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계십니까.”
“어머, 설 헌터님 아니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안종훈과의 일을 신지현에게 떠맡긴 뒤.
길드 사옥을 빠져나온 난. 지금 노량진의 소망 공방에 와 있었다.
사흘 만에 방문하는 공방은 여전히 한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탓일까?
김혜연은 어쩐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겐 내가 등에 메고 있는 자신의 역작, 어둠달을 보고 있었다.
“아뇨. 문제는 무슨. 기대 이상으로 잘 써먹고 있습니다. 손맛이 굉장히 좋던데요?”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주자, 김혜연의 굳은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아! 그럼 혹시, 혜옥이 때문에 오신 건가요?”
이번엔 김혜연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대견함이 서려 있는 따뜻한 눈빛이었다.
“지난번에 알려주신 운동법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답니다.”
-으르아아아아! 스쿼트! 스쿼트!
김혜연의 시선을 따라, 창문으로 다가가니.
철제 화로를 등에 진 채 괴상한 괴성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는 김혜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 확실히 열심히는 하고 있네요. …저렇게까지 하라곤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위철용의 설명에 따라, 알려준 수련 방법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저 기초체력을 위해, ‘조금’ 무거운 것을 짊어진 채로 하반신의 근력을 기르라는 것이었는데….
저게 그녀에겐 ‘조금’ 무거운 거라고?
김혜옥이 등에 짊어진 화로는 어지간한 성인 남성 두 명은 무리없이 들어갈 법한, 초월적인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었다.
‘저래도 돼요?’
[상관없다. 무릇 수련이란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스스로를 갈고 닦는 것! 실로 훌륭한 자세가 아닐 수 없도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어, 위철용에게 슬쩍 물어봤으나.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그는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눈빛으로 김혜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김혜옥 정도의 신체 능력이면 저 정도는 되어야 근육에 부하가 올지도 모르겠네.
“혜옥이가 저렇게까지 뭔가에 열정을 쏟는 것은 처음 본답니다. 정말이지 헌터님껜 항상 도움만 받고 있네요.”
원체 강인한 성격의 김혜연답게 먼젓번의 고민 따윈 진즉 훌훌 털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을 털어낸 그녀는 본격적으로 김혜옥을 응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혜연은 내게 감사가 섞인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덕분에 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뭘. 혜옥 양이 열심히 한다니 그것참 다행…”
과거, 옛 지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그 푸근한 모습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 훈훈함에 이쪽에서도 덕담을 건네려는 찰나….
-콰앙!
창문에서 괴성을 지르던 김혜옥의 모습이 어느새 사라졌다. 싶더니. 굉장한 소리와 함께 공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몬스터 프로틴 드링크!”
뭔 드링크?
문을 박차며 실내로 들어선 김혜옥의 몸엔 새하얀 증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땀인지, 영혼인지 모를 것들이 그녀의 강인한 육체에서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패기롭게 문을 부수듯 박차고 들어온 김혜옥은 김혜연에게 정체 모를 것은 요구했다.
“크허어어어! 좋다아!”
김혜옥의 목소리에선 마치 목욕탕에서 갓 목욕을 마친 중년 아저씨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우락부락한 외형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그 나이대 소녀다운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냥 헬스장의 흔한 중년 아저씨 그 자체였다.
“어라? 사부님?”
그렇게 포효하듯 우렁찬 외침을 쏟아낸 김혜옥이 마침내 나를 발견하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반가움이 서렸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안녕하심까 사부님!”
쩌렁쩌렁한 굉음, 좁은 공방이 통째로 우르릉 뒤흔들리는 진동.
단순한 인사였지만. 김혜옥의 목소리엔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파괴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혜옥 양.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명이 웅웅 울리는 귀를 부여잡고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김혜옥을 올려다보니 그녀의 얼굴엔 반가운 미소가 함뿍 걸려있었다.
잠깐만. 내가 ‘올려다’ 봤다고?
“…키가 좀 자라신 것 같네요?”
조금이 아니다.
