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어쩐지 아쉬운 표정으로, 아모스는 손을 앞으로 주욱 뻗었다.
커다란 날개가 손의 움직임을 모방했다.
“…!”
어떠한 기운도,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경고신호가 울렸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내 본능이 위험을 속삭였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나는 의심 없이 몸을 날렸다. 아모스의 손이, 날개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썩둑!
“흐응. 막아내진 못했지만, 피하긴 했네? 제법이야.”
아모스는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었다.
나는 놈의 광오한 말에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이 지반째로 뎅겅뎅겅 잘려있었다.
마치, 수많은 발톱을 지닌 마귀가 지반을 할퀴고 지나간 듯.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재미있었어.”
아모스는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놈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육신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 상을 주기로 했지?”
꾸득꾸득 함몰되어가는 육체의 파편 속에서, 아모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모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 부분만 다시 재생시켰다.
흉측하게 붕괴된 고깃덩어리 속에서 그로테스크한 머리가 쑤욱 올라왔다.
어둠이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잘나신 성좌님들의 시대가 저물 거야.”
마지막까지 영문 모를 소리였다.
그 말을 끝으로 퍼석, 아모스가 빙의된 정춘성의 육체가 썩은 호박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말도 안 돼. 어찌 놈들이…. 아니, 타락의 배후가 놈들이었나?]
위철용 역시, 아모스가 나타난 이래 기이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혼자서 자꾸 알 수 없는 말을 주억거리는 것이, 그답지 않게 상당히 동요한 것 같았다.
“쓰읍.”
입맛이 썼다.
달라진 대 침식부터, 아모스까지.
자꾸만 회귀 전의 역사에선 알지 못했던 변곡점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바꾸고 있는 이상, 미래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만, 이런 식으로 회귀 전에는 내막조차 모를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마음 한구석에서는 티르리니가 언급했던 낙오자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남았다.
그리고 마족, 아모스는 자신을 마족이라 언급했다. 내가 알기로 어떠한 마왕급 마족도 조금 전 아모스 만큼 강력한 권능을 선보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모스’라는 이름 자체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성좌들의 시대가 저문다니 그것은 또 무슨 말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리되지 않은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홍수처럼 엉망으로 뒤엉켰다.
****
“…헌터님? 괜찮으세요?”
신지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회의실 탁자에 괴었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충격으로 목이 우직 꺾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의식의 바닷속을 헤매던 흐릿한 정신이, 강제로 현실로 인양되듯 돌아왔다.
“아, 아하하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모스와 나의 조우가 그렇게 놈의 일방적인 농락과 도주로 끝나버린 뒤.
나와 신지현을 포함한 성식회의 생존자들은, 임시로 만든 원탁에 둥글게 모여 앉아,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성식회의 길드장 정춘식의 사망으로 인해, 보상문제로 지지부진한 논의가 계속 이어지자, 까무룩 다른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넋을 잃었던 모양이다.
“들어가서 좀 자는 게 낫지 않아? 괜찮겠어?”
양소혜마저 걱정을 가득 담아, 내게 속삭인 것 덕분에, 원탁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전부, 은인인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은 걱정이 가득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괜찮다니까. 잠깐 다른 생각 좀 한 것뿐이야.”
그렇게 부담스럽게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벅벅 긁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의 양소혜를 안심시켰다.
“그러면 계속해서…. 다시 보상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죠….”
내게 별일이 없음을 확인하자, 뚝 끊겼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다시금 입을 연 신지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준비한 서류를 낭독해 나갔다.
“…특히 민간인들의 피해가, 으득!”
아니, 신지현의 태도는 완전히 담담하진 않았다.
피해 항목 중 민간인의 피해에 이르렀을 때.
평소답지 않게, 냉정함을 잃은 신지현이 아랫입술을 으직, 피가 나올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오죽 강하게 깨문 모양인지, 그녀의 입매에 빨간 혈선이 그어졌다. 대화도 뚝 끊겼다.
“…죄송합니다. 잠시 냉정함을 잃었네요.”
물론, 그녀답게 그것에 대해 빠르게 사과를 표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중하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로구나. 제 계집도 그렇고.]
신지현의 익숙지 않은 모습에, 위철용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농을 건넸다.
그녀의 이면을 보고 묘하게 비웃듯 이죽거리는 모습이, 평소 내가 기억하던 위철용의 모습과 똑 닮아 보였다.
원래대로 돌아온 듯한 위철용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죠.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으니….’
묘한 안도감에 휩쓸려 그에게 맞장구를 쳐줬지만, 이곳에서 겪었던 ‘알 수 없는 일’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입맛이 아려왔다.
