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태백을 덮쳤던 두 가지 비극 중 나머지 하나는 바로.
산군 정태수를 포함한 계룡 공격대 전원이 귀족급 마족에게 전멸당한 일이었다.
그들을 전멸시킨 귀족급 마족의 이름은 바로….
“…티르리니.”
부서진 목책 사이를 비집고 천천히 걸어오는 검은 피부의 인형을 노려보며, 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마족.
대 침식 이후, 게이트 내부에서 출몰하기 시작한 인간형 지성체를 뜻하는 명칭이었다.
‘인간형’ 이지만 인간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외형을 자랑하는 인간형 몬스터들과는 달리, 마족들은 괴이하게 변이된 몇몇 신체 부위를 제외하곤 거의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일반적인 인간형 몬스터와는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고 교활했다.
티르리니는 그중에서도 ‘귀족’의 직위를 받을 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놈은 시커먼 번개를 다루며, 망자의 시신을 오염시켜 종으로 부리는 권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마을을 습격한 백골들의 정체는 바로, 티르리니에게 희생당한 헌터들이었다.
…아무리 역사가 뒤바뀌었다지만, 설마하니 놈까지 여기서 나타날 줄은….
양 관자놀이에 위협적으로 솟은 두꺼운 뿔과 3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키.
주먹에서 파직거리는 검은빛 전하와 수많은 해골을 부리는 티르리니의 흉흉한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실제로, 회귀 전 역사에서 놈은 수많은 공포와 죽음을 불러왔었지….
하지만…!
“매니저님! 공방에서 받아온 도구들 어디에 두셨다고 했죠?”
구석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신지현에게,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김혜연의 공방에서 받은 ‘도구’들의 위치를 물었다.
“4, 4번 트럭에 있어요!”
-콰아앙!
신지현이 대답함과 동시에 나는, 마을 뒤편에 정차된 트럭에 몸으로 몸을 날렸다.
-콰지지직!
트럭에 부착된 트레일러의 철판이 내 손에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그렇게 트레일러 옆구리에 뻥 뚫린 구멍 속에서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챙겨왔는데 다행히 써먹을 구석이 생겼군!
-빠직! 빠지지직!
-꺄아아아악!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을 광장에서 살육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전하가 파직거리는 소리, 되살아난 뼈다귀들이 턱관절을 딱딱 마주치는 소리,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다리에 내력을 집중해 운룡보를 한계까지 운용하였다.
-파팍! 팍! 팍!
마을 광장의 경계를 돌며, 나는 번개처럼 손을 놀렸다.
가죽가방에서 삐져나온 쇠말뚝을 계속해서 흙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렇게 광장 한 바퀴를 쭈욱 돌며, 빈틈없이 쇠말뚝을 박아 넣은 순간!
-빠지지직!
티르리니의 손아귀에서 시커먼 번개가 파직 거리며 응집되었다.
“으아아아악!”
시커먼 번개가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모두가 황급히 몸을 움츠렸으나….
“…?”
《…?》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티르리니의 주먹에 모였던 검은 번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놈은 텅 비어버린 자신의 주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사삭
곧이어 아래턱을 위협적으로 따각거리던 백골들이 먼지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소란스러웠던 참극의 현장에 급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지, 지금이야 모두 도망쳐!”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마을 주민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깐,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넌 사람들을 지켜줘.”
투지에 가득 찬 표정의 양소혜가 가만히 서 있는 티르리니에게 다가가자, 나는 그녀를 막아 세운 채, 대피 중인 마을 사람들을 가리켰다.
양소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살짝 아랫입술을 씹곤, 마을 사람들을 향해 뛰어갔다.
[허, 참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위철용이 묘한 소리로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대 침식이 괴상하게 진행되면서, 내 계획이 좀 뒤틀어지긴 했지만.
원래의 내 계획은 바로, 계룡 공격대의 전멸을 막기 위해 티르리니를 잡는 것이었다.
물론, 당연히 현재의 내 수준으론 마족, 그것도 귀족급 마족인 티르리니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다 방법이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놈을 사냥하기 위한 준비를 해놨었다.
티르리니가 지금 약화되어버린 것도 다 그 준비의 일환이었지.
-파스스스.
마을 광장을 빙 둘러 박힌 쇠말뚝에 하얀 빛무리가 아롱거리고 있었다.
생긴 건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이거 하나에 억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하나당 4등급 몬스터인 윌 오 위스프의 정수를 여섯 개나 박아 넣었고
3등급 몬스터인 아이언 자이언트의 뼈로 코팅한 놈이니 가격이 범상치 않을 수밖에.
