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 잘생겼다!-56화 (56/309)

제56화

그렇게 가만히 양소혜를 바라보는 사이, 어색한 침묵의 시간은 공방 옆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정적 속에서 양소혜는 여전히 날카로운 자갈들이 즐비한 주차장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

슬슬 뾰족한 자갈이 체중에 짓눌려 살갗을 파고 들어오는 고통이 느껴질 법한데도,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양소혜는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흐으음.”

이제 어떻게 한다….

이미 역사는 달라졌다. 지금의 대 침식은 내 기억과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버렸다.

대 침식의 시기에 닥쳐올 첫 번째 재앙은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버렸는지, 다음 일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뒤틀어진 상태였다.

…우선은 내키지 않지만 양소혜를 도와야 하나?

“좋습니다. 길드장 님께 기별을 넣어드리도록 하죠.”

잠시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본 나는 양소혜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내가 대 침식을 대비하여 준비해둔 것은 많지만, 남부연합의 도움을 거절할 필요까진 없었다.

이 기회에 남부연합 쪽에 빚을 좀 지워두면, 훗날 손해볼건 없을 테니 말이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게!”

-쿵! 쿵!

내 입에서 허락 비스무리한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소혜는 격양된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한번 뾰족뾰족한 돌밭에 쿵쿵 머리를 박았다.

양소혜의 비장한 돌발행동 덕분에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던 내 손길이 머쓱해졌다.

“아으으 정말….”

앙소혜의 비장한 모습에 김혜연은 커다란 눈을 꼬옥 감곤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혜연이 들어간 공방 안쪽에서 요란하게 무엇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으니까. 일단은 좀 일어섭시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난 괜찮아! 크윽! 그보단 어서 연락을…!”

여전히 엎드린 상태의 양소혜는 내게 먼저 강태백에게 연락부터 해달라 부탁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의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 원래 성격이 이렇게 이랬었나?

튜토리얼에서 보았었던 철없이 호전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꿇어 엎드린 양소혜에게선 자신의 안위따윈 도외시 한 채로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해 헌사하는 헌신적인 모습만이 보였다.

…위기가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인가? 그때랑은 또 다른 모습이네 이거.

“서 기사님? 매니저님께 전화해서, 길드장님 면담 일정 좀 잡아달라고 전해줘요. 남부연합 지원 문제로 급한 일이니까 최대한 빨리, 가능하면 오늘 내에 잡아달라고도 반드시 당부해주시구요.”

양소혜가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에 나는 구석에서 대기하던 서민혁을 소리쳐 불렀다.

그리곤 서민혁으로 하여금 신지현에게 양소혜가 요구한대로 강태백과의 면담일정을 잡아달라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옙! 알겠습니다.”

서민혁의 입에서 짧고 간결하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 말에 ‘급하다’라는 말이 포함된 것을 눈치챈 서민혁은 재빨리 신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스마트폰을 입가에 가져간 그는 공방 뒤쪽으로 뛰어갔다.

“들으셨죠? 부탁하신 대로 우선 길드장님과의 면담 일정 잡아놨어요.”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부탁한 것을 들어준 뒤에도 양소혜는 계속해서 돌밭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긴 커녕 다시 한번 자신의 ‘고마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선지 그녀의 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터업.

“그렇게 고마우시다면 좀 일어나십쇼.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지말고.”

양소혜가 돌밭에 머리를 찍어대는 모습따윈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학적인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는 또다시 자신의 몸을 학대하려는 양소혜를 와락 붙들어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불편했다면. 미안해.”

내 불편한 시선과 마주한 양소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 좀 해주세요.”

하지만, 내가 ‘불편함’을 느낀 것은 그녀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강제로 일으켜 세워놓은 통에 그녀의 처참한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김혜연이 정성껏 곳곳에 붕대를 감아놓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 양소혜의 상태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헌터 특유의 강인한 재생력으로도 감당이 안 될만큼의 부상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내가 속한 공격대가 처음보는 몬스터들에게 유린당했어.”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갈등하던 양소혜는 이내 아랫입술을 까드득 깨물었다.

