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끄으응. 여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의무실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양소혜의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렇지 않아도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그대로 강태백에게 무작정 덤벼들기까지 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겠지.
아마 태백의 의무팀이 아니었으면 진작 목숨을 잃었을 걸?
“…….”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양소혜는 나를 발견하자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상처입은 몸이 가볍게 떨렸다. 이불 위로 튀어나온 주먹이 꽉 쥐어졌다.
“…미안해.”
“알긴 아네? 미안하다는 거?”
입술을 꽉 깨문 양소혜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표했다.
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이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를 대하는 내 말투엔 존댓말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 상관없는 너까지 이용해서 미안해…. 정말. 정말….”
“고작 그따위 짓을 하려고 내게 무릎을 꿇었던 건가? 장렬하게 누명을 쓴 강태백에게 달려들어 폭사하려고?”
아무리 원한에 눈이 멀어, 악에 받쳤다고 한들, 양소혜의 행동은 무책임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아도 강태백은 손에 꼽히는 강자일진대, 부상까지 입은 햇병아리 헌터가 그를 상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넌센스였으니까.
“튜토리얼 타워에서 보여줬던 철없는 모습이 좀 나아졌나 했더니….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는건 그대론가 보네.”
나는 한심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양소혜에게 빈정거렸다.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난입했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저지른 짓이란 전쟁의 빌미가 되기 딱 좋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헛짓거리였다.
“미, 미안해. 정말….”
“그래서,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했어? 누명에 기습까지 당한 강태백이 남부연합과 완전히 척을 지길 원했나?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까지 모조리 복수의 지옥불 속에 쳐 넣어주시려고 그랬어?”
나는 냉혹하게 양소혜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었다.
내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튀어나올 때마다 양소혜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갔기에.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할 테니까.
“그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닐 텐데?”
푹 떨궈진 양소혜의 고개는 다시 들어 올려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닐 텐데도, 그녀는 고장난 인형처럼 사과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까맣게 죽어, 빛을 잃어버린 그녀의 눈빛에선 더 이상 생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몇 번 쏘아붙였다고 이토록 시무룩한 모습이라니. 이거 생각보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데?
“쯧. 이미 망가져버렸군. 그래서? 기껏 고쳐놨더니. 다시 뒈지시겠다? 엉뚱한 놈에게 놀아나 놓고도? 죽은 공격대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새로운 게이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자살희망자 그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 양소혜에게 나는 계속해서 비웃음을 날렸다.
양소혜처럼 자존심이 강한 이에겐 어설픈 위로보단.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편이 더 잘먹히는 법이….
-주르륵.
…지는 않군.
하지만 양소혜는 내가 기대한 것과 같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흐리멍텅하니 흐려졌다. 물기를 머금은 눈가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기 시작했다.
“부, 분해서 우는 거야? 아니면 네 꼴이 처량해서 우는 거야?”
“…미안해서…. 너도, 아저씨도, 남부연합 식구들에게도….”
양소혜가 그녀답지 않게 눈물을 쏟아내자, 당황한 나는 엉겁결에 괴이쩍은 질문을 던졌다.
소리없이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입에선 그녀다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정말 미안했어, 실례가 많았네.”
그렇게 잠시 동안 눈물을 흘려낸 양소혜의 눈빛이 다시 쓸데없이 비장해졌다.
다 부서져서 날만 남은 창을 지팡이삼아 양소혜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꼬깃꼬깃 손때가 묻어있는 통장을 하나 꺼내, 공손하니 두 손으로 내게 건네주었다.
“약소하지만, 내 전 재산이야. 이젠 의미가 없는 거기도 하고.”
…통장만 주고 뭐 어쩌라는 거지?
양소혜의 태도는 비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평생을 수련에만 매진한 그녀답게, 양소혜는 세상물정엔 대단히 어두운 것 같았다.
아니, 뭐. 전 재산을 주겠다는 심정은 이해하는데 말입죠.
이 통장만 덜렁 들고 가선 뭘 할 수가 없는데요?
“…그럼.”
벙쪄있는 내게 통장을 건네준 양소혜는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그녀의 눈에선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투지가 일렁거렸다.
홀몸으로라도 생명의 불꽃을 최후의 순간까지 사르려는 모습이, 사뭇 비장하게 보일정도였다.
그렇게 처연한 미소를 남긴 양소혜는 부들부들 떠는 몸으로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그런 신파극을 말없이 바라만 보던 나는, 가볍게 양소혜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볍게 붙잡아 세우려는 의도였지만, 그녀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
엉겁결에 어깨를 붙잡힌 양소혜는 그만 중심을 잃고 병실 바닥에 우당탕 넘어져버렸다.
