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역시나 신지현은 생각보다 더 유능했다.
서민혁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은 지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금새 언제든 괜찮다는 말과 함께, 강태백과의 면담 일정을 잡아놓았다.
덕분에 지체되는 시간 따윈 없이. 나는 서민혁이 운전하는 듀라한에 양소혜와 함께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소혜 씨! 이 고약이라도 좀!”
듀라한의 육중한 차체가 유령처럼 움직이렫ㄴ 찰나.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은 모양인지, 김혜연이 공방 안에서 뒤늦게 뛰어나와 시커먼 무언가가 담긴 유리통 열심히 흔들었다.
“나~중에 찾아갈게요! 혜옥이에게 안부 좀 전해주시구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듀라한은 김혜연이 생각한 것 이상의 출력을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도로로 빠져나온 듀라한은 김혜연의 공방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김혜연의 거대한 거구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시야에서 멀어져버렸다.
나는 열심히 손을 흔드는 김혜연에게 창문을 열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양소혜 대신 답변을 전했다.
“정말이지. 순박한 아가씨라니까요.”
“…헤연이가 여자였어?”
아가씨라는 말을 들은 양소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 김혜연 그 아가씨가 ‘평범한’ 아가씨랑은 좀 거리가 있는 외형이긴 하지.
“엄연한 숙녀분입니다. 그거, 본인 앞에서 말씀하시면 무레한 이야기에요.”
짐짓 농담조로 질책하듯 양소혜에게 쏘아붙인 나는 느긋하게 뒷좌석의 쿠션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양소혜는 김혜연의 정체(?)에 충격을 먹은 모양인지 계속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대단한 근육이라면, 언젠가 한번 대련을 요청해봐야겠어. 단련법도 좀 물어보고.”
…저런 점은 또 여전하네.
일련의 사건으로 나름 성장한 것 같긴 하지만, 양소혜의 호전적인 성격이 완전히 수정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
고속도로를 무섭게 내달린 듀라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를 서울로 데려다 주었다.
본사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나는 꼭대기에 위치한 강태백의 집무실로 향했다.
“강녕하셨습니까. 길드장님.”
“어서 오게. 갑자기 또 면담이라더니, 요즘 꽤 자주….”
화려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의 강태백이 나를 반겨주었다.
최근들어 자주 면담을 요청해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뒤따라 내린 양소혜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나를 반겨주던 인사 역시 중간에 뚝 끊겼다.
“…아니, 이거 소혜 아니냐!”
순간적으로 강태백의 얼굴에 이제껏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말을 뚝 끊고, 양소혜를 바라보는 강태백의 입가엔 그답지 않게 순수한 반가움이 가득한 미소가 깃들었다.
“으하하하. 그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번듯하게 자랄 줄이야. 아저씨 기억하지?”
양소혜를 보며, 짐짓 너스레를 떠는 강태백의 얼굴엔 반가움과 대견함이 가득 차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선, 진심으로 오랜 지인의 자식을 반기는 듯 훈훈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노회한 인물답군, 지인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도 그 자식에게 저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인단 말이지?
강태백의 위선과 가식에 가득 찬 반응을 바라보던 나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파츠츠츠
그리곤 강태백의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볼 요량으로, 나는 남몰래 화안금정을 발동시켰다.
『진실』
“…?!”
…뭐야?
하지만, 강태백의 머리 위에 떠오른 단어를 본 순간, 나는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강태백은 진심으로 양소혜의 방문을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태백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물론 기억하구 말구요.”
혼란에 빠진 상태로 강태백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양소혜가 씩씩한 목소리로 정중하게 강태백에게 악수를 권했다.
강태백은 그답지 않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와락 붙잡았다.
“으하하하. 요 귀여운 것! 아찌 아찌 하면서 재롱떨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씩씩해졌는지 모르겠구나! 석필이 형님은 잘 지내시고?”
『진실』
…강태백이 연기에 소질이 있었나? 화안금정을 속일 수 있을 만큼?
강태백의 머리에 떠오른 진실이란 단어에 내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거짓 정보를 풀어 남부연합에 타격을 입힌 장본인답지 않게, 강태백은 양소혜와 양석필에게 진실된 친밀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게요. 실은.”
