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흐응. 흥. 흥.”
흥겨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심문실을 빠져나오자.
어쩐지 불안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신지현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무래도. 내가 안종훈에게 무슨 짓을 할까 두려워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어라. 매니저님. 바쁘신 거 아니었습니까?”
해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자. 손끝에 묻어있었던 안종훈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후두둑 튀었다.
사방으로 튄 피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비린내를 풍기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
신지현은 그렇게 땅에 피어난 붉은 꽃과 온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인 나를 멍하니 번갈아 보았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거에욧!”
마침내 정신을 수습한 신지현이 경악한 표정으로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덕분에,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불안하게 들고 있었던 에너지 드링크 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간 알루미늄 캔이 바닥을 흥건히 적신 핏자국을 길쭉하게 퍼뜨렸다.
“거, 말씀하신 대로 기세가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고분고분하게 만드느라 애 좀 썼습니다.”
나는 별일 있냐는 듯, 능글능글한 말투로 신지현 앞에서 어깨를 가볍게 한번 으쓱였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시체같이 창백했던 그녀의 얼굴이 이번엔 아예 시커멓게 죽었다.
더 크게 뜰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똥그랗게 홉뜬 눈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고, 고분고분? 미쳤어요?! 지금 안종훈에게 고, 고문을…. 어으억!”
뒷목을 탁 부여잡은 신지현이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렀다.
어지간히 충격이 큰 모양인지, 그녀는 어질어질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고문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시다니. 전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신지현의 목소리엔 힘이 쭉 빠져 있었지만, 말투에선 특유의 짜증과 히스테리가 느껴졌다.
상처 입은 암 여우의 으르렁거림을 방불케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알 수 없는 기백마저 느껴졌다.
“놈이 워낙 말을 들어 먹어야 말이죠. 그런데…. 매니저님은 혹시 새로운 산군인 저보다. 패배자 놈의 잔당 따위를 더 두려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존댓말이 섞인 말투는 처음엔 나긋나긋하니 따스했지만, 새로운 산군을 언급할 순간부턴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거칠고 서늘하게 울렸다.
심통 난 여우처럼 종알거리는 신지현의 짜증 섞인 목소리완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백!
늙고 쇠약해진 사자의 무리를 빼앗은 수사자는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그 어떤 잔혹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기 마련이다.
단순히 위엄을 세우는 것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것이 패배한 잔당 따위가 자신의 위엄을 침범하려는 상황이라면, 수사자는 지상 위의 어느 생명체보다 더 잔인하고 난폭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지.
내 목소리엔 격노한 젊은 수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난폭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매 앞의 참새처럼, 난생 처음으로 내 진면목을 마주한 신지현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그녀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가늘게 몸을 떨었다.
“…제, 제가 감히 서, 설용호 헌터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건 아, 아니에요.”
말투에서 함뿍 묻어나왔던 표독함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신지현은 변명하듯 더듬더듬 간신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영민한 그녀답게 조금 전, 자신의 말이 내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다, 단지 안종훈 그, 그 새끼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워낙 만만치 않아서….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신지현은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변명처럼 안종훈의 뒤를 봐주는 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격변 이래, 대한민국 건설업계를 꽉 쥐고 있는 삼화 건설의 대표 고수영.
전원이 헌터들로 이뤄진, 사설 경호업체 ‘101’의 대표 박수만.
동민 일보를 꽉 틀어잡고 언론계를 쥐락펴락하는 신문사 편집장! 조용재.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위축될 만큼 대단한 거물들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감히 나의 위엄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명하기라도 하듯.
허옇게 질린 얼굴로 놈들의 이름을 허겁지겁 내뱉는 신지현의 표정엔 절박함마저 담겨 있었다.
…이렇게 궁지에 몰려서야 놈들의 이름을 내뱉다니, 확실히 신지현은 한 마리 여우 같은 여자로군.
계속해서 이런 ‘숨겨놓은 한 수’를 듣기 위해서라도, 자주 이런 식으로 압박을 해야겠어….
“이미 이빨이 빠져버린 산군을 감싸려는 멍청이들치곤, 제법 거물들이긴 하군요. 매니저님이 감히 제게 그런 반응을 보일만도 해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참을 가만히 듣기만 하던 내가 조용히 입을 열자, 흠칫 놀란 신지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그들도 안종훈에게 이것저것 엮여있는 게 많으니까요.”
그렇게 몸을 떨면서도 신지현은 마지막 말을 강조하듯 덧붙였다.
확실히…. 그녀 말대로 안종훈과 그 ‘거물들’은 엮여 있는게 많긴 많겠지.
안종훈이 산군이자, 태백의 감찰팀 팀장으로 군림해온 세월이 결코 짧지만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신지현의 말과는 다르게, 안종훈 성격상 그들과 ‘좋은’ 관계로만 맺어져 있을 리 없다.
단순한 이익 관계라면 놈들은 안종훈이 산군 쟁탈전에서 패배했을 때, 깔끔하게 안종훈과의 관계를 정리했을 테니까.
게다가 놈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손익계산에 빠른 족속들이니만큼.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이 빠진 호랑이 하나를 보호하겠다고 새로운 산군에게 적대적으로 나올 리는 없겠지.
그 말은, 안종훈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든지.
아니면 안종훈의 몰락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불러온다든지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제가 안종훈에게서 알아낸 거라면 놈들도 감히 안종훈을 감싸진 못 할 겁니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신지현에게.
안종훈이 심문실 내부에 자신만의 비밀공간을 만들어 놨다는 것과 그곳을 수색한 내가 수상한 서류를 ‘몇 개’ 발견했다는 것을 말해줬다.