“…그래. 때리고 싶으면 마음껏 때려.”
제법 요란하게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양소혜는 신음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여전히 죄책감과 결연함이 오묘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쓰읍. 오늘 어째 일이 제대로 풀리지가 않네.
“…때리다니. 사람을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그럼 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쓰러진 양소혜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나를 바라보는 양소혜의 눈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이래뵈도 난 빚은 확실히 받아내는 스타일이거든. 먼젓번에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지? 그 말이 진짜인지 한번 봐 보자고.”
“빚은…. 그걸로 퉁쳐주면 안 될까?”
“아니, 이 사람아. 통장만 덜렁 던져주면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건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어쩐지 시무룩한 양소혜의 눈빛에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표정의 양소혜에게 그녀가 건넸던 꼬깃꼬깃한 통장을 던졌다.
“게다가, 애초에 이까짓 푼돈으로 대충 퉁치겠다고? 사람을 얼마나 싸구려로 보는거야? 그렇게 미안하다면. 이쪽에도 도움이 될 만한 짓을 하시지 그래?”
“…뭐?”
“그…. 뭐시냐. 남부연합에 새로운 게이트가 생겼다는건. 우리에게도 위협이 될만한 일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태백의 산군으로서 신형 게이트에 대해 조사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안내 좀 부탁해.”
의외의 말을 들어서일까? 양소혜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다래졌다.
“어…. 으어. 그, 그러니까. 요, 용호 네 말은….”
보통 당황한 것이 아닌 듯, 양소혜는 그녀답지 않게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투지가 활활 타오르던 눈에 다시 한 번 습기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른 감정 탓에 목이 메인 모양인지, 양소혜는 제대로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도와주겠다고요. 대신. 대가는 확실히 받을 테니까! 방금처럼 그따위 푼돈으로 퉁치려는 생각 따윈 하지도 말고!”
양소혜 답지 않은 모습에 피식 웃은 뒤.
굳어버린 양소혜에게 나는 줄곧 등에 메고 있었던 길쭉한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건?”
“우리 관대하신 길드장님이 당신에게 덤벼든 원수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이랍신다. 거기에 길드장님도 남부연합에게 빚을 확실히 받아내라 지시하셨으니. 각오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뒤늦게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한 양소혜의 눈에 다시 방울방울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태백이 선물한 창을 꼬옥 움켜쥔 채, 감정을 삼키는 그녀에게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울기는. 너무 좋아하지는 말라니까? 이번에야 말로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낼 거야.”
엉뚱한 곳에서 대 침식이 시작되긴 했지만, 그동안 그에 대한 대비는 진즉 끝내둔 상태였다
당연히 몬스터로 변이된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까지 모조리 대비해둔 상태지.
기왕 이렇게 되어버린 것, 나는 남부연합 쪽에 큰 빚을 지워둘 생각이었다.
…절대. 무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감동 받은 것처럼 굴어도 소용이 없다구.
“일단. 출발하기 전에 준비 좀 해볼까?”
눈이 촉촉하게 젖어든 양소혜를 보며,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
서민혁이 운전하는 듀라한은 이번에도 부서진 도로 위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듀라한의 뒷좌석엔, 나와 양소혜 이외에도 불청객 한 명이 더 탑승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길드장님께선. 무슨 생각이신가 몰라. 이 인원으로 남부연합 지원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세요? 이쯤 되면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거 아녜요?”
불청객, 신지현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료 캐비닛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어쩔 수 없어요. 길드장님께선 내부를 수색하신다고 하셨으니….”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놈은 직인을 몰래 빼돌릴만 한 위치에 속한 내부자였다.
때문에, 비밀 유지를 위해서라도 남부연합을 지원하러 가는 인원은 내가 부릴 수 있는 인원에 한정된 상태였다.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을 같이 맞는다더니, 옛날 하나 틀린거 없다니까. 어쩜 이렇게 뭣 같은 건수만 물어 오시는지 모르겠네요.”
커다란 샴페인 잔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꼴꼴 따른 신지현은 나직히 한숨을 내뱉었다.
감찰팀, 인사팀을 동시에 운영하며 배짱이 두둑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워낙 자주 만난 통에, 내 외모에 일종의 내성이 생긴 것인지. 그녀의 독설을 거침이 없었다.
“…….”