“아, 아참 그렇지. 미, 미안하구나. 우리 꼬맹이를 워낙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저씨가 실수를 했지 뭐냐. 석필이 형님이 계신 나, 남부연합이 위기에 처했다지?”
양석필의 안부를 묻는 강태백의 말에 양소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 양소혜의 반응에 강태백은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어가며 당황했다.
그 누구보다 허례허식을 따지기 좋아하는 인물이 바로 강태백일진대, 당황한 그의 입에선 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물론,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단어는 계속해서 진실이었다.
“맞아요. 태백에서 알려준 ‘거짓’ 정보 때문에, 저희 남부 연합 식구들이 위기에 쳐했죠.”
…이건 또 뭐지?
양소혜의 입에서 별안간 내 상상을 뛰어넘는 말이 튀어나왔다.
웃는 표정으로 강태백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별안간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촤아아악!
저, 저런 미친!
눈에서 살벌한 살기를 뿜어내던 양소혜는 소매 속에 숨겨둔 부러진 창날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그녀가 휘두른 창날이 강태백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소, 소혜야? 이게 대체 무슨….”
“태백의 거짓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버렸는지 알아? 그쪽에게 우리 식구들의 목숨값을 받아내야겠어!”
강태백을 바라보는 양소혜의 이글거리는 눈빛엔 시퍼런 한이 서려있었다.
돌변한 양소혜의 태도에 그 강태백마저 심하게 당황하였다.
언제나 늙은 너구리처럼 노회함을 자랑하던 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무, 무슨 소리냐 소혜야. 거짓말이라니?!”
“시치미 떼지마! 뭐? 남색 게이트가 위험하니 정예들만 골라서 접근하라고? 거기에 노출된 모든 식구들이 괴물로 변해버렸어! 알아?”
양소혜는 이미 침식형 게이트에 접근하면 무슨 말로에 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나까지 속여넘겼다. 그녀가 강태백을 만나려는 이유는 복수였다.
태백의 인도적인 지원 따위가 아니라….
“각오해! 강태백!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믿었는데!”
…아니, 속여넘긴 건 아니군 처음부터 양소혜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생각해보니 애초에 그녀는 강태백을 ‘만나야 한다’고만 했지, 강태백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소린 하지도 않았다.
강태백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 또한, 양석필과 강태백의 친분만 언급했지 뒷말은 두루뭉술하게 흐려버렸고 말이야….
…제법인데 양소혜? 이상할 정도로 내게 저자세로 나왔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잠깐, 잠깐. 뭐라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분명히 거기에 ‘접근하지마라’고 형님께 공문을 보냈거늘!”
『진실』
시퍼런 살기를 풀풀 휘날리는 양소혜의 이야기를 듣던 강태백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황과 황당함이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가 평소의 진지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제대로 전달받은 정보를 보냈노라 털어놓는 강태백의 머리위엔 여전히 진실이란 단어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놀랄일의 연속이네, 강태백이 거짓 정보를 퍼뜨린게 아니었다니.
“….”
…젠장. 그런줄도 모르고 엄한(?) 강태백에게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내뿜었잖아.
강태백의 진의를 확인한 순간, 민망함이 확 몰려왔다.
양소혜와 남부연합을 이용해, 강태백을 끌어내릴 계획까지 세워뒀는데 말이지….
“신형 게이트는 침식형 게이트다. 그곳에 절대 접근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협회 소속 길드들에게 공문을 돌린 것이 일주일 전이다. 그런데. 뭐? 접근을 하라고? 그따위 정보를 우리가 뿌렸다고?”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는 강태백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한민국 최고 길드를 이끄는 수장다운 압도적인 기백이 아우라처럼 그의 몸에서 흘러 나왔다.
양소혜를 노려보는 강태백의 눈에선 더 이상 따스한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네년이 형님의 딸이라지만! 내게 그따위 망발을 하며, 우리 태백을 모욕하려 들어!”
-화르르륵!