“이게 그 수상한 장소를 뒤지다가 발견한 겁니다.”
그리곤 아까 안종훈 앞에서 흔들었던, 가면 놀이 스킬로 만들어낸 ‘계약서’를 신지현에게 건넸다.
“이거 내용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서류를 찬찬히 훑어본 신지현의 반응은 의외로 시원치 않았다.
처음이야 눈을 뚱그렇게 뜨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서류를 전부 다 읽은 뒤, 잠시 뜸을 들인 그녀의 눈빛은 이내 시무룩하니 가라앉았다.
뭐지? 그 정도라면 충분히 그녀에게 격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줄 알았는데?
안종훈을 몰아넣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것인 만큼. 서류 속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들로만 가득 채워 놨었다.
이서초 게이트 사건에 대해 안종훈이 협력했다는 것.
남성국이 이서초 게이트에 잠복하기 위해, 안종훈의 도움을 받아 하승진을 살해했다는 것.
그것을 대가로 안종훈에게 태백 길드를 장악하도록 체체파리 클랜에서 남몰래 도와왔다는 것 등등.
누가 봐도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내용만 선별하여 때려 넣었는데….
혹시 그 정도론 부족한 건가? 안종훈의 세력이 그런 것 까지 무마시킬만큼 대단하단 말이야?
“고작 이것만으론 그들의 지지를 깨뜨릴 수 없어요. 헌터님.”
낯빛이 어두워진 신지현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내게 다시 서류를 돌려주었다.
나름 기대한 모양인지, 그녀의 눈빛에선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고작 서류 정도는 충분히 위조라고 일축해버릴 수 있는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니까요.”
흐음…. 하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언론사를 콰악 틀어쥔 조용재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
언론을 틀어쥔 그의 권력이라면, 인맥을 동원하여 서류가 위조된 것뿐이라 일축해버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신지현 씨. 당신이란 여자가 고작 이 정도였어?
이런 서류 따위로 안종훈을 직접 옭아매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 있지 않아?
“그래요? 그럼 이건 어때요? 오히려 안종훈을 두둔하는 자들을 역이용하는건?”
“뭐…라구요?”
내 말을 들은 순간, 신지현의 눈이 멍청하니 몽롱하게 변했다.
굉장한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그녀의 표정은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적을 찍어낼 때. 오히려 그를 감싸는 세력을 역이용하는 것은 회귀 전 신지현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그때의 나 역시, 신지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당한 적이 있었던 수법인데. 이걸 내가 그녀에게 직접 전수해 주는 날이 올 줄이야….
“잘 생각해봐요. 그들도 좋아서 안종훈에게 협력하고 있겠는지.”
계속해서 은근슬쩍 힌트들을 건네며, 그녀의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신지현이라면 자신의 정적에게 비밀장소가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모략과 계략을 꾸며냈을 거다.
굳이 내가 이렇게 옆에서 참견하지 않아도 과거의 그녀라면, 이미 서류를 손에 넣은 시점에 안종훈과 놈을 두둔하는 세력들을 통째로 옥죌 수 있는 올가미를 수십 개나 즉석으로 만들어 냈을 걸?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라. 그렇네요.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멍한 목소리로 말을 줄줄 늘어놓는 신지현의 눈이 교활함을 되찾았다.
마치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을 준비가 완료된 암 여우와 같은 눈빛이다.
다행히 몇 개의 힌트를 조합한 그녀는 비로소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승진의 아버지, 하동식이 그렇지 않아도 고수영과 굉장히 친했었죠 아마?”
빙글빙글 웃음을 되찾은 신지현이 언급한 인물은 나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 말대로, 하동식과 막역한 사이인 고수영에게 하승진의 죽음이 적힌 서류를 은밀히 건네준다면 꽤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절친 아들의 죽음에 안종훈이 관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수영에겐 충분히 안종훈을 배신하는 방아쇠가 될 수 있거니와….
그것을 하동식에게 알려줌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안종훈 따위를 감싸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할 터이니, 고수영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헌터협회 게이트 관리부 부서장 하동식이라면 업계에서도 꽤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마 아들의 죽음에 안종훈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길길이 날뛰어 주겠지.
안종훈을 비호하려는 세력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도록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하동식 서장님께서 이서초 게이트 사건에 불만이 많으셨는데…. 생각보다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정보로 가공할 수 있겠네요.”
하동식의 이름을 언급한 신지현의 눈빛이 교활한 빛을 뿌렸다.
“게다가 안종훈 그 양반. 지금 본인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잖아요?”
신지현은 그렇게 말하며, 피로 얼룩진 내 옷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용호 헌터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의도하셨으니. 놈에게 가볍게 손을 썼을 리도 없구요.”
그렇다.
헌터의 재생력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것이기에. 나는 안종훈을 철저히 무력화하기 위해, 놈을 철저히 박살 내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족히 정양해야 간신히 의사소통이라도 가능할 만큼 철저하게 말이지.
신지현쯤 되는 수완을 지닌 인물이라면, 그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다.
이를테면. 안종훈에게 빼도 박도 못할 누명을 씌워, ‘사교도의 유혹에 넘어간 변절자.’라는 프레임의 씌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렇게 신지현을 이용해 안종훈에게 사교도와 결탁한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면.
앞으로도 사교도 관련 문제에 꽤 쓸만한 패로 안종훈을 계속해서 사용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슬슬 준비해온 것들의 끝이 보이는 느낌이로군.
“다른 산군들도 체면 문제로 끼어들지 못할 테니까. 협회의 힘만 이용하면….
다시 교활함과 해맑음을 되찾아 종알거리는 신지현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래. 준비는 이제 얼추 다 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대 침식을 맞이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