티르리니의 마력과 상극이 되는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낸, 대 티르리니용 결전병기였다.
쇠말뚝이 만들어낸 동그란 결계 안에서, 놈은 자신의 특기인 번개를 완전히 봉인당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카가가가가각!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내린 어둠달의 창날이 바닥을 끌면서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시커먼 창날이 요란하게 튀는 불꽃 속에서 음울한 기운을 흩뿌렸다.
티르리니는 내가 접근하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여전히 조용히 자신의 텅 빈 손아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파팍!
넘치는 내력이 다리에 모이자, 자연스레 운룡보가 발동되었다.
황금색으로 물든 주변 풍경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치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왜곡된 공간 속에서, 나는 티르리니의 머리에 창을 찔러 들어갔다.
시커멓게 물든 어둠달의 창날 끝이 어둠을 흩뿌렸다.
-떠어엉!
“…크읍!”
첫 번째 격돌.
애석하게도 기습은 실패해버렸다. 위협을 감지한 티르리니가 몽둥이를 슬쩍 들어 어둠달의 창날을 막아내었다.
어둠달의 창끝과 티르리니의 투박한 몽둥이가 마주친 순간, 창대를 움켜쥔 손에 저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역시, 쉽지는 않네. 아무리 약화 되었어도. 귀족급 악마는 귀족급 악마라는 건가?
김헤연이 충분히 봉인 말뚝을 워낙 잘 만들어주긴 했지만, 놀랍게도 티르리니는 그렇게 약해진 상태에서도 엄청난.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까드득!
하지만, 지금 녀석 정도라면 충분히 해볼 만해!
전의를 다지며, 아래턱이 부서져라, 이를 꽉 물었다.
심호흡하며, 몸속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내어 검은 심장에게 인도하였다.
-두근!
어둠달의 창날에 내력을 불어넣자, 검은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놈이 내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자, 온몸이 텅 빈 것 같이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키이이잉!
내력을 흡수한 어둠달 전체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창대에 새겨진 마력 회로가 불길한 핏빛으로 번쩍였다.
창끝에서 시커먼 기운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어둠달 속의 검은 심장과 내 가슴 속의 붉은 심장이 공명하며 박자를 맞추었다.
김혜연의 특제 중첩 회로 공명 시스템에 의해 증폭된 내력이 몸속을 타고 흘렀다.
세상을 조각내고, 만물을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내 몸에 깃들었다.
“크허엉!”
-꽈아아앙!
사자후를 터뜨리며, 땅을 박찼다. 황금빛으로 물든 세상이 주욱 늘어졌다.
음속을 뛰어넘은 탓에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불꽃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티르리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투박한 몽둥이를 고쳐 들었다.
-쩌어어엉!
두 번째 격돌.
구도는 비슷했지만, 소리가 달랐다. 애초에 위력이 달랐다.
고동색 몽둥이와 시커먼 어둠달이 무섭게 맞부딪히며 불꽃을 토해냈다.
격돌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에 놈이 밟고 있던 돌바닥이 우지직 박살났다.
-쩌적! 쩌저적!
마계의 단단한 물푸레나무로 만든 두툼한 몽둥이에 거미줄처럼 금이 쩌적 갈라졌다..
《…!》
티르리니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을 때.
-콰득!
몽둥이를 뚫어낸 어둠달의 시커먼 창날이 놈의 가슴팍을 한 움큼 물어뜯었다.
시커먼 피가 촤악 튀었다. 꿈틀거리는 살점이 썽둥 잘려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부오오오옹!
티르리니의 가슴팍을 잘라낸 어둠달이 자루째로 진동했다.
진동하는 시커먼 창날에서 여섯 마리의 용이 풀려났다.
그렇게 펼쳐진 육룡격은 티르리니의 육신을 게걸스레 탐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콱!
마족의 강인한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시커먼 피가 폭발하듯 사방을 검게 물들였다.
《…!》
순간, 무력하게 당하던 티르리니의 눈이 붉게 빛났다.
벼락처럼 움직인 손이 재빠르게 어둠달의 창날을 붙잡았다.
-촤아아악!
내력이 깃든 어둠달의 창날을 맨손으로 붙잡은 대가는 범상치 않았다.
티르리니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그 덕에 놈은 나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봉할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티르리니의 반대쪽 손이 꽈드득 주먹을 움켜쥐고 내게 날아들었다.
-꽈앙!
“크읏!”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과 함께 전신의 뼈 전체가 욱신거리는 듯한 격통이 찾아왔다.