그리곤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내게 자신이 겪었던 참극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마을에 갑작스레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남색빛이 번들거리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들에게 양소혜가 속한 공격대가 전멸당했다는 것, 그리고 동료들의 희생으로 양소혜 혼자서만 간신히 살아 그곳을 빠져나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굉장히 괴로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양소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양소혜의 목소리는 그녀의 슬픔을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색의 몬스터라….”

남색으로 빛나며 번들거리는 외피.

침식형 게이트에게 침식되어 변이당한 몬스터들의 특징이었다.

아무래도 역시나 실종된 공격대원들은 몬스터로 변이되어, 동료들에게 칼을 겨눴던 모양이군. 그나저나 양소혜는 용케도 그 사지를 뚫고….

“…!”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의문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분명히 아까 양소혜가 ‘태백이 알려준’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몬스터로 변이 당했다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은 이내 좋지 않은 예감으로 변했다.

머릿속에 늙은 너구리처럼 음험한 눈빛을 흩뿌리는 강태백이 음침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만요. 분명히 ‘태백에서’ 알려준 신형 게이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응. 태백에서 남부연합 쪽에 앞으로 처음 보는 남색 게이트가 생기는데. 위험한 거니까. 가장 실력 있는 공격대원들에게 맡겨 조사하라고 경고했었어. …확실히 태백에서 경고해준 대로 위험한 게이트였는지. 그걸 조사하러 떠난 공격대는 모두….”

“….”

양소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슬픔을 동정해줄 여력이 없었다.

머릿속을 스쳤던 일말의 불안함이 그녀의 답변을 빌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에서 폭음이 터져나갔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거지?”

대 침식의 비극을 막기 위해 강태백에게 알려준 정보가 남부연합에겐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같은 비극을 불러온 방아쇠가 되어버렸다.

강태백! 그 사악한 새끼는 내가 준 정보를 거꾸로 왜곡시켜 남부연합 측에게 알려줘버린 것이었다!

이런 썅! 독사 같은 새끼 같으니라고!

-빠드득

덜덜 떨리는 턱을 억지로 까드득 깨물었다. 부서져라.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턱이 으스러지는 고통 덕분에 순간적으로 닥쳐온 패닉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또아리를 틀었다.

고작 남부연합을 견제하겠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지방에 지옥을 열어버린 강태백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이 마그마같이 들끓는 분노를 타고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무슨 짓이라니? 그, 그보다 괜찮아? 용호?”

의문을 표하려던 양소혜는 눈을 크게 뜨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입 속의 살점까지 같이 깨물어버린 모양이다.

입속에 뜨끈한 핏물이 가득했다. 입가에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시뻘건 핏물을 타고 격한 감정도 같이 흘렀다.

“…괜찮습니다. 잠시 실례를 좀.”

“으, 으응.”

나는 당황한 양소혜를 밀치듯 거칠게 지나쳐 성큼성큼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공방 구석의 세면대로 걸어가 입안에 흥건한 피를 뱉어내, 흐르는 물에 흘려보냈다.

새하얀 세면대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수도꼭지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이 새빨간 핏물을 쓸어내렸다.

“강.태.백!”

흐르는 수돗물을 입안에 머금고 남아있는 핏물을 씻어낸 나는 강태백의 이름을 짓씹듯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었다.

차가운 수돗물이 세면대의 핏물은 말끔하게 씻어냈을진 몰라도, 혐오와 증오로 응어리진 내 마음은 씻어내지 못했다.

강태백!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가 중형 길드를 고까워하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선은 지키는 놈일 줄 알았다.

회귀 전의 그는 그리 선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 이익을 위해 태연히 학살을 저지를 악인까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강태백에게 침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것도, 5대 길드가 주도하는 현 헌터 업계의 구조에 누구보다 만족 중인 인물이 강태백이었기 때문이었다.