달라진 대 침식으로 인해, 점점 뒤바뀌는 미래.
역사와 비슷한 타이밍에 나타나긴 했지만, 그렇게 나타난 ‘원인’이 달랐던 티르리니
그녀를 이곳에 풀어놓아 참극을 불러일으켰던 ‘마족’. 아모스.
변해버린 대 침식으로 인해, 양소혜가 나를 찾아온 뒤로 ‘알 수 없는 일’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아모스의 존재란 정말이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것이었다.
회귀 전에 수많은 마족을 상대해봤지만, 아모스와 같은 권능을 보여준 마족은 내가 기억하기로 단 한 명도 없었다.
장악한 육신을 조작해, 화신의 형태로 강림할 수 있다니.
마왕급 마족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권능이었다. 사실 이쯤 되면 거의 성좌나 다름없어 보일 만큼 초월적인 영역이다
아니, 성좌와는 조금 다른가…?
필멸의 세계에 화신의 형태로 자신의 형태를 투영하는, 성좌들의 ‘강림’은 성좌 본인에게도 굉장한 리스크를 동반하는 행위였다.
당장 회귀 전의 위철용마저, 나를 만나기 위해 손가락을 두 개나 희생해야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문제의 마족 아모스는 달랐다.
놈은 단순히 티르리니를 쓰러뜨린 자의 실력이 보고 싶다는 호기심만으로 굳이 내 앞에 화신의 형태로 강림했었다.
그 어떠한 형태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모양인지, 내 앞에 강림한 놈의 얼굴엔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위철용마저 강림의 여파로 일시적인 불구가 되었었는데 말이지….
[그중에서도 신지현 저 독한 계집에게 저리 ‘인간 같은’ 모습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느냐.]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철용은 계속해서 신지현에 대한 농담을 종알거렸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은 것인지. 위철용의 입에선 철저할 정도로 티르리니와 아모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위철용이 보여줬었던 이질적인 모습도 그렇고…, 이거, 수상쩍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로군.
“춘식이 아저씨와 많은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이곳을 유지하기도 힘들 거야. 용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상념의 파도에 휩쓸려, 기억 속에서 헤매는 사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양소혜가 면목이 없다는 듯, 축 처진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그녀가 내게 직접 의견을 물어왔기에, 나의 상념은 거기서 끝이 났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남아있는 상념의 여파를 모조리 날려버린 뒤.
짐짓 침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글쎄다…. 그건 성식회 길드 분들의 의견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양소혜도 미리 알고서 물어봤겠지만, 사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곳의 거취에 대해 별로 뾰족한 생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말이 좋아 생존자‘들’이지.
수많은 사람이 사망해버린 성식회의 생존자는 단 세 명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길드 사람들이라 해봐야, 부상으로 요양 중이었던 이분들이 전부야. 그나마 살아남았던 사람들도 정춘성 그 배신자에게 전부…. 괜찮아?”
-어찔!
별안간 머리가 핑 도는 듯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전신의 힘이 쭉 빠지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괴고 있었던 턱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또 한 번 기묘한 방향으로 머리가 꺾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괴하게 보였는지. 정춘성에게 막 분노를 드러내려던 양소혜가 깜짝 놀라, 하려던 말을 도중에 끊고선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낼 정도였다.
[그 아모스라는 놈이 네놈에게 기념품 남겨준 모양이로군, 아모스가 흘리고 간 ###의 ##이 네놈의 육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니라.]
어질어질한 현기증으로 핑핑 도는 시야, 메슥거리기 시작한 뱃속을 부여잡고 있으려니.
위철용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설명조로 알려줬다.
[애초에 필멸자에 불과한 네놈이 아모스의 강림한 화신체와 만났으니, 영혼과 육신에 무리가 간 것도 당연한 일이니라.]
걱정 대신, 대뜸 설명하는 것 하며.
잡음이 가득한데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이.
아무래도 또, 이질적인 무언가에 잠식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모스는 원래 제법 높은 격에 속했던 ##였느니라. ###이 그를 저렇게 ###지.]
위철용은 계속해서 총기를 잃어버린 멍한 눈빛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노이즈가 잔뜩 끼어있는 탓에, 정확히 그가 뭐라 하는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설명대로라면, 아모스는 일반적인 귀족급 마족들관 ‘격’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러한 존재와 접촉하였기에, 네놈의 몸에 남은 ###의 ##으로 아마도 이틀은 족히 현기증이 지속될 게다.]
여전히 그 이상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인지, 잡음 섞인 설명을 늘어놓는 위철용의 말투는 낯선 친절함이 묻어 있었다.
“…….”
