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어, 어라? 바, 반가워요. 오랜만이네요.”
나와 눈을 마주친 전령이 기이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말투마저 확 변했다. 중성적인 중저음을 자랑했던 목소리 톤도 평범한 여성의 것으로 변했다. 수줍게 말을 더듬는 목소리가 어째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낯익게 느껴졌다.
“누구…. 시죠?”
“지. 잠시만요.”
여전히 긴가민가하여, 의아함을 가득 담아, 전령에게 그녀의 신분에 대해 조심스레 묻자, 전령은 내게 바짝 다가서더니, 푹 눌러쓴 깃 챙 모자를 위로 슬쩍 올렸다. 그리고선 입가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던 옷깃 역시, 아래로 내려 접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만 자신의 얼굴을 보여줬다.
“이, 이제 기억이 좀 나시나요?”
꽁꽁 싸맨 복장 사이로 드러난 전령의 얼굴은. 강아지상의 젊은 여인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얼굴을 발그스레 물들인 채로, 쭈뼛쭈뼛, 부끄럽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내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건곤 길드의 ‘익살꾼’ 이진욱의 딸 이세영.
튜토리얼에서 같은 조에 속해, 잠시 스쳐 지나갔었던 인연의 여자였다.
익살꾼의 딸이 이곳에 나타났다라….
내가 모르는 새, 건곤 놈들은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던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세영의 수줍게 배배꼬는 모습을 가만히 응싷였다.
“아아! 그때 그 튜토리얼에서 만났었죠? 그러니까 건….”
“예, 예 맞아요. 그때 소혜 씨랑 같은 조였잖아요. 반갑습니다. 한성유통의 길잡이, 으…. 그러니까 한성미에요.”
기묘했다.
내가 막 건곤 길드를 입에 담으려는 찰나, 이세영은 혹시 남이 들을세라. 중간에 내 말을 뚝 끊었다.
더불어 그녀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원래 이름 대신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어째, 계속해서 불안한 눈빛으로 내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흐음. 반갑습니다. ‘한성미’씨. 한성유통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길드로군요.”
겉으로는 이세영에게 맞춰주며,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려 그녀에게 의아함을 표했다.
이세영은 회의실에 빙 둘러 앉은 다른 이들을 슬쩍 눈짓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이럴거면 애초에 왜, 내게 아는 척을 했는가 몰라.
[왜냐니, 저 계집아이의 표정에 모든 게 나와 있지 않느냐?]
위철용은 어딘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이세영을 가만히 흘겨보았다.
확실히, 이세영의 바알갛게 문든 얼굴로 보아하니, 그 이유에 대해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크흠, 아무튼. 회포는 풀었으니. 바로 용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한 번 헛기침을 크게 한 이세영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걸걸하니 묘하게 중성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 한성유통은 정보를 구입하고, 파는 곳입니다.”
이세영의 입에선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한성유통이라…. 회귀 전엔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길드다.
아마도 이름으로 유추해보건대, 길드 중에서도 운송업에 특화된 소규모 길드같아 보였다, 이름 그대로 대격변 전엔 유통업에 종사했었던 업체가 본인들의 특기를 살려 세운 사업체를 세웠겠지.
“저희 길드는 전원 ‘길잡이’로 이뤄져 있지요.”
이세영의 입에서 ‘전원이 길잡이.’ 라는 말이 나오자, 회의실에 빙 둘러 앉은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길잡이.
헌터 중에서도 굉장히 귀한 유형의 특성 트리였다.
전투보단 ‘안전한 길’을 찾는 것에 특화된 특성 트리를 지녔기에
전투에선 영 젬병이었어도,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있어, 그들의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태백에서도 ‘길잡이’쪽 특성 찍은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한 길드 전체가 길잡이로 이뤄졌다고…?
나 역시, 어딘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가만히 이세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봤자, 한성유통이라는 이름을 비롯해, 아예 ‘길잡이로만’ 이뤄진 길드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길드가 있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 흐음….
“하여튼, 제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바로. 남부연합의 맹주 양석필님의 의뢰 때문입니다. 급보를 전해 달라 하셨거든요.”
이세영의 말에 회의실 내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길잡이들의 주역할 중 하나가 비로, 이런 식으로 급한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니 만큼.
양석필의 이름 석 자가 나온 순간부터, 모두들 이세영에게 시선을 고정헀다.
모두의 시선을 음미하듯 살짝 바라본 이세영은 안주머니에서 얇은 고동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우선 설용호 헌터님께, 이것부터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게요?”
“…!”
이세영에게서 편지지를 꺼내 읽자, 내 눈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침식형 게이트가 전부 다 사라졌다구요?”
-뭐라고? 게이트가 전부 사라졌다고?
-맙소사. 그게 말이나 되는 거야?
양석필 특유의 거칠 필적으로 적혀있는 서류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내 지시대로 정수를 사방에 보급하기 위해, 한성유통가 손잡고 정수를 유통시키려는 찰나.
남부연합을 괴롭히던 남청색 침식형 게이트가 몬스터와 함께 어느 순간 전부 다 사라져버렸단다
[허어…. 이제 본존이 뭐라 말 할 것도 없구나. 어찌 이리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군.]
.