한때 대한민국 헌터 계의 정점에 오른 강태백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의 옷에 장식된 보석들이 고온을 이기지 못하고 퍽퍽 깨져나갔다. 깨져나간 조각들은 이내 허무하게 증발해버렸다.
강태백의 특성 트리 『금속과 불꽃의 노래』가 그 흉악한 위력을 피상적으로나마 드러내었다.
“크으읏! 모욕이 아냐! 아버지는, 우리는 끝까지 당신을 믿었어! 그런데…. 그런데!”
강태백의 힘의 편린을 마주한 양소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곤 강하게 부러진 창날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은빛 창날에서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뻔뻔한 원수!”
짜랑짜랑한 기합을 내지른 양소혜는 힘껏 창을 내질렀다.
냉기가 아롱거리는 은빛 창날이 불꽃에 휘감긴 강태백을 숨통을 노렸다.
강태백은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양소헤를 향해 불꽃에 휘감긴 주먹을 휘둘렀다.
“…그만.”
그 위기의 상황에서 나는 어둠달을 치켜들었다.
화안금정이 보여주는 두 사람의 공격궤도를 따라. 어둠이 넘실거리는 어둠달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
“…용호?”
-카드드드득!
불꽃을 머금은 주먹이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창끝에 가로막혀 멈칫 멈춰섰다.
냉기를 머금은 창날이 시커먼 어둠이 넘실거리는 창날과 충돌했다.
요란하게 금속이 비명 지르는 소리와 함께, 양소혜의 창날 표면이 갈려나갔다.
“그만들 하죠? 두분 다. 혹시 이게 이간질이라곤 생각 안 해보셨겠습니까?”
그렇게 강태백과 양소혜의 충돌을 강제로 멈춰 세운 나는 그들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글씨는 모두 진실이었다.
“끄응…. 미안하군. 자네에게 추태를 보였어.”
“….”
양소혜는 말없이 고개를 푹 떨궜지만, 강태백은 겸허히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사과하였다.
아니, 애초에 강태백은 양소혜를 해칠 생각이 없었다. 화안금정이 보여준 강태백의 공격궤도는 전혀 엉뚱한 곳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이간질이 아니야. 분명히…. 분명히. 태백에서 이런 문서를….”
의기소침해진 양소혜는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서류를 하나 꺼냈다.
그녀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나는 서류를 펴서 강태백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길드장님…. 인장이네요?”
양소혜가 말한대로 거짓된 내용을 담은 서류엔 강태백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도장이 아니라, 절대 위조가 불가능한 강태백 본인의 직인이었다.
“말도 안 돼, 나는 이런 서류를 보낸 적이 없네. 하지만…. 이 인장은 진품이로군….”
신중한 표정으로 서류를 바라보던 강태백이 맥빠진 소리를 내었다.
“마, 맞잖아! 이건 분명 태백에서 온 서류….”
“…소혜야. 나는 지금까지 형님께 서류를 보낼 때마다. 단 한번도 태백의 길드장. 강태백의 이름으로 보낸적이 없단다. 따라서…. 직인 따윈 찍지도 않았지.”
강태백은 힘없은 목소리로 양소혜에게 진실을 알려줬다.
뒤늦게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양소혜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헬쑥한 표정으로 강태백과 나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고개를 푹 떨궜다.
-으드득!
그리곤 이를 악 물더니, 양소혜는 자신의 부러진 창날을 다시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미안해 용호.”
-퍼억!
양소혜가 미련한 선택을 하기 전에, 나는 그녀의 뒷목을 때려 양소혜를 기절시켰다.
그렇게 힘없이 풀썩 쓰러진 양소혜를 바라보던 강태백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쩜, 제 아비랑 그리 닮았는지 모르겠군.”
착잡한 표정으로 양소혜를 바라보는 강태백의 얼굴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단어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 감히 나를 사칭해. 남부연합의 궤멸을 노리려는 자가 있을 줄이야.”
강태백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으르렁거리듯 내게 부탁과 명령이 뒤섞인 전언을 내렸다.
“감찰팀을 장악했다고 들었네, 신 팀장과 함께 남부연합으로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해주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남부연합에게 힘을 좀 실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