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그래. 역시 그 깍쟁이 놈이 인성은 좀 그래도 형제를 배신할 새끼는 아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유지하던 양석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양소혜의 성격상 이야기는 담백하니 짧고 간결했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는 십 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 남부연합과 태백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이라….”
-으드득!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양석필은 까드득 이를 갈았다.
분노가 일렁거리는 그의 거대한 육신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대 격변의 시기 환란에 빠졌던 남부 지역을 제패한 패자다운 패기였다.
“어떤 씹어먹을 개자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산 채로 뼈를 발라내 주지.”
살벌한 분노를 표출한 양석필의 고리눈이 이번엔 내 쪽을 향했다.
“그래서, 소혜 말대로라면 이곳에 파견된 이들은 자네들이 전부인가 보군.”
찬찬히 나와 인사팀 팀원들을 훑어보던 양석필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우리를 지원하겠답시고 고작해야 먹물질하는 것이 특기인 인사팀 샌님들을 이끌고 오다니…. 조금 전 소혜가 말했던 ‘비책’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양석필은 단박에 인사팀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지원이랍시고 비전투 인원들을 데려온 사실이 불만스러울 법한데도,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답게 양석필은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잠시 끓어올랐던 분노를 가라앉힌 채, 이채를 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 그 비책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쥐어본 거라곤 펜대가 전부인 먹물쟁이들마저 그 푸르죽죽한 놈들을 쉽게 처치할 수 있도록 해주거든요.”
양석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소! 그 흉측한 놈들을 상대하느라 희생된 공격대원들이 십수 명이란 말이오!
강한 확신을 담은 나의 답변에 화롯가에 앉아있던 인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어대는 통에 천막 내부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어수선해졌다,
“…그만! 허면. 그렇게 ‘대단한’ 비책을 지금 우리 남부연합을 위해 순순히 내놓겠다는 소린가?”
분위기가 점점 더 어수선해지자, 양석필은 손을 들어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나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순순히’라니! 이 업계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듣자 하니 남부연합은 은원을 절대 잊지 않는 곳이라는데. 이번에 확실하게 도와드리면 저도 그쪽에 합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양석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곤 빙그레 웃으며, 뻔뻔스레 나중에 도와준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가겠노라 선언했다.
“솔직해서 좋군.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 남부연합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곳이지.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
양석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인사팀을 부려, 트럭 두 대분의 정수를 남부연합의 본부까지 옮긴 뒤.
내력을 집중한 손길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으깨고 뒤섞어 걸쭉한 액체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수상쩍은 액체를 무기에 바르기만 하면 된단 말입니까?”
수많은 몬스터들의 정수가 뒤섞인 액체는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워낙 해괴한 냄새를 풍겨대는 통에, 그것들을 받아든 남부연합의 헌터들은 하나같이 불만과 의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블루 와이번 뼈로 만든 검이라 부식에 민감하단 말입니다. 혹시 잘못되면 그쪽에서 보상이라도 해줄 겁니까?”
게다가, 아무리 양석필에게 지시를 받았다고 한들.
남부 연합의 헌터들에게 나는 그저 외부인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정수 혼합물이 든 통을 받아가는 것은 양반이고, 때로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시비를 걸어대기도 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대머리 헌터 역시, 그런 부류였다.
…도와준다고 해도 난리야. 이것들은.
“싫으면 그냥 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해.”
대머리에게 막 축객령을 내리려던 찰나.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양소혜가 불쑥 끼었다.
”으허헉! 소혜 누님. 죄, 죄송합니다.“
양소혜의 냉막한 표정을 본 대머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정수 혼합물을 챙긴 채 후다닥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미안해. 우리는 외부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아서….”
양소혜는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내게 사과를 표했다.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도 텃세를 부리는 남부연합의 헌터들에게 그녀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낀 탓이었다.
“뭐, 나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낙하산에 불과하니까. 그나저나, 별일이네.”
“…별일?”
그렇지 않아도 내게 마음의 빚이 있는 양소혜가 지나치게 침울해하자.
나는 그녀에게 슬쩍 농담을 건넸다.
“보통 이런 식으로 아버님들을 찾아뵐 땐 말이지. ‘딸을 부탁하네.’ ‘자네는 사윗감으로 제격이군!’ 등등 대충 그런 식으로 엮으려고 들던데. 이번엔 별일이 없었잖아.”
“엮는다고? 어떻게?”
하지만 양소혜는 내 농담을 못 알아먹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상 물정에 그리 밝지 않은 그녀답게, 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아니, 뭐 그런 거 있잖아. 만화라든지. 소설 같은 걸 보면.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찾아왔을 때. 남자의 인품에 홀딱 반한 아버지가 사윗감이니 뭐니 하며….”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양소혜의 반응에, 어쩐지 민망해져서 부연 설명을 곁들이려 했으나.
괜히 자괴감이 찾아와 중간에 말을 뚝 끊었다.
“아니다. 괜히 농담에 부연 설명을 곁들이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지.”
“우리 아빠가 너보고 반해야 돼? 아빠한테 그렇게 말해볼게.”
…도대체 어떻게 알아먹으면 그렇게 끔찍하게 왜곡해서 알아먹을 수가 있는 거냐.
계속해서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양소혜에게 쓰게 웃은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아냐. 그냥 못들은 걸로 해줘. 그것보다…. 정수를 제법 많이 소모했는데. 인원은 얼마나 남았지?”