나와 별 차이가 없었던 김혜옥은 사흘 만에 전보다 손바닥 한 뼘만큼은 자라 있었다.
성장기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나간 발육속도다.
도대체 그녀에게 또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으하하하! 지난 사흘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부님께서 알려주신 호흡법과 운동을 병행하니. 확실히 효과가 좋더라구요! 몸에 힘도 넘치고! 키도 쭉쭉 자라고!”
호탕하게 웃은 김혜옥은 팔을 굽혀 자신의 알통을 뽐내듯 보여줬다.
거의 볼링공만 하게 부풀어 오른 이두가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아래쪽의 삼두도 질 수 없다는 듯 불끈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점점 인간과 멀어지는 것 같은 모습에 기함하며. 은밀히 목소리를 낮춰 위철용에게 물었다.
‘쟤한테 알려준 운기법에 그런 효과가 있었어요?’
[당연하지. 운기라는 게 본디 몸을 다스리는 양생법의 일종이 아니더냐. 단기간에 효과를 본 것은 그녀의 타고난 무골 덕분이니라.]
위철용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나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체질 문제를 뛰어넘어, 그냥 생물학적 한계에 도전한 행위 같은데….
“아참! 사부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근육의 꿈틀거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근육을 자랑하던 김혜옥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말릴 새도 없이 꿇은 채로 별안간 자신의 머리로 바닥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쿠왕! 쾅! 꽈과광!
김혜옥의 머리는 강철제 해머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싸구려 과자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수도관이 터졌는지, 보일러가 터졌는지, 마치 바닥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부서진 바닥에서 물이 축축하게 흘러나왔다.
“혜, 혜혜혜 혜옥 양 이게 대체 무슨 짓을….”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김혜옥의 기이한 행동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뒤늦게나마 그녀를 만류하려 들었으나.
김혜옥은 이미 아홉 번의 박치기로 공방의 바닥을 완전히 결딴 내버린 상태였다.
“구배지례! 무협지에서 봤어요! 사제의 연을 맺을 땐 이런 걸 해야 한대요.”
무자비하게 바닥을 박살 낸 뒤, 고개를 번쩍 든 김혜옥의 얼굴은 해맑았다.
생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구배지례가 원래 아홉 번 절을 하는 게 맞던가?
[으음! 그렇지! 자고로 제자 된 자라면 마땅히 스승께 예를 표해야 하는 법! 비록 방식은 다소 왜곡되었나. 그 예에 담긴 정신만큼은 훌륭하구나! 본존의 눈이 역시 틀리지 않았느니라!]
내가 경악한 것과는 반대로, 위철용은 김혜옥의 괴상한 행동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마치 자기가 인사를 받기라도 한양. 넉넉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헤벌쭉 걸려있었다.
“흐하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싸부님!”
그렇게 파괴적인 행동을 자행한 김혜옥은 허리를 젖힌 채,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얘. 원래 나이로는 여고생 맞지?
하는 짓으로만 봐선, 이게 여고생인지, 아니면 뒷산을 지배하는 산적인지 헷갈릴 정도다.
한 사흘 안 본 사이에 김혜옥의 상태는 지난번보다 더 괴이쩍게 변해 있었다.
“혜, 혜옥 양? 그 이상한 웃음소리는 대체….”
“알려주셨던 무공인가 뭔가를 알기 위해, 김씨 아저씨네 집에서 무협지를 좀 읽었거든요!”
아니, 무슨 무협지도 무협지지! 좋은 표본들 많잖아!
다른 좋은 것들은 어따 팔아먹고, 대체 왜 무슨 산적두목의 행동 양식만 배워온 건데!
무협지라는 말에 괜히 머리가 아파 왔다.
나 때문에, 얘가 괜히 이상한 걸 배워버린 것 같아. 기묘한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아니. 아니, 그 열정이 나쁜 건 아닌데. 혜옥 양? 시대적 생활상이라는 게 있잖아요. 무협지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헌터 보셨어요? 지금은 명나라 시대가 아니에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강해 보이잖아요. 이젠 아무도 제게 덤비거나 놀리지 못하는걸요.”