5대 길드가 주도하는 질서를 계속해서 존속시키기 위해서라면, 강태백은 그 정도 정보 쯤은 약간의 이득만 본 채, 다른 길드에 아낌없이 풀어버렸을 거라 판단하에 놈에게 정보를 준 것이었다.

설마하니 강태백이 내가 전해준 침식형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역으로 이용하여, 남부연합을 몰락시키는 음모를 실행시켰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강태백을 잘못 판단한 내 실수로군.

-크르르륵

다시 한번 수돗물을 입안에 머금곤 거칠게 뱉어냈다.

핏물이 얼룩진 세면대의 거울에 비친 내 잘생긴 얼굴은 그야말로 흉신악살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강태백…. 설마하니 네놈이 그런 식으로 제 탐욕을 채우려 들었단 말이지?

아무래도 계획을 좀 변경해야겠어.

-츠츠츠츠

말없이 거울을 노려보는 내 눈빛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금속 특유의 섬뜩한 한기를 머금은 안광이 황금빛으로 물든 눈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

“죄송합니다. 잠시 추태를 보여드렸었군요.”

들끓은 분노를 다스린 나는 세면대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하곤 공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왜인지 안절부절못한 기색의 양소혜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나는 괜찮지만. 용호는….”

“그것보단…, 아니, 이제야 묻는 것도 좀 그렇긴 합니다만. 어째서 강태백 길드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려는 겁니까? 그리고 전 또 어떻게 찾아오신 건데요?”

양소헤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나는 다른 곳으로 화두를 돌렸다.

비록 말돌리기용 질문에 불과헀지만, 이것은 양소혜가 내게 무릎을 꿇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말들었던 의문 중 하나였다.

“그게…. 실은 아빠랑 강태백 길드장님이랑 친한 사이였거든….”

아 맞네. 그러고 보니. 양소혜의 아버지, 남부연합의 맹주 양석필은 강태백과 면식이 있는 사이였지?

생각해보니 양석필과 강태백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같은 공격대에 속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 사이였다.

…그런 인물을 고작 그런 이유로 져버렸다는 말이지? 강태백?

“그리고. 세영이가 마침 태백에 용호가 들어갔다고 알려줬었거든, 태백에 혼자 찾아가면 민망하니까….”

강태백에 대한 감정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려던 차에 양소혜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물쭈물 늘어놓았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스스로가 뻔뻔스럽게 느껴진 모양인지 양소혜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세영이라…. 이세영? 양소혜는 그 익살꾼의 딸이랑 아직까지 연락을 해왔던 건가?

튜토리얼 타워에서 같은 조였던 또 다른 인물 이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번 찾아가보려고 했었는데, 이게 또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은 몰랐네.

“거 참 인상적인 이유긴 하네요. 소혜…씨 답다면 소혜 씨 답기도 하고.”

“미, 미안해. 좀 뻔뻔스러웠지만. 너무 급해서….”

핀잔하듯 장난스레 양소혜를 바라보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곤 열없이 볼을 긁적거렸다.

“괜찮습니다. 한때 서로 창을 겨눴던 사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죠.”

그래, 너라면 얼마든지 강태백과 만나게 해줄 수 있지.

처음 계획은 적당히 강태백을 견제하며 한세훈이 그랬듯 태백 길드의 모든 것을 빨아먹을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변했다.

놈이 먼저 제 탐욕을 위해 인륜을 져버린 이상, 나는 놈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남부연합의 맹주 양석필의 딸, 양소혜를 이용한다면….

“으으…. 고마워, 이 은혜는 정말 어떻게든 갚을게.”

계속해서 감사를 표하는 양소혜를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눈을 빛냈다.

은혜라, 은혜 좋지. 더 큰 은혜를 쥐어줄 테니 갚을 생각이나 해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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