내 말에 양소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수 혼합물이 들어있는 드럼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녀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남았네…. 괜찮겠어? 너무 정수를 많이 소모한 거 아냐?”
양소혜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공짜도 아닌걸. 말했잖아. 대가는 확실히 받아내겠다고”
이곳에서 소모한 정수 값만 해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남부연합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밑지는 장사까진 아니었다.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남부연합의 기본 사상은 바로 ‘받은 만큼 돌려준다.’ 였으니까.
“그래도 용호가 너무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시무룩한 목소리의 양소혜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덜덜 마시고. 나중에 어떻게 갚으실지나 생각하십쇼. 이상한데 마음 쓸 기력 있으면 다른 쪽이나 좀 도와주지 그래? 마침 저기 또 실랑이 벌이는 중이네.”
계속해서 양소혜가 내 앞에서 시무룩하니 우물쭈물한 표정을 보여주자.
나는 그녀를 인사팀과 남부연합 헌터 사이에 벌어진 싸움판에 밀어 넣었다.
“으. 으응. 알았어. 나중에. 어떻게든 꼭 갚을게.”
고개를 끄덕인 양소혜는 후다닥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성난 고함소리와 함께 짜악! 맛깔 나는 따귀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정말이지. 호구가 따로 없네요. 싫은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굳이 이래야 하나.”
준비한 정수를 모두 나눠주고 잠시 쉬고 있으려니, 완전히 진이 빠져버린 기색의 신지현이 터벅터벅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성격이 보통이 아닌 그녀조차 고초를 겪은 모양인지, 그녀의 복장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정수 혼합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호구라니,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뜯어낼 겁니다.
“퍽이나.”
콧방귀를 낀 신지현은 품속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내 들었다.
“남부연합도 지금 많이 힘든 상황인데. 잘도 그 잘난 ‘대가’를 토해내겠네요.”
“아뇨. 그들은 반드시 토해낼 겁니다.”
위스키를 원샷한 신지현은 특유의 히스테릭한 말투로 비관적인 전망을 내 놓았지만.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걱정을 일축했다.
“…뭘 믿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
“남부연합이 지금은 좀 많이 쪼그라들었어도. 저력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잘 아시잖습니까. 이 양반들은 목숨보단 체면과 명예를 더 중시한다는 것.”
대 침식의 여파로 인해, 남부연합이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저력과 이들을 하나로 끈끈하게 묶어놓은 사상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신지현의 비관적인 전망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 뭐하면 몸으로 때워달라고 부탁하죠. 뭐.”
게다가. 정 뭐하면 남부연합의 헌터들을 용병으로 써먹는 방법도 있다.
의리와 은원을 중시하는 그들답게,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달려와 주겠지.
“정말이지 헌터님은…. 휴우.”
나름 현실적인(?) 답을 한 것 같았지만, 속물적인 신지현에겐 의리니 뭐니하는 것이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인지.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연거푸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것보다 헌터님. 지난번에 조사를 부탁하셨던 것 있잖아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술만 비워댄 신지현은 갑자기 내게 뜬금없는 소리를 건넸다.
조사? 신지현에게 내가 조사를 맡겼던 게 있었었나?
“의외의 인물들이 그곳에 감금되어 있더라구요.”
…뭔가 했더니, 신지현에게 안산 게이트에 대해 조사시켰던 적이 있었었지.
그런데, 벌써 강태백의 치부를 발견했단 말이야? 조금 뜬금없긴 해도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게….
“요 몇 달 사이 실종되었던 연예인이며, 정치인 등 각종 유명인사가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어요. 덕분에 안종훈의 죄를 입증할 수 있었고 저희 신흥 감찰팀은 꽤 괜찮은 실적을 올릴 수 있었죠. 길드장님께서도 저희에게 신뢰를 보내셨구요.”
…뭐?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안산 게이트는 강태백이 사교도로 전락해버린 아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 감금한 곳에 불과했다.
신지현에게 그곳을 조사하러 시킨 이유도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강태백과 충돌시키기 위한 이간질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강태백의 아들 대신 연예인이랑 정치인이 잡혀있었다고? 또 그걸로 신지현이 실적을 쌓아 신임을 얻게 되었어? ?
“사교도들에게 붙잡혀 세뇌당하던 무고한 이들을 무사히 구출해 낼 수 있었죠…. 감사합니다. 헌터님. 덕분에 저희 아버지도 무사히 구출되셨어요.”
…거기서 댁 아버지는 또 왜 나오셨는데.
또 하나의 역사가 뒤틀어진 탓에 혼란에 빠져있으려니.
신지현이 갑자기 그녀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과 진심 어린 태도로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뒤틀어진 역사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신지현과 기묘한 은원을 맺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말이에요.”
순간, 고개를 숙인 채, 내게 감사를 표하던 신지현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머뭇머뭇 말을 건넸다.
“아까. 함부로 퍼주니 호구니 뭐니 했던 거…. 제 본심이 아니었어요. 남부연합을. 저희 고향을 이토록 열심히 도와준 이는 이제껏 단 한명도 없었거든요. 죄송합니다. 헌터님.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신지현의 입에선 계속해서 그녀답지 않은 감정의 연쇄가 터져 나왔다.
죽을 때가 임박하기라도 한 건가? 이 여자는 갑자기 불안하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