다급히 창대를 틀어, 놈의 주먹을 막아냈지만. 충격만으로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악문 잇새 사이로 핏물이 튀었다. 꽉 깨문 어금니에 금이 갔다.
-우웅!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어둠달의 창날에 시커먼 기운을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렸다.
-콰콰콰콰콰콱!!
허공에 여섯 마리 용의 환영이 나타나더니, 광포하게 날뛰며 다시 한 번 티르리니를 노렸다.
놈에게 피할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놈 역시 피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
티르리니의 양손이 버드나무처럼 가볍게 흔들린다. 싶더니, 놈의 주먹이 여섯 개로 늘어났다.
-콰콰콰쾅!
세 번째 격돌.
뼈와 살로 이뤄진 주먹과 뼈와 금속으로 이뤄진 창날이 격돌했다.
허공에서 연이어 폭음이 터져 나오며 비릿한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치 이성이 없는 것처럼, 티르리니의 움직임은 공격 일변도였다.
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완전히 난자당한 상태에서도 놈의 주먹은 집요하게 나를 노려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둠달에서 풀려나온 여섯 마리 용을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의도하던 대로 어둠달을 붙잡은 순간!
-쿠르륵
뭔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검은 심장의 맥박이 약해졌다.
어둠달의 창대를 움켜쥔 티르리니의 너덜너덜한 손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상에."
멀리서 나를 응원하던 누군가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파팍!
나는 아랫입술을 으드득 깨물고, 창대에 회전을 먹인 뒤, 티르리니의 가슴팍을 걷어차.
어둠달에게서 놈을 떼어냈다.
"그래, 이 정도란 말이지? 확실히 귀족급 마족은 일반 몬스터 따위완 뭔가 다르다는 거냐?”
《…….》
검은 심장에 내력을 밀어 넣으며, 시간을 끌어볼 요량으로 티르리니에게 말을 걸었지만.
놈은 묵묵한 무표정으로 말없이 자신의 재생된 손을 바라보았다.
[한 방에 보내야 할 것 같구나.]
“말하지 않으셔도 잘 압니다.”
위철용에게 짓씹듯 으르렁거리며 말한 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전투의 충격으로 박살 난 바닥에 낯익은 말뚝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갑자기 재생능력을 써서 뭔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
…잠깐만.
‘한 방’에 죽인다고?
순간,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고려해볼 새도 없이, 나는 즉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파팍!
장대 던지기 선수처럼 어둠달을 집어던져 튀어나온 쇠말뚝에 정확히 맞췄다.
그 반동으로 인해, 부메랑처럼 거칠게 팽그르르 회전한 쇠말뚝이 내 손에 잡혔다.
그래, 한방이다!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 모아, 쇠말뚝에 집어넣었다.
말뚝 속에 가지런히 박힌, 윌 오 위스프의 정수가 여섯 개가 번쩍이며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
-파지직
비스듬히 튀어나온 쇠말뚝이 완전히 뽑혀서일까?
티르리니의 손에서 시커먼 전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퍼퍽!
순간, 손에 쥔 쇠말뚝 내부에서 정수 여섯 개가 한꺼번에 모조리 터진 것이 느껴졌다.
빛속성 마력을 머금은 새하얀 액체가 말뚝 속에서 뚝뚝 흘러나왔다.
-콰앙!
-꽈르릉!
티르리니의 손에서 뇌성이 터진 것과 내가 놈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꽈드드득!
찰나를 찰나로 쪼갠 아슬아슬한 순간, 나는 티르리니의 시커먼 번개가 발사되기 전에, 놈의 가슴팍에 쇠말뚝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번쩍!
《크어어어어어어!》
티르리니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수에서 새어 나온 빛 속성 마력이 티르리니의 마력과 만나 폭발했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백열되었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빛의 광기가 세상을 밝게 불살랐다.
밝게 물들어버린 세상 속에서 시간이 뚝 하니 멈췄다.
“…!”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세상의 시간이 뚝 하니 멈췄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스듬히 넘어지는 티르리니와 입을 크게 벌린 채, 뭐라 소리 지르며 다급하게 뛰어오는 양소혜.
모든 것이 그대로 뚝 멎었다. 나 역시, 티르리니의 가슴팍에 말뚝을 박아 넣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안식을 찾을 수 있겠구나.》
그렇게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그것과 같은 가녀린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티르리니였다.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티르리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혹은 그의 표정은 놀랍게도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입가엔 왠지 모를 후련한 미소까지 깃들어 있었다.
《고맙다. 낙오자들의 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