하지만, 그렇게 신랄한 독설을 하면서도, 의외로 위스키를 홀짝이는 신지현의 눈엔 그렇게까지 큰 불만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매니저님이라면, 길길이 날뛰실 줄 알았는데. 별일이네요?”
애초에 출발하기 전, 이 건에 대해 자초지종 설명하며 신지현에게 협력을 요구했을 때도.
그녀는 짧게 탄식을 토한 것 외엔 딱히 불만을 표하지도 않았다.
“제가요? 어머나.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내 묘한 눈빛과 마주한 신지현은 짐짓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보긴, 권력과 물욕에 절어있는 속물의 화신으로 보고 있지. 뭘 그리 새삼스럽게.
“뭐, 솔직히 제가 평소에 좀 이걸 밝히긴 한지만. 이번엔 길드의 위신이 달린 일이잖아요? 사람들 목숨도 걸려 있구요.”
검지와 엄지를 오므린 신지현은 싱긋 웃더니 독한 위스키를 세잔 째 스트레이트로 위장에 때려 넣었다.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키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야? 강한 사람이야?”
앞좌석에 앉아있던 양소혜가 뒤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신지현의 특이한 복장에 관심이 많은 모양인지, 양소혜는 신지현의 옷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내 전속 매니저님.”
“갑옷이 멋진데…. 강한 사람이야?”
충분히 회복된 모양인지, 양소혜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수 회복한 상태였다.
신지현을 바라보는 양소혜의 눈빛은 부담스러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선물 받은 새로운 창을 빼들고 신지현과 자웅을 겨루고 싶다는 욕구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어머어머, 제가 그렇게 무식하게 몸 쓰는 일에 특화된 사람처럼 보이세요? 기껏 포션까지 먹여서 고쳐드렸더니 안되겠네. 어쩜 이리 배은망덕하실까.”
신지현의 말처럼, 양소혜의 상태는 굉장히 호전되어있는 상태였다.
의무실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만 해도 그녀의 체력은 말이 아니었지만, 신지현이 건네준 질 좋은 포션을 복용한 뒤론 양소혜는 체력을 상당히 회복한 상태였다.
“배, 배은망덕…. 미안해. 미안해….”
‘배은망덕’이란 단어를 들은 양소혜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즉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충격을 먹은 듯, 둥글게 몸을 웅크린 그녀는 까맣게 죽은 눈으로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직도 찔리는게 많은가 보군.
“어머…. 그렇게 반응하시면. 제가 무안해지잖아요? 전 그저 설용호 헌터님…. 아니 설용호 산군님 휘하의 세력을 이끄는 팀장으로서 따라 가는 것뿐이에요.”
양소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습한 아우라에, 신지현은 그녀답지 않게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따라온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팀장이라니. 도대체 이 계집은 또 왜 따라 붙은 게냐?]
바로 그때, 품 속에서 위철용이 굉장히 오랜만에 그 못생기게 정겨운 모습을 드러냈다.
대 침식이 원 역사와는 달라져버린 탓에 충격을 먹은 뒤로 이틀 만의 등장이었다.
그나저나. 기껏 오랜만에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신지현에 대한 험담이라니….
위철용의 언짢은 표정에 쓰게 웃은 나는 그에게 신지현이 별 불만 없이 따라온 이유에 대해 답해 주었다.
‘말은 저래도, 본가가 이쪽이라는데요?’
그랬다.
신지현의 생존본능이 비명을 지를 법한 지시에도, 그녀가 군말없이 따라붙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녀의 고향이 남부연합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으나, 그녀의 부모와 일가친척들은 지방에 살고 있었다.
“…그것보다 매니저님 괜찮아요? 그거 40도짜리라고 하던데.”
“어머? 이거요? 이 정도면 물이죠 물.”
40도짜리 위스키를 물처럼 받아들이는 간이라고? 그딴 게 실존하면 생물학계에 혁명이 일어날걸?
겉으로는 태연한 척 연기하고 있었으나, 신지현 역시 초조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한 그녀는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다섯 잔이나 비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지현이 대관절 무슨 도움이 된다고 데려가는 것인 게냐.]
‘강태백이 배려해준 것이기도 하고, 병아리들을 인솔할 만큼 제가 성실하진 않거든요. 마침 신지현은 꽤 유능한 인솔자이기도 하구요.’
나는 듀라한 뒤쪽에 따라붙은 ‘병아리’들을 흘깃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아주 유능한 인솔자지. 사람 갈구는 데도 도가 튼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