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흐응. 흥흥.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빠각! 빠가가각!
크리스마스날 지인에게 건네줄 선물을 포장하는 마음으로 나는 캐롤송을 흥얼거리며 심영득의 사지를 모조리 박살내놓았다.
아직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엔 심각하게 이른 시기지만, 박정욱에게 건네줄 사교도들을 ’포장‘하는 내 마음만큼은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가 있었다.
“끄아악! 그냥 죽여! 이 미친 새…. 끄르륵.”
완전히 포장되어 사지가 완전히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심영득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더니, 이내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렸다.
“오늘밤에 다녀가신대.”
-빠드득!
곧이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는 격언처럼, 나는 심영득 옆에 있던 나머지 사교도들의 사지까지 덤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끄흡! 도, 도대체 저, 저희는 왜…! 끄흡!”
사교도들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이유는 뭐, 별거 없었다.
단순히 박정욱을 기다리는데 지루하기도 했고, 이곳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엔 심영득의 육신은 너무 연약했으니까.
-….
흥겹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중,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쪽에서도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던 마지막 사교도가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버렸기에, 광기와 폭력이 넘실거렸던 게이트 관리소에 갑작스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처벅. 처벅.
왜인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부서진 비상구 너머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단한 전투화굽이 물기를 머금고 계단을 규칙적으로 밟는 소리, 갑옷을 착용한 헌터 특유의 육중한 발소리였다.
“…!”
육중한 발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검은 갑옷을 걸친 헌터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곳에 들어선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다.
“사,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이야!”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헌터의 눈가에 영문모를 물기가 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엔 환희인지 무엇인지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울음 섞인 미소가 맺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그는 생존자를 발견한 사실 자체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 대장! 대자앙! 여기, 여기 생활관 쪽에 생존자가 남아 있습니다! 생존자라고요!”
뭔가를 떠올린 모양인지, 후다닥 비상구 밖으로 뛰어나간 헌터는 목청이 터져라. 큰 목소리로 외쳤다.
희열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속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은연중에 내비쳐지고 있었다.
“흐흑, 흐흐흑. 감사합니다. 성좌들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털썩.
계단에 소리를 지르고 돌아온 헌터의 다리가 풀렸다.
그렇게 그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곤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이리 시끄러운 게냐? 저놈은 뙈 왜 저래? 사내새끼가 야무지지 못하기는!]
허우대 멀쩡한 사내놈이 서럽게 흐느끼는 모습이 거슬려서였을까?
잠시 쉬겠노라 선언했던 위철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느끼는 헌터를 뚱하니 바라본 그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도…. 자신이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겠죠.’
나는 주저앉은 채로 흐느끼고 있는 헌터의 복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행적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헌터의 검은 갑옷은 완전히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들썩이는 갑옷의 등판에 새겨진 산양 문양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설악 공격대 소속이었다.
대충 그의 말로 추론해보면, 아마도 눈앞의 설악 공격대원은 이성을 잃은 자신이 무고한 생명을 해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들로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에 피가 흥건한 상태였을 테니까요.’
뭐…. 전후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박정욱 그 양반 휘하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격대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흥. 칼밥 먹고 사는 놈이 나약하기는. 쯧!]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위철용은 콧방귀를 뀌며 거하게 혀를 찼다.
물론, 말로는 그렇게 책망해도 설악 공격대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안타까움이 슬쩍 내비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양반이라니까.
이상한 곳으로 새침데기 기질을 발휘하는 위철용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괜히 쓴웃음이 지어졌다.
“저기….”
설악 공격대원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쿠와아앙!
잠금 상태인 엘리베이터에서 폭음이 터졌다.
보통 육중한 충격이 가해진 게 아닌 듯, 단단하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우르릉 흔들렸다.
연막탄이라도 터진 양, 엘리베이터의 문틈 사이로 먼지가 마치 연기처럼 비어져 나왔다.
-꽈드드득!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큼직한 손가락이 쑤욱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손가락이 닫힌 철문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특수합금을 사용한 엘리베이터 문이 마치 골판지로 만든 상자처럼 간단히 우그러졌다.
그렇게 무식한 괴력을 자랑하며 열린 문 사이로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생존자라고 했나?”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장대한 체구.
부리부리한 눈, 사내답게 굵게 뻗은 눈썹, 고집스러움을 가득 담은 입매.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설악 공격대의 공격대장, 산군 ‘철옹성’ 박정욱이였다.
어찌나 급했는지, 그는 그대로 봉쇄된 엘리베이터 위로 뛰어내린 모양이었다.
“…!”
나와 기절한 사교도들을 바라본 박정욱의 강건한 얼굴에 동요의 빛이 스쳤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었으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이었다.
“…예, 예 대장! 다행히 생존자들이 남아있었어요. 우린…. 우린….”
“그만 됐다. 일단 잠시 쉬고 있도록.”
박정욱의 등장에 흐느끼던 공격대원이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박정욱은 숨을 할딱거리며 울부짖는 공격대원을 꼬옥 안아 등을 두드려주었다.
기력이 다한 모양인지, 정신없이 뇌까리던 공격대원은 그의 품 안에서 기절해버렸다.
“정말이군. 생존자야. 다행히 살아남은 이가 있었어…. 저희를 굽어살피시는 성좌들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
그렇게 기절한 공격대원을 바닥에 눕힌 박정욱은 천천히 내쪽으로 걸어왔다.
