인 것 같았지만, 위철용에겐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인 모양이었다.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부하는 그의 눈빛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문제가 없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또 다른 인격이잖습니까. 그걸 어찌….”
“본존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그따위 심어진 인격 따윈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그러한 인격이 잠식할 때마다 떨쳐내면 그만이니라.”
위철용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가 해결법이랍시고 내놓은 해결방안은 평범한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게…. 가능해요? 무공에 대한 기억을 죄다 잊으셨다면서요?”
“어리석긴, 그래서 네놈이 반쪽짜리 무인이라는 게다. 마음을 나누는 것쯤은 네놈도 이미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야.”
“마음을 나눠요?”
“허어. 이제 창끝에서 여섯 마리 용을 뽑아내어 자유자재로 부리는 치가 그 정도도 못 한다는 말이더냐?”
순간, 건들건들한 몸짓으로 창대를 집어든 위철용의 눈빛이 사납게 반짝였다.
“아무래도 본존이 그것에 대해 한 수 가르침을 내려줘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