김혜옥의 말투와 표정은 해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우중충했다.
겉으론 해맑은 척, 호탕한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내면에 담긴 고뇌가 슬쩍 비쳐졌다.
“후우….”
비로소, 김혜옥이 어째서 저렇게 기이한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우람하니 거대한 모습과 과거 못생긴 나, 설용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두려워서 그러는 거다.
회귀 전의 내가 못생긴 것에 콤플렉스를 품고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착한 사람’을 연기하며 호구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김혜옥은 남들과는 너무도 이질적으로 건장한 모습 탓에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무협지 속이 강인한 인물상을 그대로 본 따, 강한 척 연기하는 것이겠지.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평생을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로 연기하면서 사는 것은 후회만을 낳는 일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그렇게 몇 번이나 남들의 시선 따윈 상관하지 말라 일러줬는데.
아직 어린 김혜옥 입장에선 영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나 보군.
하긴… 한창 남의 시선에 예민할 나이니까 어쩔 수 없나.
“혜옥 양. 굳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옥 양 본인에게 자신감을 좀 가져보세요. 무협지 속의 산적두목이 정말 혜옥 양이 되고 싶은 모습입니까?”
진중하게 목소리를 낮춰 김혜옥에게 다시 한 번, 조언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조언해주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회귀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해줄 이가 있었다면 좀 좋았을까….
“저 스스로에게 솔직하게요?”
그 말을 들은 김혜옥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커다란 눈망울엔 눈물이 방울방울 흘렸다.
“…고마워요. 사부님.”
-꽈드드드득
김혜옥은 눈물 젖은 얼굴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어서 그런지, 그녀의 포옹은 베어허그 수준의 공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해야 했을 정도!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아마 허리가 뚝 부러졌을 것이다.
“훌쩍. 사실. 이런 거 정말 싫었어요. 걸걸하게 목소리 까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절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도 무섭구요.”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는 김혜옥의 눈빛에선, 이제야 그녀 또래 특유의 순수함이 빛났다.
그래,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그 고통을 누가 알아주겠어.
“일단 그 혜옥 양이 진짜 뭐가 되고 싶으신지 알려주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네, 사부님. 일단 사부님이 알려주신 수련법대로 튼튼한 육신을 기르고 있겠어요.”
…저기서 더 튼튼해질 수 있다고?
뭔가 좀 마지막말이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사담은 여기까지다.
오늘 김혜연 자매를 찾아온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으니까.
“크흠. 아무튼 제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제시할 것과 부탁드릴 것이 있어섭니다.”
그 말에 이제껏 나와 김혜옥의 촌극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뻐끔 벌려진 입으로 그녀는 들릴락 말락 ‘부탁?’ 이란 단어를 머금었다.
“설 헌터님 부탁이라면, 저희가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무슨 일이실까요?”
다소 당황스러운 요청일 텐데도 김혜연은 개의치 않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김혜연에게 나는 주머니를 뒤져 준비해온 설계도를 하나 건넸다.
“세상에, 굉장히 사치스러운 물건이네요. 들어가는 재료값만 해도 차 몇 대는 뽑겠는데요?”
설계도를 바라본 김혜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재료값을 언급하긴 했지만, 꽤 흥미가 가는 모양인지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설계도를 훑어보았다.
“꼭 필요할 거라서요. 재료는 전부 드릴 테니, 어느 정도 걸리실 것 같습니까?”
“음, 재료만 있다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작 스킬도 제법 올렸거든요.”
김혜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 있게, 금방 끝낼 수 있노라 호언했다.
호탕함이 슬슬 깃들기 시작한 목소리에선, 과거의 김혜연이 보여줬던 모습이 살짝 내비쳐졌다.
…금방 끝낼 수 있단 말이지.
나는 김혜연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슬쩍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제안’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로 꺼냈다.
“혹시, 공방 이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