평소에 잘 찾지도 않는 성좌에게 감사 인사를 올릴 만큼 그 역시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았다.
“자네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네만. 고맙네. 살아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살아있어 줘서 다행이라니, 영문을 모를 말씀이시군요. 박정욱 선배님.”
박정욱의 영문 모를 감사 인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당당하게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헌터…? 가만. 갑옷의 생김새로 보아하니, 우리 태백 소속이로군. 우리 설악에 새로운 인원이 충원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네만. 자네는 누군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제야 내 복장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는지, 박정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원리원칙을 심히 따지는 그의 고지식한 성격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 복장을 확인한 그는 깐깐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다.
“설용호입니다. 사교도를 추적하는 중이었습니다.”
“설용호…? 허어. 안종훈을 거꾸러뜨린 젊은 산군이 자네였는가? 하긴. 자네처럼 잘생긴 헌터가 또 있을 리가 없지.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군.”
내 이름을 들은 박정욱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굳이 신분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 이름만 듣고도 바로 내가 새로운 산군임을 인지하였다.
다시 고개를 든 박정욱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사교도에 관해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았다.
성난 불곰처럼 광폭한 살기가 곰처럼 거대한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역시라니, 뭔가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으셨나 보군요.”
‘짐작 가는 일’이라는 말에 박정욱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침중해졌다.
활화산처럼 들끓었던 분노가 씻은 듯 사라졌다. 음울한 죄책감이 그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내가, 우리 식구들이….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다네.”
힘이 없어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박정욱은 내게 고해하듯 자신이 저지른 일을 털어놓았다.
짙은 죄책감에 절어있는 그의 목소리엔 회한의 감정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회식하던 도중 의식을 잃었더니 퀴퀴한 지하실에서 정신을 차린 것부터 시작해서, 이틀 동안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별안간 광기에 사로잡혀 게이트 관리소의 직원을 모조리 살해했다는 것까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박정욱의 목소리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원흉에 대한 증오가 공존하고 있었다.
회개실 안의 신부에게 고해하듯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평생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선량하게 살아온 남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일 있으셨군요. 헌데…. 선배님께선 과연 그들이 ‘무고한’ 이들이라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뭐…?”
박정욱은 나의 말에 고개를 힐끗 들었다.
의아한 듯 묻는 그의 목소리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곳은 이미 사교도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뒤였습니다.”
“그, 그럴 리가. 이곳의 직원들은 모두 나와 친분이….”
“그렇겠죠. 그렇게 친분을 쌓고 방심한 틈을 타, 잠입하는 것이 놈들의 수법이니까요. 혹시…. 이 남자를 아십니까?”
아연한 표정의 박정욱 앞에 기절한 심영득을 질질 끌어다 놓았다.
심영득의 처참한 몰골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 박정욱의 눈이 이내, 왕방울만 하게 변했다.
“로비에 근무하는 심영득이 아닌가! 한 달 전 인사이동 때부터 성실히 일하던 친구였거늘….”
심영득의 얼굴을 알아본 박정욱이 한숨 쉬듯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심영득이란 인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덕분에, 대충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 전이라….
하필이면 이서초 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인사이동이 공교롭게도 시커먼 빛 클랜 놈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 같았다.
역시, 역사가 변해버린 이유는 역시 내가 체체파리 클랜과 엮였기 때문일까?
“그렇군요. 애석하게도 이 자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의 원흉입니다.”
고개를 흔들어 의문을 털어낸 나는 기절한 심영득을 번쩍 들어 박정욱의 눈앞에 가까이 들이대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찢어져라. 눈을 크게 치켜뜬 박정욱에게 나는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해줬다.
“평화역장이라니…. 확실히 갇혀 있는 동안 기이한 기분이긴 했네만. 그렇게 무서운 것이 있었다니….”
설악 공격대가 허망하게 당해버린 평화역장에 관련된 이야기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박정욱의 위치가 위치인 데다. 그가 직접 평화역장의 무서운 위력을 겪었으니만큼. 그에게 약간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일종의 투자였다.
워낙 고지식한 박정욱이기에, 평화역장에 관해 알려줌으로써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기도 좋고, 훗날 내가 평화역장의 위험에 대해 역설할 때, 그를 증인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
“그러니, 선배님께선 잘못한 게 없으십니다. 이미 이곳은 간악한 사교도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뒤였거든요.”
침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박정욱에게 나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렇군…. 그런 것이었어. 길드장님께서 신종 게이트의 위험성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긴 했네만, 사교도 놈들이 그것을 이용해 우리를 몬스터로 바꾸려 들었을 줄은 몰랐군.”
박정욱은 소름이 다 끼친다는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표정은 침중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점차 괴로운 죄책감이 가시고 있었다.
무고한 이를 살해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그는 조금씩 벗어나는 듯했다.
“그렇다면, 다른 식구들에게도 전해줘야겠군. 그들 역시 마음고생이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일세.”
박정욱의 얼굴에서 약간이나마 번민의 기운이 가셨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 끝에서 박정욱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곤 내게 담담하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자네가 우리 설악의 모두를 구했어.”
“아닙니다. 선배님 같은 태백의 식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과할 정도로 고개를 꾸벅 숙인 박정욱에게 나는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겸양을 떨었다.
하지만, 한 번 숙여진 그의 무거운 고개는 계속해서 내게 부담스러운 감사를 표했다.
“아닐세, 덕분에 우리 식구들이 마음의 짐을 덜었어. 설악이 자네에게 빚을 졌군.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