원 역사에서, 대 침식이 시기 침식형 게이트의 역할은 단순했다.
접근하는 모든 유기물들을 침식, 그들의 육신을 억지로 뒤틀고 조각내어 몬스터로 변이시키는 것.
또 그렇게 변이시키는 성질을 이용해, 혼돈을 유발하는 것.
도대체 어째서 이번 대 침식은 그때와 전혀 다른 걸까?
회귀 전의 지식을 총동원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명색이 ‘대’ 자가 붙은 만큼, 회귀 전 역사에서의 대 침식은 두 달 이상 지속 되었다.
어디 보자. 오늘이….
품속 깊은 곳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새까만 화면에 제조사의 로고가 출력된 뒤, 화면이 밝게 물들며 시간과 날짜가 표시되었다.
오늘이 202X년 9월 30일이니까…. 약 두 달 뒤로군.
회귀 전, 원 역사에서 대 침식은 앞으로 두 달쯤 뒤인 202X년 11월 16일. 강북 한복판에 나타난 침식형 게이트를 마지막으로, 대 침식은. 정확히 침식형 게이트는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원 역사대로라면, 그때 일어났던 현상들이랑 얼추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구속구를 찬 노예에 불과했기에, 대 침식이 종식되면서 나타난 현상들을 직접 목격하거나 하진 못했지만.
그 즈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는 것과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일 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헌데…. 이번엔 마치 누군가 고의로 대 침식을 끝마친 것처럼, 사흘도 못되서 대 침식이 끝나버렸던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대 침식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직접 옆에서 보면서, 인위적으로 시행하는 것처럼.
대 침식의 파훼법이 대형 길드에 보급되자, 지방의 중형 길드를 노리기 시작했고.
지방의 중형 길드들이 침식의 파훼법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자, 아예 대 침식을 취소하기라도 하듯 무위로 돌려버리는 전개라니….
회귀 전, 원 역사에서 대 침식이나 대 격변은 인류의 미래를 바꿔놓은 재량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놀아나는 것이라면?
“후우….”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와, 과열된 뇌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줬다.
“일단, 한성유통 쪽과 접촉해서 제대로 알아 봐야겠군요. 부탁드릴게요. 성미 씨.”
아직까지 게이트가 사라진 것은 남부연합애 출몰했던 게이트 들이다.
다른 지방 쪽은 아직 모르는 일이니, 좀 더 신중을 가해보는 게 좋겠지.
일단, 그것에 대하여 대비를 좀 해둬야겠군.
“예, 제가 한 번 알아봐 드릴게요.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점점 복잡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자, 푸념 아닌 푸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일단…. 남부연합 일은 양소혜와 마무리해서 이쯤 마무리 짓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 보실까?
****
이세영이 중간에 난입한 회의가 끝난 바로 다음날.
그녀와 한성유통 길잡이들에게 모종의 부탁을 해놓은 난.
신지현와 인사팀 일행들을 모아둔 뒤, 그들에게 앞으로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 천명했다.
“벌써 올라가시겠다고요?”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내 말에 신지현은 어쩐지 아쉬움과 불만이 적절히 섞여 있는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이주를 준비 중인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돕다 와서인지, 그녀는 평소에 입고 다니는 가죽 갑옷인지, 양복인지 모를 것을 입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활동하기 편한 민소매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일을 돕다 와서인지 민소매 옷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
그 노랭이 같은 늙은 구미호에게 이렇게 순수하고 선량한 면이 있었다니.
보고도 믿지 못할 무언가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예. 이세… 아니, 한성미 씨 말론 이쪽 남부 쪽에 침식형 게이트도 사라졌다고 하니, 여기서 더 할 것도 없겠다. 한 번 서울 쪽도 가봐야죠.”
얼굴에 얼핏 엷게 떠오른 불신의 감정을 사람좋은 미소로 억눌러 숨긴 뒤.
나는 신지현에게 서울로 가겠노라 다시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그 놈 같은 마족이 또 튀어나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 서울 올라간 김에 공방 들러서 대비도 좀 더 해놔야죠.”
‘그 놈’ 아모스의 이름이 은유되듯 튀어나오자, 신지현의 낯빛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놈이 정춘식의 몸으로 저질렀던 첫 번 째 폭력 현장에 노출되어서인지.
아모스, 아니 놈을 ‘그 놈’이라 칭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꽤 심한 심적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뭐…. 취미 생활은 지난 사흘간 잘 즐기긴 했네요.”
신지현은 그게 그리도 아쉬운 모양인지, 자꾸만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리고 한성유통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다른 지방에서도 침식형 게이트들이 자취를 감췄다니까요.”
길잡이들로만 이뤄진 길드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는지, 내 의뢰를 받아 든 이세영과 한성유통 사람들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제법 그럴싸한 정보들을 물어왔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 인근 다섯 개 도시에서 게이트가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 첫 번째.
그 외에 아모스가 정춘성에게 빙의할 때, 허공에 떠올랐던 마법진을 본뜬 문양을 찾아줄 것도 의뢰했는데, 그것 역시 제법 그럴싸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한성유통의 본사가 위치한 노량진으로 오라는 쪽지를, 왜인지 수줍은 얼굴의 이세영에게서 받아들었다.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