그런 위철용의 낯선 얼굴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헛? 왜 그러고 있는 게냐? 속이 좋지 않기라도 하는 게야? 확실히…. 신지현 그 계집의 이질적인 모습을 본존도 받아들이기 힘들긴 하다만….]
기나긴 설명을 마친 위철용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전 설명을 늘어놓은 것이, 마치 그의 의지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오늘 하루 동안, 위철용이 보여준 모습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위철용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맛살을 찌푸린 나는, 내 옆에 바짝 붙어 걱정 섞인 표정을 짓는 위철용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사실상 신지현이 인사팀이 입은 손해를 남부연합 측에서 배상해달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작긴 해도, 이곳을 책임지던 길드장 정춘식이 사망해버린 터라.
보상 관련 문제는 그리 간단히 끝맺어지지 않았다. 회의는 끝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호전적인 성향의 양소혜는 전투에는 도움이 될망정, 서류 작업 및 회의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어 보이진 않았다.
“소혜 씨 말도 일리는 있지만, 태백 길드원 네 명이 사망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미안해요.”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신지현의 표정엔, 역시나 그녀답지 않게 감정적인 면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남부연합 측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주려 했지만, 인사팀에서도 적지 않은 사망자가 나왔던 터라, 문제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태백의 길드원이, 어찌 되었거나 남부연합의 소속이었던 인물의 손에 죽어버린 사실 때문이었다.
남부연합 측, 그것도 가해자 측인 성식회에서 유족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면.
강태백에게 남부연합을 견제할 빌미를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신지현조차 쉬이 양보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해해. 하지만…. 보다시피 이곳 성식회의 길드원들 역시, 뭔가 보상을 지불할 여력이 없어. 당장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판이니까.”
양소혜 역시, 안타까운 어투로 신지현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의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곳의 수비를 책임지던 수비대는 야크샤로 변이되어 모조리 목숨을 잃었고.
인근의 수비를 책임지던 공격대, 성식회 역시 전멸을 면치 못했으며, 침식형 게이트의 타격으로 인해, 남부연합에서도 이렇게 작은 마을을 위해 인력을 투자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수많은 길드가 난립하고 있어, 게이트의 위협을 거의 느끼기 어려운 수도권과는 달리.
이곳 지방에선 언제나 게이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튀어나올지 알 수도 없는데다.
과거에 과부하 되었던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들이 야생화되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지방에서 치안을 책임질 무력 집단의 부재는 곧, 마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방의 특수한 상황 탓에, 성식회 소속 길드원들이 생전에 모아둔 재산도 얼마 없는 데다.
침식형 게이트의 준동 탓에 남부연합에서도 그들 대신, 보상을 지불해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기에….
신지현과 양소혜 사이의 대립 아닌 대립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크흠.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만. 여기가 남부연합 산하의 길드. 성식회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맞는지요?”
그렇게 대립이 길게 이어지던 순간.
별안간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낯선 목소리가 끼어 들어왔다.
사내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를 젊은 여인이 억지로 흉내 내는 듯.
중성적인 중저음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누구?”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홱 돌아갔다.
묘한 복장의 불청객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살짝 건들 하게 꼰 채로 무너진 장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맞는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양석필 님께서 여러분께 보낸 전령입니다.”
불청객, 독특한 중저음으로 스스로를 전령이라 밝힌 인물은 양소혜를 흘깃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전령의 복장은,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독특했다.
짙은 고동색 가죽을 무두질해서 만들어낸 코트엔 수많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투구 대신 커다란 챙과 멋들어진 허연색 깃털이 달린 검은색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코트의 깃까지 바짝 높이 세워 얼굴을 가린 통에, 전령의 얼굴은 간신히 눈만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꽁꽁 감춰진 상태였다.
“아빠가?”
얼굴을 가린 특색 있게 수상한 복장, 뜬금없이 전령이라 밝히는 태도가 수상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 양소혜를 포함하여, 이곳에 앉아있는 인원 중 그 누구도 전령의 정체를 딱히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투와는 전혀 상관없이, 철저히 기동성과 은신에 비중을 둔 복장으로 미뤄보건대.
전령의 정체가 ‘길잡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야생화된 몬스터로 인해, 전파가 잘 닿지 않는 지방에서
몸이 날랜 길잡이를 전령으로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꽤 흔한 일이었다.
“예, 남부연합에 큰 이변이 있어 맹주님께서 저희 길드에 의뢰를….”
나무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마치 말발굽 소리 같은 군화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전령의 말이 뚝 끊겼다.
고장 난 인형처럼, 움직임까지 뚝 멎은 채로 오도카니 이쪽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은 내게 멎어있었다.
“…오, 오랜만이에요.”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전령의 입에서,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